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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모정, 그리고 미각상통(味覺相通)
오늘 풍우회 선후배님들께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된 건 제 영원한 글쓰기의 주제이자 뿌리인 어머니, 母情에 대한 단상 거리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간 모두들 평안히 잘 지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간 <100분토론>을 맡거나 보도국장, 선거방송국장 등의 바쁜 직무를 보내다보니 이곳 풍우회 카페 들르기를 거의 하지 못한 채 3년여를 지내왔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다른 많은 출향인사나 풍기에 계시는 고향지기 모두가 그렇듯 제게도 맘의 고향이자 안식처랍니다.
주자가 강조한 열 가지 후회 가운데 으뜸이 不孝父母死後悔 라지요? 대학 초년 시절 세상을 떠나신 옛 풍기 향교 전교를 지내셨던 할아버님이 늘 강조하시던 말씀이라 지금도 그 대목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걸 알면서도 몸은 기실 어머니 홀로 계신 희여골 들르기에 늘상 게으른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렇게 소홀하다가 세상에 안 계셔서 뵙고 싶어도, 손잡고 온기 나눠드리고 싶어도 그게 안 되는 상황이 되어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만 그 실천을 늘 미루며 지내온 세월이었습니다.
지난 13일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문득 아침을, 그것도 어머님이 직접 희여골 안방 아랫목에서 띄워서 보내주신 청국장에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니 최근의 혹한과 폭설 속에 이리도 무심히 보낸 제 자신을 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풍기를 다녀와야겠다고 맘을 다잡았습니다. 오전에 할 일 몇 가지를 치른 뒤 풍기를 향해 출발 시동을 걸었습니다.
캐롤 키드의 “When I dream”과 비지스의 “Don’t forget to remember”를 벗삼아 달리는 중앙고속도로는 중학 3학년 때 서울로 전학 온 이후 그렇게도 자주 왕복하던 숱한 기찻길과 거의 평행으로 난 길이지요. 다른 동향 인사들도 그러시겠지만 저는 이 길을 갈 때마다 제천 의림지로, 도담 삼봉으로, 그리고 희방사로 이어지는 몇 안 되는 긴 소풍 여행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꿈을 꾼다면 꿈은 이뤄진다지요? 그 노랫말과 음률을 읊조리며 잠시 한 번 졸지 않고 이내 풍기 톨게이트를 빠져나왔습니다. 잠깐 사과 가게들 죽 늘어서있는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소백산을 보니 온통 하얀 백색 세계였습니다. 그 어느 줄기 아래 어머니가 기다리시는 동네가 닿아있었고 그 마을을 감싼 중산간조차 잿빛이었습니다.
추위에, 눈에 요즘은 자주 풍기 읍내 나들이조차 못하신다는 어머니. 마을 첫 번째 다리를 올라 집으로 향하는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순간 그 어머니는 달려오는 막내 걱정에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눈가에 따뜻한 무언가가 밀려나오려는 걸 겨우 진정하고는 기다리는 모심을 챙겨 묻는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어매, 추운데 뭐 할라꼬 이까지 나왔어?” “춥긴 뭐가 춥다고...근데 배는 안 고프나? 얼러 드가자. 촌에서 뭐 멀 게 있어야재. 된장 해 놨다.” “엄마, 내 점심은 먹었고... 그카지 말고 저 아래 순화네 약선당 알제? 거서 저녁 자시믄 돼.” “야야! 뭐 할라꼬 비싼 돈 드는 음석을 사 묵노? 기양 집에서 먹으면 되는데...” “어매, 이미 내가 약속해 놨으이께 아무 걱정 말고 이따 한 숨 돌리고 내리가믄 돼.”
그간 잦은 폭설로 뒷산은 여전히 은색 린넨천으로 덮였고 축담 돌아 뒤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따뜻한 보일러실에 대파를 키우고 계셨는데 세상에 어찌나 잘 자라던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방바닥에 온기는 남아있었지만 노인이 거처하기엔 좀 써늘한 것 같아 왜 이리 방이 안 따뜻하냐고 물었습니다. 글쎄 어머니는 석유값 아낀다고 아무리 추워도 초저녁에 잠깐 방을 데우고는 전기매트에서 이 겨울을 보내신 거였습니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니, 넉넉하게 용돈을 드리지 못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매 이제부터는 날 따시질 때까지 보이라 팡팡 때소. 그 돈 내가 더 보내드리께. 알았제?”
