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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천리를 따르라
이경여·이경증·오전 등이 하늘을 공경할 것 등 8조목을 아뢰다 (1631년 인조9년 10월3일)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교리 이경증(李景曾), 부교리 오전(吳竱), 수찬 강대수(姜大遂)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근래 대각(臺閣)의 신하가 상의 결점과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가지고 전후에 걸쳐 진달해 아뢴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채택하여 받아들인 효과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한 상황에서 거의 미안스런 전교만 내리시어 멀리서부터 오는 사람까지도 막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신들처럼 눈먼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임금의 귀를 움직이고 뜻을 되돌리기에 부족하겠습니다만 신들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어 임금을 보필하고 인도하는 것이 임무인 이상 어찌 한갓 개인적으로 모여 걱정만 하면서 할 말을 다하고 의논을 지극히 하여 광구(匡救)하는 책임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잘것 없는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에 조목별로 진달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두려워 할 것은 하늘뿐입니다. 하늘은 이치이니, 한 생각이 싹틀 때 이치에 합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의 일을 행할 때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옛적의 제왕이 매우 조심하며 상제(上帝)를 대한 듯 행동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천명(天命)이 계속 아름답게 내려지지만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스르면 그 천명이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마음은 인자하여 차마 갑자기 끊어버리지 못하니, 반드시 재이(災異)를 내려 견책한 뒤 흐리멍덩하게 깨닫지 못하여 끝내 고치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신들이 멀리 옛날의 일을 인용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혼조(昏朝) 때에도 천재와 괴이한 일이 번갈아가며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만 밝은 천명을 높고 멀리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권계하는 말을 보통 이야기로 생각하여 미혹된 채 반성할 줄을 몰라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니, 당시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가령 그 때 두려워하여 덕을 닦았더라면, 하늘은 친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 꼭 광해를 가볍게 버리고 우리 전하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임금으로 세웠겠습니까. 하늘이 멸망시키거나 사랑하여 돕는 것은 공경과 불경(不敬), 정성과 불성(不誠)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천명은 일정함이 없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가 즉위한 이후로 천문 지리 곤충 초목의 재이를 실로 낱낱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수 년 이래로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치고 진전(眞殿)에 불이 났는가 하면 반 년 동안 가뭄이 들고 8월에 큰물이 졌으며 벼가 쓰러지고 나무가 뽑히는 큰 바람이 불었으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기수(氣數)와 관계된 현상으로 여겨 스스로 합리화시키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크게 삼가고 두려워함이 없으며 크게 절약함이 없으며 크게 시행하고 조치함이 없습니까. 상선(常膳)을 감하고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옥에 가둔 약간의 죄인을 석방한 것으로 원통함과 억울함이 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말을 구하여 무슨 훌륭한 계책을 얻었으며 진언(進言)한 것 중에 어떤 말이 시행되었습니까. 구하기를 정성스럽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는 자들이 말을 다하여 하지 않고, 듣기를 정성스럽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곡히 말한 것이 채택되지 못한 것입니다. 전하가 그런대로 천심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천지 신명에게 제사를 올린 일에 불과합니다.
아, 재이는 옛날보다 심하게 발생하는데, 덕을 닦고 몸을 살피는 실상이 전일보다 크게 다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경계해 드리는 말은 대부분 곧장 물리쳐버렸고 게다가 성상이 거만스럽게 스스로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임금의 도가 날로 지나쳐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사사로운 정에 따르므로 상하가 막혔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그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게 없습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나 한 달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고 우레와 우박의 변고가 또 8월에 발생하는 등 변괴가 갈수록 더 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수와 가뭄으로 이랑에 남은 화곡(禾穀)이 얼마 없으니, 백성들이 일년 내내 애써가며 목숨을 부지하려고 수확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 모두 손상되었습니다. 가련한 우리 백성들이 무엇을 가지고 세월을 연명하겠습니까. 안락한 태평 시대에도 이렇듯 거듭 변괴가 발생하면 국가가 보존되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더구나 오늘의 국세(國勢)와 오늘의 어려움과 오늘의 민심을 가지고 전하께서는 수 년간이라도 무사히 보존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십니까.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재앙이나 복은 자신이 초래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잘못을 깊이 징계하고 스스로 장래의 복을 구하여 상림(桑林)의 육책(六責)056) 으로 몸을 살펴 반성하고 운한(雲漢)의 8장(八章)057) 으로 몸을 기울여 덕을 닦으소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으로부터 궁정의 사람없는 곳과 동작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삼가 공순하고 공경히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천명을 스스로 헤아려 천리(天理)로써 보존하고 자연의 법칙으로써 움직여, 공경하고 조심스럽게 하기를 마치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힘써 성의를 쌓아 기필코 즐겁게 되시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소서. 그리고 애통스런 전교를 시원스럽게 발표하여 과거의 허물을 사과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며 덕있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여 적소에 앉혀 쓰되 전일처럼 형식적으로 끝나지 않게 하여 재이를 소멸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또 한 가지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우는 목적은 진실로 이 백성을 돕기 위함이지 한 사람의 편안함만을 도모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면 임금이고 학대하면 원수이니, 민심의 향배에 따라 나라가 보존되거나 망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명철한 임금과 훌륭한 제왕이 백성들의 뜻이 험악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썩은 새끼줄로 6마(馬)를 모는 것처럼 조심하며 경계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던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지난번에 이르러 극도의 도탄에 빠졌습니다. 백성은 일정하게 사모하는 일이 없어서 인덕(仁德)이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니, 심산 궁곡에서도 기뻐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마치 호랑이의 입을 벗어나 자애로운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런 때에 백성을 보호하여 왕이 되는 것은 마치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위로 상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시정(施政)을 잘못하여 작은 비용을 아끼다가 큰 신의를 잊는가 하면 작은 사무를 먼저하고 원대한 계획은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씻어준다는 은혜가 도리어 신의를 잃는 결과가 되고 변통(變通)한다는 정사가 끝내 분란의 단서만 조성하게끔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훈신(勳臣)이 간혹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토지를 넓히려는 욕심을 다투어 채우고 있습니다. 지난 시절 농민들이 권간(權奸)에게 탈취당한 것들을 문서가 있는지도 묻지 않고 옳고 그름이 어떤지를 따지지도 않은 채 돈에 눈이 먼 사람들처럼 서로들 점유하여 한량없이 욕심을 채운 뒤에야 그만둡니다. 예로부터 봉지(封地)를 정하여 상을 시행할 때는 각각 제한을 두어 공의 경중에 따라 천 호(戶)나 만 호를 주었으니, 오늘날처럼 문란해져 질서도 없고 제한도 두지 않음으로써 듣고 보는 대로 스스로 취하도록 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10년간 탈취당하여 원망을 품은 채 때를 기다리던 자들의 시름과 원망이 정반대로 바뀌어 얼굴펴며 기뻐하던 것이 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걱정거리로 변하였고 보면 지금도 그대로 전철을 밟는 꼴이 되어 주인만 바뀌었을 뿐 탈취당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백성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처음에 잘못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게 된 까닭인 것입니다.
