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항하는 길목에 큰 태풍을 만났는데 다들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기라. 절대 얼굴색이 변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 선원들이 동요하면 끝나는 거거든. 걱정하지 마라 이정도 파도는 내 자신 있다 했지. 마음속으로 기도를 얼매나 했는지 아나? (백경호 초대선장 이인호)

국립해양박물관(www.knmm.or.kr/ 부산광역시 해양로301번길- 영도구 동삼동1156)은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바다를 전망(감만부두, 신선대부두, 오륙도, 해양대학교)할 수 있고 여유 공간이 넉넉해 자녀동반 나들이에 좋다.

대중교통으로 태종대를 오가는 노선버스가 있으며 식사는 구내식당이 있다(주차장이 넓어 차를 가져가면 편리하다).
* 대중교통 이용(예시): 도시철도 자갈치역- 영도대교정류장- 국립해양박물관정류장
186, 66번 버스의 경우 33분 소요(도보 8분)


당시 해외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잖아. 근데 우린 선원수첩 하나면 무사통과였거든. 더 넓은 세계로 나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지. (여재구 선장)
환자가 생길 때마다 항구에 들어갈 순 없거든, 그러면 그 항차는 뻥 인거야, 그러면 선장들끼리 통신을 하지, 다들 반 의사야, 항생제 몇 미리 먹이면 된다까지 다 나와.
솔직히 어린 나이에 돈을 너무 쉽게 벌게 되니 쉽게 생각하는 것도 있었어. 저녁만 되면 술을 마시러 다니고 많이 썼지. (주 영순 선장)


홍양호는 싱가폴 해역에서 조업을 마치고 대만 기륭항에 입항해 있었어. 근데 자고 일어나보니 바로 우리 뒤에 지남호가 들어와 있는 기라. 그 유명한 지남호가. 우리도 몰랐어. 근데 지남호에 타 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 수산대 선배들이라. 선후배가 남의 나라 항구에 앞뒤로 붙어 있으이 얼매나 감격스럽노. (이인호 선장)
햇살에 눈을 뜨니 온몸이 굉장히 아팠어요. “아악”소리를 지르고 일나니까 사람들이 날로(나를) 찾아냈어요. 플리네시아인들이라는 원주민들이었지.
숨진 동료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요.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걸 후손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제2지남호 생존자 문인리)

사모아에 나가 있던 우리나라 배 27척이 모두 수색을 나갔지. 일주일 넘게 조업을 포기하고 자기 기름 떼서 동료들을 찾아 나섰으니 요즘 같으면 가당키나 해? 그때 27척 배가 부채꼴로 쫙 퍼져나가 수색에 나섰어.(아뚜에 조난 시(1966), 조계환 선장)

태평양에서 조업하다 보면 거북이가 많이 잡혀 올라와요. 살아서 배위로 올라온 거북이에겐 막걸리 한 사발하고 쌀을 먹여서 바다로 다시 돌려보내요.
싸우지 마라 고기 도망갈라 선원 간 불화가 생기면 고기가 도망간다고 하죠. (박병용 통신장)
배를 타고 들어오다가 노란 부산항 불빛을 보면 울컥했어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멋을 내고 뭍에 내릴 생각에 가슴도 두근두근 했죠. (이봉철 통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