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그리고 양잿물에 대한 우울한 기억/ 이영성
요즘 유명 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 때문에 우리사회가 꽤나 시끄럽다. 또한 젊은이들 사이에 이들의 자살을 흉내 낸 모방자살이 이어지고 있다니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태가 매우 안타깝다. 자살이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위는 그 동기를 아무리 미화한다고 해도 정당화될 수 없다. 죽음의 동기가 무엇이든 사람의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과 관련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머릿속에 문득 ‘양잿물’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첫 경험에 대한 기억은 오래 가는 법이다. 아마도 어릴 때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 사람의 주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잿물이란 ‘서양에서 들어온 잿물’의 뜻으로 화학적으로 수산화나트륨(NaOH)을 가리킨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양잿물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우리나라에 서구의 양풍문화가 물 밀 듯 유입되면서 양동이, 양재기, 양회, 양말, 양탄자, 양복, 양약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화기 서양문물의 하나이다. 양잿물은 본래 백색의 결정고체이나 동물성 단백질을 잘 녹이는 강한 세정작용이 있으므로 예전에는 빨래할 때 물에 녹여 세제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양잿물은 강한 부식성이 있어 극약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비누가 없었던 시절, 우리나라 아낙네들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빨래였다. 특히 겨울철에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빨래하는 일은 큰 고역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아낙네들은 빨래를 손쉽게 하기 위해 볏짚을 태워 체에 거른 잿물을 이용했다. 왜냐하면 볏짚을 태워 만든 잿물에는 세정작용이 강한 수산화나트륨 성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빨랫감을 잿물에 푹 담가놓았다가 해가 중천에 걸릴 때쯤 되면 빨래터에 가지고 가 방망이로 마구 두드려 때를 뺐던 것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뒤꼍에는 잿물을 받기 위한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특히 아낙네들은 봄이 되면 겨우내 묵은 때가 낀 옷가지나 이불을 빨기 위해 온종일 볏짚을 태워 잿물을 만들곤 했다.
그런데 개화기 때 양풍문화에 묻어 양잿물이 들어오면서 여인네들은 구태여 잿물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양잿물은 볏짚을 태워 잿물을 만드는 불편을 일시에 해소시켰다. 물 한 동이에 손가락만한 양잿물 덩어리를 넣어 녹이면 훌륭한 세제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저잣거리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상품이 양잿물이었으니 잿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귀찮고 어려웠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 가까이에 경춘옥이라는 꽤나 큰 술집이 있었다. 그 술집은 주로 군 장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일명 색시집이었다. 그리고 그 술집에는 20대의 처녀 대여섯 명이 기거하며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집의 뒷문은 우리 집 뒷마당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당시 강원도 산촌에서는 제법 잘 살았던 우리 집은 뒷마당이 꽤나 넓었다. 우리가 이사 가기 전부터 집 뒷마당에는 살구나무와 자두나무가 서너 그루 있었으며 마당 한구석에는 포도덩굴이 성글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포도나무 덩굴 아래에는 나무로 짠 커다란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술집이 그렇듯 경춘옥은 해가 떨어져야 비로소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어느 땐 밤이 이슥하도록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로 골목이 왁자지껄했다. 경춘옥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낮 시간에는 별반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 뒷마당에 있는 평상에 앉아 조잘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아가씨들은 어린 나와 여동생을 끔찍이 귀여워하여 늘 땅콩이나 오징어 등의 술안주를 한 움큼씩 가져와 주머니 속에 넣어주곤 했다.
그런데 오뉴월쯤 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뒷마당이 갑자기 시끄러웠다. 술집 아가씨들 가운데 ‘예쁜이’라 불리던 나이 어린 아가씨가 평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아가씨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허둥거리는 발자국 소리로 몹시 소란스러웠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자두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쁜이 누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은 흰자위가 드러난 채 평상 위에서 버르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 온 어머니가 나를 번쩍 안아 방안에 데려다 놓을 때까지 나는 소란했던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나는 너무나 무서워 이불에 얼굴을 묻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밖에서는 바삐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아가씨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참 뒤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뚝 끊기고 동네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몹시도 궁금하여 창문을 빠끔히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서 있었고 예쁜이 누나 몸 위에는 가마니를 찢어 만든 거적때기가 덮여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예쁜이 누나가 어느 멋진 젊은 장교를 사랑했더란다. 일테면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셈이었다. 술집 아가씨라고 해서 사랑을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만 그 당시 연애란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비련으로 끝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장교가 전역을 며칠 앞두고 마지막으로 술집을 찾아왔더란다. 예쁜이 누나가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그 장교는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났다고 한다. 술집 아가씨와 젊은 장교의 풋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런 뒤 예쁜이 누나는 술자리에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울며 지냈단다. 결국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채 마음을 모질게 먹고는 아마도 그날 아침에 양잿물을 마셨던 모양이었다. 그 독한 양잿물을 한 그릇이나 마셨으니 속인들 얼마나 아팠겠는가. 동네 사람들이 양잿물을 중화시키기 위해 오리를 잡아 그 피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으나 이미 너무 늦어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예쁜이 누나의 시신은 어디론가 실려 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술집 아가씨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또 다시 우리 집 뒷마당에 놀러와 조잘거렸다. 그러나 다시는 우리 집 뒷마당에서 예쁜이 누나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릴 땐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 위해 흔히 양잿물을 마셨다. 그리고 얼굴에 있는 흉한 점을 빼기 위해서, 또는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서 양잿물을 찍어 바르기도 했으며, 여자들이 부정한 행위로 임신했을 때 남 몰래 낙태를 하기 위해 양잿물을 희석시켜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비록 죽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양잿물의 독성으로 인하여 많은 후유증에 시달렸음은 불문가지이다. 이제는 손빨래를 할 필요도 없이 세탁기에 넣어 버튼 몇 번 누르면 탈수까지 되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양잿물을 일반 잡화상에서 쉽게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화공약품상에서나 구할 수 있으니 세상이 변해도 참으로 많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