내수사에 투속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도 필시 들어 아셨을 것입니다. 중흥(中興)한 뒤에 발본 색원은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폐단이 조금 단속되었는데, 요즈음에는 전일의 습관이 차츰 자라나 혐의 때문에 고발하기도 하고 그 주인에게 죄를 얻어 죽게 되자 도망하여 의탁하기도 하며 고역을 피해 편한 곳에 가려고 연줄을 대어 소속되기를 도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수령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여 감히 밝게 변별하지 못한 채 본사로 귀속시키니, 먼 시골의 곤궁한 백성으로서 억울함을 제대로 해소한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내사(內司)에 관계되는 일은 전하께서 마음을 비워 처리하지 못하시고 법대로 한 담당 낭청을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한 편에 치우친 바가 있어서 폐단이 이 때문에 점차 일어나는데, 유사의 법 집행이 그 사이에 시행되지 못하고 액정(掖庭)의 세력 또한 당초와 다르니, 하민들만 탄식할 뿐 아니라 실로 식자들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각 아문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지난번 본관(本館)의 논차(論箚)에서 이미 다 말씀드렸기에 신들이 감히 다시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오늘날 백성의 피해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지방 사람도 물론 감당하지 못하나 서울의 백성들은 더욱 심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 이웃과 종족까지 불법으로 탈취를 당하여 파산하고 떠돌아 다니며 길거리에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모습을 전하께서는 필시 듣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전하는 백성의 부모이니, 그들의 가렵고 아픈 것을 마치 내 몸에 있는 것처럼 보아야 하는데, 어찌 백성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십니까. 어찌 꼭 이(利)만 말하면서 강한 의지를 분발하여 이 좋지 않은 풍습과 고질적인 폐단을 말끔히 씻어버리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겠다는 말058) 을 신 등은 성인의 훈계로서 너무 지나치다고 마음 속에 의심하였는데, 지금의 일로 보면 자못 더 심한 바가 있습니다.
궁가(宮家)에서 빚을 징수하는 폐단은 각 아문보다도 심합니다. 오랫동안 받지 못한 빚은 문서를 가져다가 바치기도 하고 아무 근거도 없이 몰래 청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무뢰한 종들을 풀어서 부유한 사람을 골라 누구에게 빚이 있는데 바로 채무자와 같은 친족이라고 하면서 결박을 지워 거꾸로 매달아 사제(私第)에 가둔 뒤 온갖 방법으로 학대하여 하루 사이에 수백 냥의 은자(銀子)를 징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나라 서울에 가는 역관들에게 억지로 헐값을 대어주고는 돌아왔을 적에 그 열 배나 불법으로 탈취하므로 집을 기울여 파산하고서도 제대로 상환하지 못하여 원근에 사는 족속들이 모두 피해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사방 주현의 아전들이 일 때문에 서울에 올 경우 끝까지 찾아내어 그 고을 사람이 진 빚을 모두 책임지기를 요구하면서 가두어놓고 탈취하기를 끝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방 사람들이 한번 도성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나라를 세워 법을 설치한 뒤로 어찌 이와 같은 시대가 있었겠습니까. 대간이 이를 논하여도 죄를 가하지 못하시는 성상의 의도를 신들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조종(祖宗)의 법이니, 전하께서 어떻게 사사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해치며 법을 뛰어넘고 죄를 범하는 것이 이와 같이 심한데도 죄벌이 미치지 않고 관작이 그대로 있습니다. 궁노(宮奴)와 부속(府屬)까지도 사주를 받아 악행을 저지르면서 모두 태연하고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누비면서 말하기를 ‘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데, 평민들이 이들을 보면 마치 사나운 귀신을 만난 것처럼 놀라고 두려워하여 피해 숨으니, 그 기상이 참담합니다. 전하께서 일찍 조치하여 특별히 엄금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걱정거리가 여기에 그치지 않아 원근의 원망이 모두 전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조종의 법이 이로부터 폐지될 것이며 조정의 기강이 이로부터 떨어질 것이며 전하의 백성들이 이로부터 수족을 놀리지 못할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책임은 오로지 헌부에 있는데도 사사로운 위엄이 매우 왕성하므로 하리(下吏)들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두려워하여 차라리 본부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감히 궁가에 거스름을 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 임금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고 국가의 법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헌부가 법관의 몸이 되어 어찌 하리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그대로 놔둔 채 기강을 진작시켜 백성을 구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재이로 인하여 백성을 구휼하라는 명이 이미 내렸으니 해조는 받들어 주선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유사의 뜻은 항상 경비를 걱정하여 궁한 백성에게 베푸는 은택이 아래에까지 내려가지 않으니, 