|
2015년 1월에 전하는 메시지
창가에 햇살이 따사롭다.
임 찬 규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 새해가 벌써 10일이나 지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가슴에 안아본다. 밤새 찌뿌드했던 몸을 천천히 풀며 민트차를 태워(타다 젓다-경상도 사투리) 들고 햇볕을 마주하고 창가에 앉았다. 잠시 후 추죽 찌익 추죽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은 바쁜듯 계단을 내려가는 우유배달원의 발걸음이 멀어져간다. 2006년 가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절망과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외로운 혼자만의 동굴에 들어가 앉아 울고 있는 시간이 많았었다. 지쳐 쓰러져 잠이 들고 그러다 깨면 또 다시 슬픔에 잠겨 힘들어했다. 삶을 여기서 마감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그런 내 자신을 볼 때마다 안쓰럽고 기가 막혀 한숨과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세상과 풍경도 일순간에 불어오는 바람앞에 희뿌연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았다. 어지러움에 창문틀을 잡고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두 살 난 강아지(말티즈) 뽕이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나에게 뽕이는 성가신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져서였다. 하지만 뽕이는 불평 하나 없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 애교를 부렸다. 흐르는 두볼에 눈물을 혀로 핥아 주기도 했다. "형아 또 울어! 왜그래 ! 하는 것 같았다. 뽕이는 혼자 테니스 공을 물고 방안을 뛰어 다니거나 인형과 레쓰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웃고 있는 얼굴을 거의 본 적 없는 뽕이는 텔레비전에서 개그콘서트나 걸그룹의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면 달려와 흉내를 내듯 또한 좀 보라는 듯 나에게 웃음을 주려 애썼다. 그러나 뽕이가 그럴 때마다 내 얼굴엔 웃음이 아닌, 눈물부터 번져질때가 많았다. “형아 또 울어? 내 눈에는 샘물이 있나 보다. 아까 많이 나왔는데 또 나오네…….” 커다랗고 반짝이는 촉촉한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는 슬픔이 자리하고 있는것 같았다. 뽕이의 눈동자를 보니 다시 뜨거운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또 뽕이에게 미안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뽕아, 형아는 다리가 매우 아파서 그래. 엔지오라이포마라는 종양이 이쪽 왼발 발안에 전체로 퍼져서 여기 발목을 이렇게, 이렇게 잘라내야 한데.......병원에서는 발목을 자르자고 해서 무서워서 집으로 도망쳐 왔잖아. 그후 이렇게 너무 아파서 걷지도 못하잖아. 형아가 자꾸 울어서 미안해.” 형 어떻게 하니~! " ,"형 학교 체육선생님인데..... 이제 학교도 못가고.... 달리기도 못하고... 여자친구도 못 만나고....평생 휠체어타고 다녀야 된데,하고 싶고 가고 싶은데도 너무나 많은데 ...."형 어떡하냐 !" "너 이제 못 보살펴 주는데 너 이제 나랑 헤여져야돼~! 너 앞으로 혼자두고 불쌍해서 어떻게 하지~! "나 떠나가면 우리 엄마는 슬퍼서 어떻게 하지...... " 뽕이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꼬리를 흔들며 벌떡 일어나 텔레비젼 아래 가구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 왔다.그 어느때와는 다르게 잔뜩 발톱에 힘이 들어간 녀석은 스피드가 달랐다. 무엇을 그렇게 집착하는지 두 발로 그렇게 힘쓴 덕분에 가구에 스크래치가 더욱더 깊어져갔다. 가끔 나를 보며 도와 달라는 듯 했지만 무시했다. 이윽고 서랍을 열고 어떤 물건을 입으로 물고 내게 성급히 달려왔다.종종 뽕이와 나는 격한 운동을 하거나 다칠 때면 "괜찮지 ~"하며 내가 늘 발라주었던 맨소레담이었다.그러면서 나도 발랐던 그 못습이 생각난 것인지 그 작은 발과 입으로 뚜껑을 열려고 뽕이가 용을 쓴다. 