엄마는 고개만 끄덕이시지만 맘으론 이미 손사래를 치고 계시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서글펐습니다. 안 그러셔도 될 만한 형편임에도 굳이 저러시는 것, 저게 바로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질 무렵까지 이런 저런 사는 얘기 나누다가 한 동네 사시는 종이모까지 셋이 약선당으로 향했습니다. 또 집문짝이나 전기, 보일러 등 집안 곳곳에 손 볼 일이 있을 때만 되면 부르시는 읍내 사시는 백신할배도 함께 모셨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반가운 친구이자 이제는 명사이자 명인 반열에 오른 박순화 사장에게 살짝 귀띔했습니다. 어머니 이가 틀니인 만큼 모진 것은 빼고 부드러운 걸로 준비해달라는 부탁이었지요. 순화는 전에도 두 차례 모셨던 만큼 제 부탁이 필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그날 먹은 음식들 자랑 좀 해야겠습니다. 너무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그래서 그 자체가 문화입니다.
맨 먼저 나온 건 따뜻한 호박죽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식사를 위한 입의 준비운동용 전식이었지만 지극히 달지도, 심하게 짜거나 싱겁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적당히 따뜻한 노란빛 이 음식은 어쩌면 시장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숙제를 던져주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죽으로 배를 채우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거든요.
그리고 나온 본격 전채는 샐러드 두 가지, 물김치, 배추전, 잡채, 육회, 버섯튀김, 인삼튀김, 두부구이, 떡갈비, 연근 등이었습니다. 하나씩 맛의 감상평을 늘어놓겠습니다. 첫째 샐러드는 갖은 싱싱한 야채에 양파 갈아 만든 소스도 얹혔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무슨 붉은 계열의 색상을 띤 소스가 토핑되어 있었거든요. 물어봤더니 오디 소스라고 합디다. 아! 어릴 적 먹을 게 궁할 때 봄에 따먹던 그 오디의 그 달착한 맛이 떠올랐습니다. 입술과 손을 붉게 물들게 했던 오디가 이렇게 색다른 샐러드 창조의 한 주역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왔습니다.
두 번째 샐러드는 새송이버섯과 무슨 부드러운 쇠고기 같은 걸 약간 중국식 소스로 버무린 익힌 요리였습니다. 물어봤더니 그건 쇠고기가 아니라 콩고기였습니다. 뉴스에서만 보던 콩을 갈아서 쇠고기처럼 만든 그 음식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드러운지 어머니도 연신 젓가락을 그 접시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다음 접시는 연근 무침이었습니다. 연뿌리는 아삭아삭 씹히는 그 담백한 맛이 사람의 입맛을 돋우는데 이날 순화가 내 온 건 검은깨가루와 숙지황을 섞어서 무친 연근 전채였습니다. 처음엔 연뿌리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색다른 맛을 자랑하더군요. 대개 연뿌리는 조청에 바른 요리 또는 간장절임 정도로 먹어봤지만 이렇게 검은 코트를 입힌 작품은 처음이라 신기했습니다.
배추전은 어릴 적부터 제사 또는 큰 일 있으면 솥뚜껑을 뒤집어놓고 불을 때가며 아낙네들이 연신 구워내던 그거였지요. 그런데 색이 좀 갈색으로 어두웠습니다. 먹어보니 밀가루 배추전이 아니라 그건 메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만든 배추전이었습니다. 혀에 착착 감기는 그 맛 참으로 오묘했습니다.
인삼튀김과 버섯튀김 두 접시도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인삼튀김은 잘 엄선한 6년근 인삼만을 골라 중간 사이즈 뿌리들을 잘라서 튀긴 건데 입에 넣으니 그냥 녹아 없어질 정도로 맛이 넘쳐났습니다. 인삼값 비쌀 텐데... 인삼튀김은 깻닢튀김과 함께 나왔습니다. 저는 서울의 일식집에서 나오는 깻닢튀김도 안 남길 정도로 좋아하지요. 튀김은 어는 정도 시점에서 꺼내느냐가 핵심인데, 주방의 요리사가 직접 지켜보다가 꺼냈다는 걸 그 아삭아삭 부서지는 절묘한 맛을 통해 알 수 있었지요.