전하께서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시어 단연코 시행하지 않는 한 반드시 정체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부(貢賦)의 역(役)이 지난 시절에 비해 반감(半减)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고질적인 중병이라도 지탱해 나갈 수가 있으나 노쇠하게 되면 아주 작은 병이라도 제대로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역(民役)이 조금 가벼워졌는데도 원망이 전과 다름이 없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은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었으니, 마치 큰 병을 이제 막 앓고 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음과 죽을 먹이고 좋은 곡식과 고기로 영양을 취하게 하며 편안한 자리에 뉘여 기혈(氣血)이 정상화되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완전하게 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불행하여 변란이 서로 잇따르고 전쟁이 자주 일어나 책응할 일이 날로 많아졌으므로 백성에게 취하여 마련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와 동시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이미 일정한 생산이 없게 되어 안정된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호패(號牌)를 폐지하자 유민(流民)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 살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옮겨왔다가 옮겨가므로 남아 있는 자가 얼마 없는데, 여러 명목의 역(役)은 그대로 남아 있어 해조와 해사가 장부를 조사해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기타 정군(正軍)도 대부분 유랑하여 도망치므로 이웃과 종족이 피해를 입는 폐단이 다시 일어났는데, 한 사람의 도망으로 한 마을이 피해를 받아 갈수록 서로 침해하여 원근이 소란스러우니, 수령도 구원할 만한 방책이 없고 방백도 잘 처리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유랑하여 도망간 사람의 역을 전결(田結)에 책임지워 내도록까지 하고 있으니, 백성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으며 원망이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 폐단을 막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이 백성들이 농가에서 편안히 지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대로 침해하여 재물이 이미 바닥이 났는데, 길흉간의 큰 예(禮)가 해마다 중첩되므로 대소간에 모두 시민(市民)에게서 마련해내고 있으니, 이것이 중외(中外)가 모두 고달파지고 농민과 공상(工商)이 함께 병든 까닭입니다.
또 한 가지 의논이 있으니, 국사(國事)와 민사(民事)를 갈라서 두 가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상(慈詳)하고 개제(愷悌)한 사람에 대해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 칭찬을 받으려 한다고 하고, 일을 잘 주선하여 능력을 자랑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공무를 집행한다고 하여, 이를 기준으로 축출하고 승진시키며 헐뜯고 칭찬합니다. 조정이 어떤 기품을 숭상하면 원근이 그 영향을 받게 마련인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선포하는 승지가 거꾸로 독촉하며 채근하는 행정을 하고 죄인을 매질하는 형벌이 끝내 목민관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이미 작상(爵賞)을 주어 권장하고서 또 형벌을 내려 문책한다면 방백과 수령이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겨를이 없을텐데, 관대한 법규를 펴며 어루만져 사랑하는 방도를 다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오늘부터 백성들과 더불어 낡은 것을 고쳐 새로 시작하소서. 훈신에게 하사한 문서와 당초 관청에서 적몰한 명부를 해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서계(書啓)하도록 하고, 동시에 제도(諸道)의 방백으로 하여금 수령 중에서 억센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명한 사람을 따로 정해 죄인에게 적몰한 전민(田民)이 있는 곳에 가서 직접 부정을 적발하도록 하여, 아무 죄인의 전지는 몇 결(結) 몇 구역이며, 아무 고인은 하사받은 것이 얼마이며, 아무개는 탈취당한 곳이 몇 군데인지 낱낱이 기록을 작성하여 올려 보내게 한 뒤에 해조의 기록과 서로 대조토록 하소서. 그리하여 적몰한 것 중에 들어 있지 않은데도 불법으로 점유한 것과 지난번에 탈취당한 것을 그대로 빼앗아 점유하고 있는 것은 그 곳의 관원으로 하여금 본 주인에게 되돌려 주게 하고, 정수 이외에 많은 양을 외람되게 점유한 것은 다른 공신에게 옮겨주도록 하여 고르지 않게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동시에 탈취당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원망을 누그러뜨리도록 하소서.
내수사에 투속한 자는 해사로 하여금 문권(文券)을 조사하여 되돌려 주도록 하고, 서로 송사 중에 있거든 유사와 수령에게 맡겨서 법에 따라 처결하도록 하되 본사로 하여금 그 사이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소서. 고발하는 사람이 있으면 역시 해도와 해조로 하여금 상세히 증거를 조사하게 하여 혹시 무고일 경우에는 중한 형벌로 다스리소서. 액정서의 관원과 하인들은 외방에 심부름 보내지 못하도록 하고, 이조에 신칙하여 내수사의 모든 관유(關由)와 문이(文移)는 반드시 그 가부를 살펴서 쓸 것은 취하고 못 쓸 것은 버려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게 함으로써 조종의 옛 제도를 회복하소서. 각 아문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이익을 취하지 말도록 분명히 훈계를 내려 일체 폐지시킴으로써 그 근원을 막으소서.
