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셈틀(컴퓨터)로 글을 쓰고 누리그물(인터넷)을 이용해 글을 주고받는 세상이 되면서 한글은 더욱 빛났다. 세종이 500년 뒤 셈틀로 글을 쓰는 시대가 올 줄 알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한글은 셈틀과 아주 잘 어울리는 글자였다. 한자는 셈틀에서 바로 글을 쓸 수 없는데 한글은 아주 쉽게 바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셈틀로 글을 쓰고 ‘누리그물(인터넷)’을 이용해 전자우편(이메일)으로 글과 편지를 쉽게 주고받았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어주고, 한글기계화 개척자 공병우 박사가 한글 장점과 특징을 살린 세벌식 조합형 문서편집기를 개발해 누구나 쉽게 기계로 한글을 쓸 수 있게 해주어 우리나라를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이끌었고 세계에서 미국의 문서편집기를 안 쓰고 제 나라 문서편집기로 글을 쓰는 하나뿐인 나라가 되었다.
나를 누리꾼으로 만들어준 한글과 공병우박사
공병우 박사는 정부가 타자기 표준 자판을 네벌식으로 정해서 한글창제 원리에 맞고 쓰기 편리한 세벌식 타자기를 쓰지 못하게 하니 1970년대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다가 정부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80년에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 가 있던 김대중 선생이 하는 민주화운동도 도와주면서 셈틀로 글을 쓰는 것을 연구하고 세벌식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해 가지고 1988년에 귀국해 종로구 비원 앞에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이찬진, 정래권 들 젊은이들에게 사무실을 주고 세벌식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회장으로서 대학생들을 이끌고 한글운동을 하는 내게도 사무실을 주었다. 공 박사는 한글기계화 선구자로서 세벌식 아래아한글 문서편집기를 개발한 한컴을 태어나게 한 어머니요 한글 지킴이었다.
그리고 공병우 박사는 나에게도 셈틀 사용을 배워 한글기계화운동을 함께 하자고 하셨다. 그러나 그때 일본식 한자혼용을 하자는 자들이 한글을 못살게 굴기 시작했기에 나는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그걸 막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었으며, 40대인 나는 기계에 겁이 나고 자신이 없어서 20대인 국어운동학생회 후배들에게 셈틀 사용을 배우고 공 박사를 돕자고 했다. 마침 그때 김한빛나리 군이 대학을 졸업하고 공병우 박사님을 모셨고, 부산에서 중학교 국어선생을 하던 국어운동 후배인 박흥호 군이 직장을 그만두고 공병우 박사님을 모시고 한글기계화를 배우겠다고 올라오게 되어 내가 공병우 박사를 돕지 못하는 부담을 덜게 되었다. 그때 박흥호 군이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공병우 박사를 모시겠다고 보낸 편지를 내게 보여주면서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한글문화원 형편이 어려워 그에게 월급을 줄 수 없어서 망설이고 내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1970년대에 송현 선생도 그렇게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박사님을 도우면서 그도 잘 되었고, 박사님도 도움이 된 일이 있으니 받아주시지요.”라고 말해서 그는 서울로 와서 셈틀 전문가가 되어 한글과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 개발에도 참여 했고 ‘㈜나모’라는 회사를 차리고 누구나 한글로 쉽게 누리집을 만들 수 있게 해서 정보통신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돈도 많이 벌었었다. 공 박사는 한글을 살리고 빛내면 이 나라가 빛나며, 한글이 살고 빛나려면 세벌식 문서편집기로 말글살이를 해야 된다고 믿고 젊은이들에게 그걸 가르치고 그런 나라를 만들려고 온갖 애를 쓰셨다. 앞날을 내다보는 분이고 나라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실천한 분이다. ㈜한글과컴퓨터(한컴) 회사 어머니 공병우 박사. 여기서 공병우 박사가 얼마나 한컴을 살리려고 애썼는지 밝힌다. 1993년 어느 날 공박사가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퇴원해서 나를 급하게 보자며 박사님의 자가용 운전사를 보내셨다. 