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요 16:13 a)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가 들은 것만을 말씀하시며”
성령님께서 오시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많이 부족했음을 암시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도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는 타락한 인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 믿음의 수준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고 내 영광을 나타내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 하지만 예수님을 높이는 그 틈새에서 나도 조금만이라도 높아 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려합니다. 이런 일을 성령님이 오셔서 친히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13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을 것이고 (14절)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오셔서 내 진리라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하시고 온유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겸손과 온유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기 힘든 것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보다는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 순간이 많이 있습니다. 신자에게 시험에는 지고 살 수는 없다는 부류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설교나 상담이나 가르침이나 일상생활이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사명이며 비전이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며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자세로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충만의 결과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끼리 편안하려고 관계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준까지 가야 됩니다.
신앙공동체는 특정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본성으로 가득 찬 죄인이지만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절제하는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세상 같으면 훈련받을 필요도 없는 이기심을 훈련하고 고쳐 나가는 모임이 신앙공동체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양보하고 내가 죽어 사람을 살려내며 그를 진리 가운데로 오게 하는 영적전쟁입니다. 그 일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야 했고, 지금도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십니다.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당시의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들도 잘 알지 못한 부분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과 반대되는 모든 일은 비록 그것이 선해보여도 비진리이며 이단과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 이것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이 영광과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나를 증명하려 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가로막고 서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준과 주제를 알고 제대로 헌신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님을 사모하고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인도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도자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성령님께 순종하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