그리고 헌신(憲臣)에게 명하여 연줄을 대어 폐단을 만드는 사람을 적발해서 무거운 벌로 논죄하고 용서하지 말도록 하소서. 제 궁가에서 법을 어기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탑전(榻前)에 나오게 하여 간곡하게 타이르고, 헌부에게도 단단히 일러서 궁노(宮奴)와 부(府)에 딸린 자 중에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는 자나 채권(債券)을 바치거나 몰래 청탁하여 백성을 침해하는 자는 구속하여 중한 형벌을 내리고 떳떳한 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중외에 깨우쳐서 침해를 당한 사람으로 하여금 법부(法府)와 해조에 일제히 소송을 내게 하고 빼앗긴 물건을 낱낱이 찾아 주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백성들의 급박한 상황을 풀어 주소서. 명나라 서울에 갈 때 사사로운 물품의 무역을 허락하지 말고 이를 범한 자도 무겁게 죄를 물으소서.
재이를 구휼하는 일은 보통의 예를 따르지 말고, 임금 자신의 봉양에 대해서는 통렬히 삭감하고 특별히 면제해 주어 오직 어루만져 기르는 데 뜻을 두소서. 어사의 고강(考講)이나 점마 별감(點馬別監)의 지방 파견도 정지하고 조금 풍년이 드는 해를 기다려 하도록 하소서. 각 고을의 유망(流亡)과 절호(絶戶)에 대해서는 해도(該道)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해 선처하도록 함으로써 이웃과 종족의 폐단을 제거하소서. 응당 바쳐야 할 각종 포목의 곱고 거칠며 길고 짧은 품질도 당초의 재생청(裁省廳) 사목대로 하고 그 규정을 넘지 못하게 하소서. 이번에 재이를 입은 곳은 자세히 현장 조사하여 재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하고, 다시 애처롭게 여기어 돌보아주는 은전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그리하면 절목 사이의 일은 자연 유사(有司)가 처리할텐데 그 큰 근본은 오직 전하께서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여 덕을 우선으로 삼고 이(利)를 뒤로 하며 위를 삭감하여 아래를 더해주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일을 잘 주선하는 신하를 지나치게 장려하지 말고 선량한 관리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지 마소서. 가혹한 정치는 눌러서 행하지 못하게 하고 인서(仁恕)의 도를 확대 적용하소서. 그리하여 온 나라의 백성들을 모두 널리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인덕(仁德)의 지역에 살게 하며 한 사람도 제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함으로써 임금의 도리를 다하소서.
또 한 가지는 간하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임금은 많은 백성의 위에 군림하여 온갖 정무를 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총명과 예지가 누구보다 으뜸간다 하더라도 분명히 보고 두루 듣지 않으면 보고 들을 때 편벽됨이 있게 되어 자신을 바루고 좋은 정치를 도모할 길이 없게 되는데, 이는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순 임금 같은 성인도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으며 성탕(成湯) 같은 덕으로서도 간하는 말을 따르고 어기지 않았으니, 옛 성인이 어찌 성지(聖智)로 자처하면서 남은 모자라게 여겼겠습니까. 삼대(三代) 이후로 치세와 난세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마는, 간하는 말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간하는 말을 막으면 어지러워 진 것이 역사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이 간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간하는 말을 막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간하는 말을 따라 잘 다스린자는 적고 간하는 말을 막다가 망한 자가 많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사람의 정이란 언제나 나에게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고 귀에 거슬리는 것은 언제나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혹 자신의 사사로움에 유혹되기도 하고 이해관계에 이끌리기도 하며 기뻐하고 성내는 감정에 좌우되기도 하니, 이것이 충신과 곧은 선비가 언제나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따라서 나라가 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영특하고 총명함이 옛 제왕들 가운데 으뜸이시고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나, 말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도에 있어서는 한(漢)·당(唐)의 임금들에 미치지 못하십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중외에서 함께 걱정하는 바를 모두 진달드리겠습니다.
오늘날 대각의 신하가 참으로 보잘것 없기는 합니다만, 어찌 모두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귀와 눈이 되는 직임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고 생각하는 책무를 주신 이상, 일에 따라 논열(論列)하는 것이 그 직책이니, 채택할 만한 말이 있으면 곧바로 빨리 따르는 것이 옳고 혹 맞지 않는 말이 있더라도 넉넉하게 용납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신을 비워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지 않고 먼저 듣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입니다. 승여(乘輿)에 대해 언급하면 업신여기며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의심하고, 관원의 부정행위를 조사하여 탄핵하면 알력하여 배격한다고 의심하고, 잘잘못에 대한 일을 의논하면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꾸몄다고 하고, 각궁(各宮)에 속한 하례(下隷)에 관계되는 일이면 직접 배척한다고 성을 내고, 낭묘(廊廟)와 관련된 일은 동요시킨다고 염려하십니다.