그래서 가 뵈었더니 “이 선생, 잘 아는 변호사가 없소? 세벌식 아래아한글 문서편집기를 개발하는 한글과컴퓨터 회사를 도와 한글을 빛내게 해야 이 나라가 빛나는데 내게 돈이 없으니 아들에게 넘긴 재산을 되찾아 팔아서 그 돈으로 돕고 싶소.”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날 군부세력이 만든 학원 재단 이사로 들어갔다가 공 박사 이름으로 된 재산(오늘날 돈 수백억 원)을 모두 빼앗길 때 맹인을 돕는 복지재단 이름으로 되어서 남은 강동구 성내동 땅(오늘날 공안과)을 아들에게 주었는데 되찾아 한컴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글운동을 하는 나도 도와주어야 하는데 돈이 없고 남아있는 것이라곤 사진첩 100여 권이 있으니 그거라도 갔다가 팔아서 쓰라고 하셨다. 병원에 몇 달 동안 입원했을 때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란 것을 느끼고 한글을 살리고 지키려면 세벌식 문서편집기를 만드는 한컴과 한글운동이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시기 전에 젊은이들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라고 보아 나는 ’알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변호사 소개는 안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나와 김슬옹 들 젊은이들을 보자고 해서 삼청동 댁으로 가 뵈었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타자기로 글 쓰는 훈련을 할 값 산 타자기를 만들어 보급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또한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실천하지 못했다. 또 공 박사는 내가 셈틀로 글을 쓸 때에 독수리타법으로 뚜벅뚜벅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모든 일을 마치고 밤 11시까지 박사님 댁으로 오라고 하셔서 1시간 동안 타자훈련을 시켰다. 그때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도 눈을 감고 이렇게 글을 쓴다.”며 자판을 두드리는 시범을 보여주며 한 달 동안 나를 훈련시켜서 나도 그렇게 자판을 보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을 확인하고 “이제 되었다. 날마다 셈틀로 글을 써서 피시통신으로 한글운동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공 박사님 아이디로 “내가 배운 주법”이라는 글을 하이텔 피시통신에 올렸는데 조회 수가 1천을 넘은 것을 보고 공 박사는 기뻐하시며 칭찬하셨다. 칭찬하면 소도 웃는다고 1995년 공 박사가 돌아가신 뒤에는 날마다 내 또이름(아이디)으로 한글운동 글을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그 당시 하이텔을 시작으로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피시통신에 ’한글사랑‘ 모임이 있었는데 공 박사는 날마다 거기에 한글사랑 글을 썼다. 나도 공박사가 돌아가신 뒤로는 이어서 날마다 한글사랑 글을 쓰고 ’한글사랑‘ 모임 뜻벗들과 영어로 된 누리통신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일도 했다. 그때 ’네티즌‘이란 새말이 거슬려서 ’누리꾼‘이라고 바꾸자고 내가 제안해 많은 이들이 쓰기도 했고, 하이텔에 영어로 쓰던 아이디(또이름)를 한글로 쓰게 해달라고 건의했더니 들어주어서 나는 ’나라임자‘로 오랫동안 썼다. 그때 누리통신에서 만난 중학생 김용묵, 초등학생 최재길은 커서 공 박사와 나처럼 한글운동을 하겠다고 하더니 김용묵군은 과기대를 나와 정보통신 전문가가 되어 ’날개셋‘이라는 세계 으뜸 한글입력기도 개발했다.
그리고 하이텔 피시통신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대자보(발행인 이창은)라는 인터넷신문을 1998년에 창간했는데 처음부터 나도 참여해 한글사랑 글을 쓰고 있어 고맙다. 이 대자보는 우리나라 최초 인터넷신문이고 2002년에는 이창은 대표가 주도해서 ’총선정보통신연대“를 꾸리고 박원순, 성유보 들과 함께 한글회관에서 출범식을 한 일이 있다. 그리고 한글사랑 누리꾼들과 국회의원 한자이름패를 한글로 바꾸자는 운동도 하고 한자혼용 잘못을 알리는 운동을 했다. 또 김영삼 정권이 나라 망쳐서 기업들이 모두 쓰러지던 1998년에 한컴이 미국 엠에스에 넘어가게 되어 한글단체는 누리꾼들과 벤처기업업회가 중심인 ”아래아한글지키기운동본부‘에도 앞장서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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