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을 왕관으로 쓴 공예태후 정안사
한 더위를 이기느라, 고려 17대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의 탄생지 장흥 관산의 정안사를 찾았다.
장흥읍에서 회진으로 가는 23번 장흥대로를 타고 가다 관산교를 막 지나면 작은 쉼터가 나온다. 바로 관산읍 교차로 앞이다.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관산읍으로 주욱 들어가 시가지 사거리를 지나면 정안사 안내판이 나온다.
장흥 천관산은 이름 그대로 하늘의 관을 쓴 산이다. 산이 왕관을 썼으니, 제후의 품격을 지닌 산인 것이다. 이 천관산 아래 정안사는 공예태후의 탄생지이고 사우이다.
고려 정종 때다. 장흥 임씨의 시조 임호(任顥)는 중국 송나라 소흥부출신이다. 당시 중국의 정세가 혼란하자 난을 피하여 배를 타고 정안현(장흥) 앞바다의 작은 섬인 임씨도(돌의도와 소회도)에 상륙했고, 천관산 아래 당동(堂洞)에 정착하여 장흥 임씨의 세계(世系)가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장흥 임씨 시조 임호의 12대손으로 조선 명종 때 사람인 임희중이 시를 남겼다.
천관산의 앞이 되고 내덕도의 뒷 바다에/소라섬 같은 섬 두 개가 중앙에 점처럼 있네/임씨가 이곳부터 자손을 번성하니/그 전설이 오래도록 소상히 전하네
때를 맞춰 하늘은 성(姓)을 주었고/효험도 기이하여 돌로 배를 만들었네/천관산을 향하여 맴돌아 다니다가/외로운 섬 머리에 깃들임이 늦었도다/계승하는 세대는 희미하건만/근원의 줄기는 오래되었네/외로운 옛 자취를 지나가면서/아득히 생각하며 잠깐 머무네
임호의 아들 임의(任懿)는 중서문하평장사를 지냈고, 정안군(定安君)에 봉해졌다.
임의의 아들 임원후는 묘청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1146년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인 문하시중이 되었고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졌다.
이 임원후의 둘째 딸이 바로 고려 17대 왕인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이다. 인종과 공예태후의 소생으로 18대 의종, 19대 명종, 20대 신종이 왕위에 올랐고, 장흥임씨는 고려귀족가문의 발판을 굳혔다.
또 장흥(長興) 고을 이름도 왕비의 출신고장이어서 길이 흥할 길지라며 인종이 붙여준 지명이다.
이 공예태후의 탄생지인 정안사를 찾았다. 여름꽃 백일홍이 한창이니, 고즈넉했지만 천관산의 신묘한 바위들을 사우의 지붕에 올려놓은 정안사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 정안사 들머리에 아지(娥池)라는 못이 있는데 공예태후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공예태후 임씨의 언니가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새 봄날이다. 꽃바구니를 끼고 친구들과 어울려 산나물을 캐러 갔다. 어느덧 천관산 구룡봉에 올라 소변을 보았는데, 갑자기 정안땅(관산읍) 전체가 바다가 되어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다. 이윽고 파도가 휘몰아치며 한 마리의 용이 일곱 빛깔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 용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잠을 깨었다.
언니는 꿈이 하도 신기하여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매사에 의욕적이고 재치가 있었던 동생은 오랫동안 장롱 속 깊숙이 간직했던 진귀한 중국 비단 한 폭을 꺼냈다. 그리고 언니를 졸랐다.
“이 비단은 할아버지 정경공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신 뒤, 내게 선물로 주신 옷감이오. 그동안 차마 옷을 하지 못하고 아껴두었는데, 이 비단을 줄테니 그 꿈을 내게 주오.”
언니는 동생의 부탁에 못 이겨 그만 옷감 한 벌에 그 신기한 꿈을 팔아버리고 말았다.
그 후 동생은 왕비로 간택이 되었고, 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이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녀가 빠져죽은 연못인 아사지(娥死池), 또는 각시소라고도 했다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임희중이 시를 남겼다.
아지라는 연못이 장천동에 있었으니/흥망을 겪어 온지 지금 그 몇 해던고/높은 언덕은 이미 오랜 변천을 겪었건만/푸른 물결은 아직도 예와 같이 아름답네/꿈틀거리는 산세는 숙덕이 모였고/얌전한 자태는 천제의 누이로도다/일곱 색깔 구름이 상서기운 비추더니/궁궐에 들어가는 꿈 또한 부합 했네/용이 승천하여 왕비가 되었고/훌륭한 왕자 낳아 왕위를 계승 했네/면면히 이어온 연못만 예와 같아서/공연히 후손들로 하여 한탄케 하네.
물론 세월이 흐르며 생겨난 전설이겠지만, 시골 벽촌의 처자로 태어나 일국의 왕비가 되었으니, 평범한 인연은 아니다.
따라서 이 공예태후와 연관된 설화가 여럿 있으니, 공예태후의 외조부가 깃발이 왕궁의 치미까지 나부낀 꿈을 꾸고 왕비가 되리라 예견한 것도 그 중 하나다. 공예태후의 아버지인 임원후가 개성부사로 재임할 때, 부하 직원의 황룡이 관청의 지붕을 뚫고 들어온 꿈 얘기도 있다.
인종이 들깨 5되와 황규(해바라기) 3되의 꿈 얘기도 절묘하게 짜여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예태후의 탄생과 왕비 간택의 운명적인 시의성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들어맞는다.
그런 저런 생각으로 수련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아지에서 시를 감상한 뒤, 정안사로 올랐다. 장흥 임씨 발상지 사적비, 공예태후 기전비 앞에서 잠시 묵례하고 소흥문으로 들어서 장천당, 역사관, 경모제를 차례로 살펴보고 숭앙문을 들어서니 비로소 정안사다.
정안사의 문이 굳게 닫혀있다. 공예태후의 영정을 뵙고 싶었으나, 평상시에는 공개하지 않고 비워놓은 듯 했다.
그래서 정안사 추녀 위에 얹혀있는 천관사 바위들을 바라본 뒤 되돌아 나오는데 비로소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음을 느낀다. 찬물 한 모금 마시니, 문득 물 한모금도 살아있음의 행복이고 기쁨이구나 한다.
사람 살기에 평안하면 어느 곳이건 명당 터이리라.
하지만 역사가 주는 무게라는 게 있다. 천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집은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졌고, 살던 주인도 여러 성씨로 바뀌었을 터지만, 산천은 의구하다 했다.
더운 날씨에 사람의 발길이 뜸하고, 장맛비에 자란 풀들이 기세등등했지만 정안사는 한 점 흐트러져 보이지 않았다. 상서로운 기운이 여전하고 길지에서 느끼는 생명력이 가득했다.
현 정안사는 1998년도에 장흥 임씨 종친들의 헌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보기 좋은 후손들의 모습이구나 했다.
돌아 나오며 정안사 들머리에 걸린 현수막을 살펴본다. 문재인 정권에서 첫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임종석을 축하하는 종친회 현수막이다. 후손들이 선조의 명예를 잇는 것도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름으로 조상까지 욕먹게 하는 세태에서, 임 실장의 성공을 기원하고 확신하며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 후기 - 조상을 빛나게 하는 일은 어렵지만, 욕먹게 하는 일은 쉽다.
요즈음 자신은 학이니 뱁새가 노는 곳에 가지 않는다고 하는 자가 있다. 우리가 보기엔 그 자는 학이 아닌 앵그리 버드다. 즉 꼴통새다.
자신만 꼴통새면 또 누가 뭐라 하랴? 자기 조상까지 욕먹게 하니 더운 날이 더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