그리하여 언론의 옳고 그름을 살피지 않고 본심에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 말을 채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히 꾸짖어 책망하기도 하고, 특명으로 체직시키기도 하고, 어거지로 전교를 내리기도 하고, 지방 고을로 내쫓기도 하고, 허술한 지위에 놔두기도 하고, 임명할 때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심(私心)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합니다. 심지어 옥당의 다섯 신하를 귀양 보낸 일이 이미 잘못된 조치였다는 것을 깨달으셨다면 그 뒤에 당연히 얼음이 풀리듯 명백하게 처리해 주셨어야 하는데, 아직 한산한 곳에 두고 거두어 쓰지 않고 계십니다. 삼사가 서로 바로잡는 것은 본디 상례(常例)인데 무슨 깊은 죄가 있습니까. 이 때문에 조금 굳세고 방정하다는 이름이 있는 선비는 거의 모두 조정에서 떠나가고, 녹봉이나 유지하며 몸을 보전하려는 사람이나 겨우 구차하게 용납 받고 있으니, 대각이 쓸쓸하여 곧은 기상이 떨쳐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례에 따라 아뢰는 것이나 그저 책임이나 메우려는 논을 잇따라 여러 차례 올려도 채택되지 않으므로 이럭저럭 세월이나 보내면서 날로 분위기가 오염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는 풍습이 이루어져 상하가 서로 덮어주며 무기력하게 처신하는 것만을 숭상하여 맑은 의논은 날마다 고립되고 있으니,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지난날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위로 상의 잘못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이롭고 해로움에 이르기까지 누가 전하를 위하여 기꺼이 말하려 하겠습니까. 만일 전하가 대각을 꺾어 스스로 귀와 눈을 제거하면, 용방(龍逢)이나 비간(比干) 같은 충신이 대각에 늘어서 있고 정자(程子)·주자(朱子)·범중엄(范仲淹)·진덕수(眞德秀) 같은 현신이 날마다 경연에서 모신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성상의 덕을 도와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 엄숙하게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잘난 체하는 병통을 제거하고 즐거이 남의 의견을 취하소서. 그리하여 비근한 말이라도 반드시 살피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도를 구하여 잘못한 것을 듣지 못하고 할 말을 다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소서. 대간을 책망하고 격려하여 마음을 다해 바로잡고 숨김없이 논의를 다하게 하여 은화한 얼굴로 대접하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소서. 공경(公卿)의 계차(啓箚)와 초야의 상소도 모두 거두어 불러서 다시 근신(近臣)의 반열에 두고, 양사가 간쟁하여 아뢰는 것은 모두 윤허하여 언로를 활짝 여는 동시에 뭇 사람의 정이 막힘없이 통하게 하소서. 성덕(聖德)을 날로 새롭게 하여 근본을 세우고 사업에 이를 시행하여 시대의 어려운 점을 크게 구제하소서. 백성을 도와 천도(天道)가 빛나고 비색(否塞)한 운수를 돌려 태평을 이루는 것은 단지 전하께서 한 번 자세를 바꾸시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사람을 쓰는 것[用人]입니다. 하늘은 한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낳아 자연히 한 시대의 일을 넉넉하게 마치게 하는 것이니, 오직 임금이 지성으로 구하고 재주에 따라 맡기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후세의 임금은 사람을 쓰는 요체를 알지 못해 늘 인재가 없다는 탄식을 발하니, 한 시대를 속이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뭇 백성에게 군림한 지가 벌써 1기(紀)에 가까우니, 간사하고 올바르며 어질고 어리석은지를 필시 환히 살펴서 분간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각기 알맞은 곳에 등용하여 사공(事功)을 일으켜 임금의 사업을 넓혀야 마땅한데, 위로는 공경으로부터 아래로는 온갖 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직분을 잃어 여러 일이 무너지는 것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도 필시 조정에 임하여 탄식을 발하면서 인재가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현재 조정에는 좋은 선비가 많고 시골에는 묻혀 있는 어진이가 없으니, 사람을 얻은 훌륭함이 이에 이르러 성대하다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밝게 보고 신중히 가려서 성의를 미루어 맡기면, 어찌 훌륭한 보필로서 국사를 담당할 사람이 없겠습니까. 일단 한 사람을 얻어서 곁에 두고, 그로 하여금 천지의 도를 공경히 밝히고 국사를 경륜하게 하며 그로 하여금 사방에서 준걸한 사람을 초치하여 여러 지위에 배치하게 하면, 반드시 뜻이 굳고 방정하며 정직한 사람이 나와서 전하의 대간이 될 것이며 옛것을 배워 들은 것이 많은 선비가 나와서 전하의 강관(講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까다롭지 않아 백성과 친근해지는 어진 관원을 열읍에 내보낼 수 있고, 온갖 집사의 분주한 직책에 훌륭한 인사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병마를 통솔하는 직임에 간성(干城)이 되는 장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방면(方面)을 통치하는 방백의 선발에 맑고 깨끗한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안팎으로 인재를 얻게 되면 다스리는 도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이미 밝게 보아 신중히 가리지 못하고 또 성의를 다하여 맡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대신을 등용하고 물러나게 함을 마치 바둑돌 두듯 하고, 대각을 책망하여 오로지 무기력한 사람만 취하였으며, 수령은 세금을 잘 긁어모으는 것으로 능함을 삼고, 곤수(閫帥)는 이력(履歷)만을 으뜸으로 삼으며, 방백은 세금을 재촉하는 것으로 훌륭함을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신은 자리만을 채우고 있으면서 문서를 봉행할 따름이고, 대간은 인원수만을 갖춘 채 사소한 허물만 적발할 뿐이며, 강관은 책을 들고 읽기나 할 뿐이고, 수령은 백성을 학대하면서 자신을 보전할 뿐이고, 곤수는 군졸을 모질게 다룰 뿐이며, 감사는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세금 바치기를 독촉할 뿐입니다.
