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우등생으로 만든 엄마
활발한 조연 연기로 브라운관을 누비던 엄마 권재희(46)씨는 지난 6년간 TV를 떠나 연기자 대신 엄마 역할에 열중했다. 아들 태우의 교육문제 때문이었다. 권씨는 "직장과 가정을 동시에 챙겨야 하는 워킹맘에게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며 "주위 엄마들을 볼 때마다 우리 아이가 뒤쳐진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그녀는 억척스러운 워킹맘이었다. 아이와 시간을 많이 못 보내주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같이 있는 동안 만큼은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봤다.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가 가장 공을 들인 육아법이었다. 권씨는 "방송 일이 끝나면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 아이에게 달려가 책을 읽어줬다"며 "목이 아플 때는 쓰린 목에 소금을 찍어 먹었고, 아이가 잠든 후에야 대본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어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이가 영어와 친숙해지도록 침대 위 모빌에는 영어 단어장을 매달았고, 머리맡에는 카세트를 놓고 늘 영어테이프를 재생시켰다. 권씨는 "발음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유아기 때 원어민 발음을 많이 들려주려 노력했고 아동기 시절엔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독해 실력을 쌓도록 지지해줬다"며 "주말이면 아이와 손잡고 근처 서점에 가서 원서를 쌓아놓고 함께 읽곤 했다"고 말했다.
남편 이하원씨는 그런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여러 차례 만류했다고 한다. 교육문제를 놓고 싸우기도 많이 했다. 이씨는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TV에 나오는 동물 이름을 영어로 맞히는 것은 물론 영어단어를 술술 말하는 것을 보고 아내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며 "그 이후 아이 교육문제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겼다"고 했다.
부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틈은 있었다. 워킹맘으로 영어공부를 시키는 것도 버거워 다른 주요 과목은 손 쓸 겨를이 없었던 것. 더구나 태우는 스스로 공부하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놀기 좋아하고 틈만 나면 축구장으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50점을 받은 수학, 과학 성적표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뒤쳐진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여기저기 학원을 알아봤지만 초등학교 4학년 수준에도 못 미쳤던 아들에게 수학의 기본부터 차근히 가르쳐주는 학원은 아무데도 없었다. 간신히 들어간 학원에서조차 아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공부하기 싫다며 학원은 가지 않고 벤치에 앉아 시간만 때우다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하는 수없이 권씨는 일을 그만두고 아이교육에 매달렸다. 직접 문제집을 잡고 기본부터 가르쳤다. 과제를 내주고 개념을 이해하는지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문제는 태우였다. 아들은 원리를 완벽하게 깨닫지 못하면 도무지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남들보다 학습속도가 월등히 느리다보니 엄마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갔다. 권씨는 "남들은 중학교 교과과정까지 선행학습을 하는 판에 초등학교 과정을 복습하는 것이 한심하긴 했지만 엄마 욕심 때문에 아이를 채근할 수는 없었다"며 "하루 이틀이 더 걸려도 본인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고 말했다.
아들의 민사고 합격기태우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민사고에 다니던 친척 형과의 만남은 공부의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됐다. 그는 "영재로 인정 받은 형의 모습을 보면서 민사고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목표가 생기니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승부욕이 유난히 강한 그는 그날부터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렸다. 우선 민사고 입시전형 때 자격요건으로 활용되는 영재교육원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다. 입시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두 달.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잠을 줄여가며 문제집을 파고들었다. 다행히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손짓했다. 경원대 영재교육원에 당당히 합격했다.
영재교육원 수업은 공부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원리를 깊게 파고든다는 점이 끌렸다. 태우는 "원리를 설명해주거나 차근히 증명하기 보다는 바로 적용해 문제 풀기에 바쁜 학교와 학원 수업에 적응하지 못했는데 영재교육원은 달랐다"며 "몇 시간이든 물고 늘어져 나만의 방식으로 원리를 터득해가는 과정속에서 수학·과학의 묘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공부에 재미가 붙자 성적은 날로 좋아졌다. 중학교에 입학해 첫 시험에서 받은 전교 40등이라는 성적은 전교 10등 이내로 수직 상승했고, 늘 3% 이내를 유지했다. 중2 때는 영재교육원 대표로 뽑혀 국비지원으로 한 달간 러시아에 과학캠프를 다녀왔다. 여유 시간이 많은 방학 때는 영어공부에 투자했다. 일찍부터 영어공부를 꾸준히 해온 덕에 첫 토플시험에서 114점, 텝스는 937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태우는 중3때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졸기 일쑤였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한 셈이다. 반 친구들보다 이해가 늦어 진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느낀 그는 혼자서 공부하는 방식을 택했다. 문제 푸는 속도도 친구들보다 월등히 느렸다. 대신 문제를 많이 풀기보다는 한 문제라도 정확히 답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공부했다. 이는 민사고 학업적성평가 수학 서술형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계기가 됐다. 태우는 "수업 시간에 조는 날이 많아 공부 안하고 논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는 뒤에서의 노력을 몰랐기 때문"이라며 "스스로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에게 맞는 공부 스타일을 정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말했다.
태우의 장래 희망 또한 남다르다. 축구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가 되는 게 꿈이다. 그는 "민사고 면접전형 때 '장래 희망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천문학 박사, 금융전문가라고 대답하는 다른 지원자와 달라 면접관이 당황해 했었다"며 "남과 다른 나만의 꿈을 솔직하게 말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엄마 권씨는 다른 부모들에게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선행학습이 안 됐다' '열심히 하지 않는다''여느 모범생과는 다르다'는 주변의 냉대 속에서도 한 순간도 아들에 대한 믿음을 잃은 적이 없다"며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 자녀를 평가하기 보다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상태 그대로를 믿고 사랑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