그러다 다시 그것을 물어 나의 아픈 다리위에 맨소레담을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형아가 좀 열어봐 난 않된단 말이야" 응! 빨리!빨리! 하는 것 같다. 그제야 내가 왜 지금까지 이처럼 나약하게 지냈는지, 왜 부모님을 찾거나 뽕이를 생각하지 않았는지,몇번이라도 좀 더 유명한 병원들을 찾아 보거나 다른 진료방법들은 없었는지 찾아보지 않았나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아주 깊고 어두운 산속 터널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그제야 빛을 보게 된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진단서 소견에 망연자실해 하셨지만 다리를 포기하기엔 이르다며, 미국으로 일본으로 이 희귀질환에 대하여 방법이 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한달후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국내 피부병리학 1인자의 조우가 성사되었고 인공뼈 이식과 발바닥 환부 뼈를 도려내는 대수술이 결정되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장기적인 수술후 경과를 살펴보고 면역성 강화를 위한 치료를 하면서 직장관계와 교우 및 인간관계등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직장은 원거리적인 문제와 건강상의 사유로 못할 수 밖에 없었고 교우관계나 인간관계는 이 시기를 겪으며 어떤 사람들이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인지 가릴 수 있게 되었다. 병원을 나와 집에서 요양하면서 뽕이와 다시 마주 하였다. “뽕이야 네가 약을 발라준거나 다름없어". 네가 그때 약을 발라주니까 아주 많이 좋아졌는데, 사실 약을 발라주진 않았지만 예전에 약을 찾아오던 그 행위가 나를 치료해준거나 다름없었다. 뽕이야 고마워~! 라고 인사하자 뽕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의 발 밑에서 얼굴로 힘차게 뛰어오르려 든다. 안아 주었더니 이여석도 나를 꼭 안아준다. 그 날 이후,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긴 했지만 예전처럼 삶의 모든 것을 놓아두고 요단강을 건너지는 않았다. 그러한 일이 있은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고 이겨낼 약간의 의지와 주위에 감사할 일들을 둘러볼 마음이 있다면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며, 아직도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당시 어린 아이들의 지능을 가진 두살 난 강아지한테서도 이렇게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동안 강아지에 밥만 주면 된다는 가벼운 의무만을 가지며 생각하고 살아던게 후회되고 미안했다.
내 주변에는 그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하나님부터 소중한 친구 몇몇과, 센터에 오는 우리 아이들, 연구회 사람들,가족...... 이제는 하늘나라에 있을 우리 뽕이,뽕이를 영원히 가슴에 뭍었지만 가끔씩이라도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그들의 가족과 사랑을 찾는다면 이 세상은 더욱 밝고 환해질 것이다. 요즘도 가끔씩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나는 나의 또 다른 전담 주치의들을 찾게된다. 단 한 번도 진료거부를 당한 적이 없고 진료를 받을 때마다 큰 에너지와 더불어 행복한 느낌에 안정되는 묘한 사랑의 특효약을 볼 수 있다. “승민아, 선생님 아파.” "라희야 선생님 오늘 아야야해 선생님 여기 아프지~톡톡해줘" " 지환아 선생님 아야야해 여기 손에 호 해줘~!" 오늘도 미소가 예쁜 전담 주치의들은 생명의 교감으로 열심히 치료해주겠다는 의지로 문을 활짝 열며 반짝이며 촉촉한 두 눈과 두팔로 내게 힘껏 달려와 포옥 안긴다. 따스함과 부드러움에서 사랑으로 교차되는 이 순간 나는 내 삶의 주치의들을 통하여 정성스러운 사랑과 치유를 다시 전하게 된다. 치료프로그램 일지를 작성하며 매일매일 다시 일어서는 희망을 노래한다(참소리언어발달연구소, 2015년 1월).
|
첫댓글 임찬규 입니다. 임창규 아니에요. 수정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글을 통해 선생님을 조금씩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