게다가 벼슬아치들 사이에 사의(私意)가 크게 횡행하여 공경 사대부들이 자제와 친속을 위하여 벼슬 구하기를 청탁하면서 뒤쳐질까 걱정하며, 관원을 전형하여 뽑는 관원도 주의(注擬)할 때 사람과 기국의 합당 여부는 헤아리지도 않은 채 청탁한 사람의 지위가 높고 낮은 것으로 차례를 정합니다. 그러므로 엽관(獵官)의 풍습이 이루어져 염치가 날로 상실되었으니, 전조(銓曹)가 아무리 공정한 도리를 힘써 시행하려 해도 습속이 이미 이루어져 갑작스럽게 변화시키기 어려운 관계로 관의 기강이 점점 문란해지고 있는데, 단지 뇌물로써 관직을 얻지 않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신에게 위임하여 심복(心腹)을 의탁하고 대각을 존중하여 이목을 맡기며, 유신(儒臣)을 가까이하고 믿어 흉금을 털어놓고 다 아뢰게 하소서. 만일 그 직책에 맞지 않음을 알았거든 그 사람을 바꾸어 다시 합당한 사람을 구하소서. 사람은 물러나게 할 수 있으나 직임은 구차하게 충당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그 직임까지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의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사람의 재주를 모두 버리지는 마소서. 친속이라 하여 중하게 대우하지 말고 소원하다 하여 가볍게 대하지 말며, 친속이라 하여 편벽되게 믿지 말고 소원하다 하여 의심하고 꺼리지 마소서. 취하고 버림을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따르고 말이나 행동을 사의(私意)에 얽매임이 없게 하소서. 뜻에 아첨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그 간사함을 살펴서 그의 아첨떠는 말을 기뻐하지 말고, 허물과 잘못을 규찰하여 바로잡는 신하는 그의 충직함을 인정하여 혹시 광망(狂妄)하더라도 성내지 마소서.
전조(銓曹)의 관원을 엄히 단속하여 사정(私情)을 따르거나 개인적인 청탁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고, 공경대부를 경계시켜 힘써 인재를 천거하게 하되 혹시라도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하도 크게 공변되고 지극히 올바른 도리로 위에 밝게 임하여 공도를 넓게 열고 부정하게 진출하는 길을 영원히 막아 등용하고 물리치며 주고 빼앗는 것에 모두 인심이 복종하게 하소서. 또 안팎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시골에 남아 은거한 사람을 찾아내어 예를 갖추어 초빙하게 하고 산골에서 덕을 수양하던 사람으로서 불행히도 이미 죽은 사람은 충분한 표창을 가하고, 다행히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어진이를 좋아하는 성의를 도탑게 하여 보고 듣는 자들을 격동시켜서 온 세상의 선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모범으로 삼는 바가 있도록 하소서.
붕당(朋黨)의 폐해는 뿌리를 내린 것이 너무 견고하여 50년 이래로 아비와 자식간에 서로 전승하였으니, 하루아침에 혁파하려 하여도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덕으로 그 현부(賢否)를 살펴 지성(至誠)의 도로써 맡기고 의심하지 말며 오직 재능만을 취하소서. 논의하는 사이에 옳고 그름을 통렬히 분별하여 미리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며 지나치게 과거의 행적을 혐의하지 마소서. 그리하면 자연히 어진 이는 위에 있고 어질지 못한 이는 아래에 있게 되어 함께 공경하는 아름다움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사치의 해로움이 천재(天災)보다 심하니, 검소는 덕(德)의 공순함이요 사치는 악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위로는 천자 제후로부터 아래로는 경·사대부·서민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숭상하여 하고 싶은 짓을 다하면 그 집과 나라를 망치고 몸을 잃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 사치 풍조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데, 사대부의 웅대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음식 및 의복과 예제(禮制)를 뛰어넘는 혼례와 상례 등, 가능한 한 남보다 낫게 하려고 하며 한계를 모르고 있습니다. 여염에서도 서로 본받아 귀천의 구별이 없어졌는데, 광대 따위의 천한 자들도 왕후의 옷을 입으니,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것이 꼭 여기에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오래도록 유지될 방법을 생각하여 검소한 덕을 삼가 행하면서 안으로는 음악과 여색의 즐거움이 없고 밖으로는 놀고 사냥하는 기호를 끊었으니, 위에서 행하는 것을 아래에서 본받아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 교화가 펼쳐졌어야 마땅한데, 나쁜 풍속이 그치지 않고 사치의 풍습이 더욱 불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들은 전하의 거느려 인도하는 근본이 위에서 오히려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지 않나 염려됩니다. 신들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승여(乘輿)와 복어(服御)의 꾸밈이 지난번보다 삭감된 것이 있습니까? 주옥과 채색 비단으로 만든 노리개를 전보다 가까이하지 않으십니까? 궁정에서 부리는 무리들 가운데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은 없습니까? 신들은 전하가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자의 길례(吉禮)에 한껏 사치를 부려 진기한 보화를 중국에서 사사로이 사들였고 노리개를 재주껏 만드는 데에도 꽤 유념했다는 이야기가 외간에 전파되었습니다. 신들은 그 말을 과연 믿어야 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야기가 외간에 전파된 데에는 반드시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그런데도 최고급의 집을 그만 조종(祖宗)이 정한 제도를 뛰어 넘어 짓게 하면서 대간이 논해도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합당치 않은 사람에게 감독시켜 장엄하고 화려하게 힘쓰도록 하였는데, 중앙의 빈 뜨락에도 건물을 세우느라 근처 빈 터의 기와와 돌이 모두 다하였으며 돌을 자르고 나무를 끌어오느라 어영차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보고 듣기에 아름답지 못하여 원근이 놀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친애하는 마음이 치우친 나머지 조종의 법도를 가볍게 버리고 대각의 공의(公議)를 따르지 않으시니, 어떻게 아래를 거느리고 풍속을 변화시키겠으며, 또 어떻게 법을 준수하여 방비를 베풀겠습니까. 더구나 옳은 방향으로 가르쳐도 오히려 잘못되지나 않을까 두려운데, 먼저 사치로써 인도하니 어찌 덕을 기르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한(漢)나라 황제는 말하기를 ‘내 자식을 어떻게 선제(先帝)의 아들과 같게 하겠는가. 선조(先朝)의 왕자 중에도 집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백성의 집을 빼앗아 들어가면 이로 인하여 해를 끼치고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먼저 이들에 대하여 조처해 주지 않고 먼저 대군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이것이야말로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임금의 아들을 봉하였다.’059) 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크게 깨달아 옛날의 태도를 바꾸시어 사욕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여 외부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그런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소서. 승여와 복어의 꾸밈은 가능한 한 소박하게 하고, 주옥과 채색 비단 같은 종류는 궁중에 머물러 두지 못하게 하소서. 