또 하나의 튀김역사는 표고버섯튀김이 완성했습니다. 보기도 동그랗고 탐스러운게 그리 이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에 넣어보니 치아가 약한 사람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웠습니다. 어머니도 칭찬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모두 다 당신 잡숫기에 좋을 정도로 맛과 빛깔도 좋은데다 부드러운 요리 일색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떡갈비도 부드러웠고 두부구이도 양념과 구워진 상태가 최적이어서 칭찬 릴레이를 해야 마땅했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엔 육회로 바로 건너뛰겠습니다. 색깔부터가 예술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사가(사돈쪽 집안) 손님이 오시는 날엔 어머니는 어디서 그걸 구하셨는지 육회를 반드시 준비하셨습니다. 그때 기억으로는 싱싱한 무는 들어있었고 양념은 참기름에다 마늘 다진 것, 그리고 조청 한 두 방울 정도가 들어간 맛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내오신 육회의 그 맛은 제가 이때까지 대처에서 빈번한 요리 탐방의 과정에서조차 도저히 다시 맛보지 못한 극상의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틈나면 어머니께 신선한 생고기로 만든 육회 좀 먹자고 조를 정도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이젠 연로하셔서인지 옛날 그 맛이 나오지는(솔직히ㅠㅠ)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순화가 내 온 육회는 바로 옛날 어머니의 손맛에서나 가능한 정말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육회가 하도 입에 살살 녹아서 어머니 입에 제가 한 젓가락 집어서 넣어드렸더니 어머니도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부드럽게 잘 만들었느냐는 듯 따사로운 눈길을 친구에게 보내셨습니다. 갓 잡아서 신선하게 정육된 영주 한우로 만든 거지 특별할 게 없다는 게 순화의 답이었지만 저는 제 육회 맛의 원형을 떠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맛이 각별했습니다.
이 모든 전채를 모두가 게 눈 감추듯 싹싹 비워냈습니다. 이어 오늘의 마지막 순서인 밥이 나왔습니다. 함께 나온 된장찌개는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옛날 창락의 외가에 방학 때 가면 외할머니가 손수 끓여주시던 바로 그 빛깔, 그 느낌, 그 맛의 된장찌개가 40년 지난 지금 약선당에서 재현되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요. 투박한 커다란 뚝배기엔 그저 짙은 된장과 호박, 배추, 두부가 되는 대로 마구 뒤섞여 끓고 있었는데 냄새부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저녁엔 소식을 하신다는 어머니지만 마지막 나온 잡곡밥을 거의 3분의 2 이상 드실 정도로 된장 맛이 빼어났습니다. 어머니도 연신 젊은 사람이 참 된장찌개 잘 끓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미각상통(味覺相通) 이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태어나 자란 곳이 다르고 인종과 국가, 삶의 환경이 달라도 맛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누구나 말이 필요 없게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연전에 제가 어떤 수필을 쓰면서 직접 지어낸 말입니다. 왜 그런 말을 썼느냐구요? 1996년 영국 유학 시절 아이들 영어를 가르쳐주러 오시는 마리안 이란 이름의 고운 할머니가 계셨는데 세상에 놀랍게도 저희 집에서 끓인 청국장을 김치와 함께 아주 맛있게 드시는 걸 보고 깨달은 게 있어서 썼던 말입니다.
우리도 서양 음식 가운데 치즈든 스파게티든 아니면 독일식 감자 요리나 스페인식 빠에야든 무엇이든 먹다 보면 묘하게 혀의 미뢰를 자극해서 결국엔 “맛있다”는 표현 그 너머의 어떤 즐거움과 통함을 주는 경우 느끼듯 서양 사람들도 가장 한국적인 음식에도 그 뿌리에 관류하는 맛에 대한 이해랄까 통함을 가질 수 있다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한국인의 이 밥상, 여기에 바로 미각상통의 참의미가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어머니는 저녁밥을 참으로 오랜만에 많이 드셨다면서 당신 입에 맞게 모든 요리를 부드럽고 물렁하게 해준 아들의 벗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수정과로 건배를 하면서 말입니다.
이 긴 겨울, 유난히도 춥고 눈 많은 이 긴 터널을 올해로 여든여섯이 된 이순희 여사는 홀로 희여골 촌가에서 보내셔야 합니다.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맘만은 늘 함께하고 싶은 내 어머니, 부디 건강 잃지 마시고 오래오래 그 자리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남긴 것 가운데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이 그 사람 이미지라고 합니다. 어머니, 당신을 떠올리면 막내는 늘 가슴이 미어지듯 한의 정서로 다가오는 그 어떤 이미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편 서글프면서도 한편 살아계셔서 고맙고 사랑스럽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황 헌(黃憲, 1959.8.5 풍기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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