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올해 봄 맞이는 "부여군"으로 가시게요.
어느덧 삼라만상이 기지개를 펴는 "경칩"도 지났네요.
하늘의 기운이 땅에 내려오기 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마음은 이미 봄이 오고 있네요. 봄!!
남녘에 오는 봄은 좀 더 빠르고 따스하겠지요.
기온차가 좀 있으니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옷차림으로 생활하세요.
답사때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총무 김 은희 올림*
1. 답사일 : 2023년 3월 12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30분 출발
3. 답사지
1) 김거익 선생 묘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76)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2호
본관은 의성 김씨로 고려시대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태조로 부터 우의정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된다.
김거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고려말 이성계, 이색과 절친했던 사이로 전해진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고향 부여로 낙향하여 은거했으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김거익의 묘에는 비석과 망주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묘 입구에 재실과 그를 절의를 추모하는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네이버 지식백과] 김거익의 묘 (부여군 - 두산백과 두피디아)
2) 정흥인 선생 묘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30-1)
충청남도 기념물 제182호
조선초기 문신인 정인지 부친 정흥인의 무덤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다. 봉토주변에 8각의 호석이 둘러져 있다.
봉토는 잘 다듬은 80cm의 판석을 8각으로 두른 매우 드문 형태이며 무덤 앞 가장 상단에는 큰 상석과 묘표, 2단에는 옥개석이 소실된 장명등과 문인석 2기가 놓여져 있다.
풍수학에 능했던 정인지는 출세와 부귀를 위해 부친 정흥인의 묘자리를 큰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상의 땅을 선택했으며, 사용된 석재도 백제시대의 것을 재사용하고 있다.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정흥인의 묘 (부여군 - 두산백과 두피디아)
3) 부여 궁남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와 물가·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궁남지 (문화재청)
4) 회양공 조신 선생 묘역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산168-1)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본관은 풍양(豐壤)이며 본명은 사렴(思廉)이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조맹(趙孟)의 후손이며, 고려 공민왕 때 회양부사를 지내 '회양공(淮陽公)'으로도 불린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에게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의 품계와 사복시정(司僕寺正)의 지위를 추증받았다.
충숙왕 때 밀직사 우부대언(密直司 右副代言)과 좌상시(左常侍)를 지낸 조염휘(趙炎暉)의 4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으며 모친은 식목녹사(式目錄事)를 지낸 손원계(孫元桂)의 딸 밀양 손씨(密陽 孫氏)이다. 고성 이씨(固城 李氏)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조선 건국 이후에 공조좌랑(工曹佐郞) 등을 역임한 조안평(趙安平)이며, 작은아들은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지낸 조개평(趙開平)이다. (고성이씨 할머니 묘소 : 춘천시 석사동 소재)
공민왕 때 정4품 봉상대부(奉常大夫)가 되어 강원도 북부 회양부(淮陽府)의 부사(府使) 등을 역임했다. 큰형인 조사충(趙思忠)은 종4품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왕을 시종하는 천우위(千牛衛)의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작은형인 조사공(趙思恭)은 상서(尙書), 아우인 조임(趙袵)은 보문각(寶文閣)의 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에 형인 조사공이 김정·김흥조·유사의(兪思義) 등과 함께 신돈을 살해하려는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자 형제가 모두 곳곳으로 흩어져 피신했다. 조신은 이때 사렴(思廉)이라는 이름을 신(愼)으로 바꾸고 둘째아들인 조개평만을 데리고 부여의 임천(林川)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고성 이씨는 맏아들인 조안평을 데리고 친정인 춘주(春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로 피신했다.
조신은 임천에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했으며, 이색·정몽주 등과도 교유했다. 훗날 조선의 3대 임금이 되는 태종 이방원에게도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스승이었던 조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보내 묘자리를 잡게 하고, 특명(特命)으로 수묘군(守墓軍)을 보내 조신의 묘를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정3품 통훈대부의 품계를 추증하고, 그의 후손을 관직에 등용했다.
조신은 조선 후기 세도 가문 가운데 하나인 풍양조씨 회양공파(淮陽公派)의 분파조(分派祖)로 숙종 때에 좌의정을 지낸 조상우, 영조 때에 2대에 걸쳐 우의정과 좌의정 등을 지낸 조문명·조재호 부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조현명과 헌종 때 외척으로서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를 이끈 조만영·조인영 형제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처럼 후손들이 영화를 누렸기 때문에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덕림고개에 있는 그의 묘는 ‘조선의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신 [趙愼]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김 종대 (010 - 4234 - 7074)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