진귀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말고 중국에서 사오는 것을 폐지하며 궁첩을 엄히 타일러서 사치의 풍습을 제거하소서. 새로 짓고 있는 집의 역사는 지금 우선 정지하여 후일을 기다리도록 하고, 비어 있는 묵은 궁궐로 옮겨 주어 살게 하되, 만일 부득이하다면 집짓는 칸 수를 한결같이 법제대로 하게 하소서. 또 종척(宗戚)과 외속(外屬)과 귀근(貴近)의 집안으로 하여금 먼저 검약을 준수하여 호사(豪奢)를 물리쳐 끊도록 하소서. 거듭 법부(法府)에 명하여 금지 조항을 반포하게 하고,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공경 대부 귀척(貴戚)의 집이라도 사정을 두어 흔들리지 말고 법을 살펴 다스리게 하소서. 공변되게 시행하고 오랫동안 지켜서 지난날의 풍화(風化)를 파괴하는 행위를 일체 씻어버리기로 마음을 정하시면 집을 나오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종족끼리 정을 두텁게 하여 지내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구족의 정의를 도탑게 편다[敦敍九族]’고 하였는데 도탑다는 것은 후하게 한다는 뜻이고 편다는 것은 분수를 지키게 한다는 말입니다. 제왕이 종족에 대하여 도탑게 하지 않으면 인(仁)을 손상시키고 펴지 않으면 의(義)를 손상시키는 것이니, 반드시 두 가지의 도를 다한 다음에야 비로소 한 편에 치우친 폐단이 없어져서 친애하는 도를 제대로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세종과 세조와 성종은 모두 높은 덕을 밝혀 구족을 친애하여는데, 윤기(倫紀)를 펴는 집을 설치하고 가까운 여러 친속으로부터 소원한 종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스스로 인접(引接)하여 예모를 간략하게 하면서 술과 음식을 베풀어 즐거움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굶주림과 추위를 묻고 곤궁함을 보살폈으며, 혼인할 때를 놓친 사람을 공적으로 아내와 남편을 골라 관청에서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도록 하는 한편, 아주 가까운 친척은 대궐 안으로 끌어들여 집안 사람의 예와 같이 하고 외속(外屬)의 무리도 모두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하여 죄를 범하거나 조금이라도 소란을 일으켜 해를 끼치는 자가 있으면, 숙부(叔父)나 대군(大君)이라 할지라도 외정(外庭)의 의논에 일임하여 유사(有司)의 법으로 다스리고 감히 사사로이 용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속의 사람은 조정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단지 부귀만을 누리도록 하였으므로 종친과 외속 등이 마음속으로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밖으로는 그 위엄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미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데다 분수를 뛰어넘게 될 걱정이 없게 된 이것이야말로 정의를 도탑게 하고 분수를 지키게 하는 두 가지를 다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덕을 밝히고 친족을 친하게 대하는 것이야말로 조종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국가의 재력이 옛날과 같지 못하고 궁중 예절의 법도가 세상의 추이에 따라 더욱 엄격해졌으므로 궁중에 끌어들여 즐거움을 다하게 하거나 맞아들여 예를 다하지 못하고 혼인할 때나 곤궁할 때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것은 형편상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진실로 조종의 마음으로 ‘조종의 후예는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두 한 근본이다.’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랑스럽고 애틋한 마음이 유연히 생길 것입니다. 이 마음을 확대 적용해서 지성으로 대접하되, 혹시라도 귀한 신분을 빙자하여 백성을 괴롭히거나 법과 제도를 벗어나거나 교만과 사치를 분수에 넘치게 행하는 자는 잘 가르쳐 타이르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규정된 법이 매우 엄한 이상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폐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죄를 주는 것이 아니고 공의(公議)가 죄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흉역죄를 지어 친속(親屬)에서 끊어진 무리는 조종에 죄를 얻고 온 나라에 죄를 얻어 자연히 전하와 관계가 끊어졌으니, 하늘에 통한 그 죄악이야말로 후사(後嗣)에까지 적용시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와 손자는 모두 선조(宣祖)의 골육으로서 전하의 지친(至親)입니다. 따라서 흉악한 모의에 참여하지만 않았다면 의당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겨 보살펴야 되고 시기하여 미워하고 원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공(周公)은 천하의 주벌(誅罰)로써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주벌하였지만, 지친의 의리로써 그 아들 채중(蔡仲)을 제후에 봉하였습니다. 만일 채중이 덕을 본받아 행동을 고치지 않았더라면 실로 이런 일을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만, 성인의 지극히 공변되고 어진 마음이야 어찌 제왕이 당연히 법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후에 처형된 자의 아들과 딸로서 시집가고 장가드는 때가 지난 사람들에게 혼인을 허락하는 명이 있기는 하였으나, 죄인의 자녀와 누가 기꺼이 혼인하려 하겠습니까. 만일 국가에서 골라 정해주지 않으면 끝내 시집가고 장가들 날이 없어서 은명(恩命)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니, 이는 성실하게 조처해 주는 뜻이 못 될 듯싶습니다. 궁벽한 여염의 하천배들도 모두 배우자가 있는데, 아무리 죄인의 자녀라고는 하지만 어찌 차마 선왕의 피붙이를 하다 못해 일반 서민과 같이도 못하게 하여 천지의 화기를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광해는 폐위되어 안치된 지 9년에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대접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셔서 옷과 음식의 공급이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거룩한 덕이 하늘과 같습니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이를 우러러 탄복할 뿐 아니라, 역사책에 기록되더라도 영광된 일일 것입니다. 다만 그가 부귀를 누리며 생장하다가 오래도록 고달프고 괴로운 곳에 처하여 우두커니 홀로 살고 있으니, 필시 감내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람060) 이 죽은 뒤에는 어떤 사람이 시봉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마음을 써서 살피셔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종의 마음으로써 종척을 대접하고 조종의 법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금하소서. 외속(外屬) 같은 무리에게도 교만과 사치를 경계하며 권세를 빌려 주지 말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곤궁한 자는 특히 더 보살펴 주소서. 처형당해 친속이 끊긴 자의 아들과 딸은 그 나이에 따라 아내와 남편을 가려 주고 혼인에 필요한 자금을 지급하여 때를 잃지 않도록 하고, 정녕 의지할 데가 없는 자는 국가에서 급료를 지급하여 살게 하소서. 광해의 거처를 조금 더 수리하여 담장을 높이고 넓히며, 광해에 충성하던 사족과 궁인 중에 생존자가 아직 많을 테니 평소 조금 근신할 줄 알던 사람 한두 명을 골라 함께 살도록 허락하여, 한가롭게 세월을 보내면서 수명을 다하게 함으로써 더욱 거룩한 덕을 빛내소서.
