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 속에 화명수목원까지




엄흥도는 어린 단종이 세조에 의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에 그 지역의 호장을 지내던 자로,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자리에 몰래 장사지낸 후 세조의 보복이 두려워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이 후 숙종은 그 충의를 거룩히 여겨 공조참의를 증직하였고, 영조는 그를 위한 정려문을 내렸으며 훗날 공조판서에 다시 증직하였다.
정조 23년(1799) 울산의 후손들이 원강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순조 17년(1817) 원강사원으로 승격시켰으며, 비각안에 있는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순조 20년(1820) 세운 것으로, 비문은 홍문관제학을 지내던 조진관이 글을 지었으며, 동부승지 이익회가 글씨를 썼다.
대원군의 서원 철례로 폐원된 것을 1994년 새로 고쳐지었는데, 이때 비도 옮겨와 세웠다.

봄가뭄으로 보내기를 다못한 논

근래 자주 보이는 불루베리 농장

▢ 경숙옹주 태실 및 비(敬淑翁主 胎室 및 碑)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에 있는 조선시대 경숙옹주 태실 및 비로 2004년 12월 16일 울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시는 작은 돌방으로 예로부터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자손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 앞에 세운 비석이다.
태실과 태비는 울산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태비 앞면에 ‘王女合歡阿只氏胎室(왕녀합환아기씨태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성화이십일년팔월초육일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으로 보아 1485년(성종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태실의 주인공이 경숙옹주(敬淑翁主)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태실 유물인 태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빌림



울산 박물관 근처 만리장성이라는 요리점에서 먹은 야키울면, 좀 맵다









새천년 웅비탑 - 46년전 119 전경대 1소대 3분대 근무하던 곳이라 늘 그립던 곳

박재상 부인의 망부석 이야기를 형상화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