또 한 가지는 안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내를 예법(禮法)으로 대하여 집과 나라를 거느린다.’ 하였고,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집이 정제되고서 나라가 다스려진다’ 하였으니, 집을 정제하는 것은 인륜의 시초인 부부 관계를 바루는 근본이고 제왕의 덕화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은 밖에 바르게 위치하고 후비(后妃)는 안에 바르게 위치하여 안의 말은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밖의 말은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여 안과 밖의 한계를 엄하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지름길을 막아야 합니다. 좌우의 궁첩들이 엄숙하고 경외하여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고 인척(姻戚)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격리됨으로써 연줄을 얻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이니, 이것이 안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전하는 안에 모시는 후궁이 없고 밖에 연줄을 잡고 오르는 길이 없게 하였으니, 가법(家法)이 바르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도 신들은 삼가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염려가 있으니, 전하께서 안을 엄격히 다스리는 것이 옛날의 제왕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계해년 초기에도 미치지 못함이 있는 듯십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궁중에 문안을 드리는 종들이 금문(禁門)을 출입하고 사가(私家)에서 드리는 술과 음식이 대궐의 뜰에 뒤섞이는가 하면, 산천에 기도한다고 궁녀들이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잡다한 물품을 운반하느라 구마(廐馬)가 도로에 지쳐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받듦에 있어서, 효도하는 도리상 한결같이 법대로 다스리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하께서 어찌 모두 알고 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밖에 소문이 전파되어 적이 탄식하는 사람이 많으니, 신들은 마치 부모의 허물을 듣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군부의 앞에 다 진달드리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위엄으로 하면 길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돌려 구하기를 올바름으로 하기 때문이다.’는 말을 체득하여 마치 태양이 하늘 중앙에 뜨자 뭇 그늘이 저절로 스러지고 바른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굽은 지름길이 절로 막히듯 궁중을 숙청(肅淸)하소서. 궁첩은 위엄으로 대하고 가볍게 모시는 궁녀들에게는 장중하게 임하여 총애를 열어서 모욕을 불러들이지 말며 은혜로써 의(義)를 덮어 가리지 말고 사사로움으로써 공도(公道)를 해치지 마소서. 인척들도 신하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떻게 감히 사사로이 서로 문안하며 개인적으로 물건을 서로 드리느라 궁중을 방문한단 말입니까. 만일 이런 폐단이 있거든 그 성명을 거론하여 외정(外廷)에 말하고 유사에게 맡겨서 공명정대한 도를 보이소서. 사치스럽게 꾸민 화려한 장식과 물처럼 차차 스며드는 참소의 말은 멀리 내칠 뿐만 아니라 또 죄벌을 가하소서. 기도하는 풍습과 무익한 작태는 일체 금단하소서. 아무리 자전과 관계되는 일이라도 큰 것은 정성을 다하여 기미를 보아 간하고, 작은 것은 임시방편으로 선처하여 자전의 충실하고도 깊은 성덕이 혹시라도 허물이 있게 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거룩한 전하의 행동을 만물이 모두 보게 하소서.
또 한 가지는 학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왕의 학문하는 도는 궁리(窮理)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독서 이외에 있지 않으며, 독서하는 방법은 차례를 따라 정밀함을 이루며 거경(居敬)으로 뜻을 견지하여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 되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깁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이 이미 감반(甘盤)061) 에 나아갔는데도 경연에서 더욱 독실하게 강론하시며 섭렵하지 않은 경서(經書)와 사책(史冊)이 없습니다. 따라서 학문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진보되고 도가 몸에 쌓여 천하 사물의 이치를 속속들이 찾아내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를 다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을 세우고, 중화(中和)의 경지에서 천지를 돕는 공을 이루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씀하시는 것과 정령(政令)으로 시행되는 것 사이에 경서의 훈계와 서로 크게 배치되는 것이 많습니까. 시험 삼아 한두 가지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서경(書經)》에 ‘하늘의 경계를 삼가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는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여 천심이 즐겁지 않게 하였습니까. 《서경》에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는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여 나라의 근본이 날마다 흔들리게 하십니까. ‘간하는 말을 따르면 성인 된다.’는 것이 《서경》의 가르침인데, 어찌하여 전하는 이토록까지 간하는 말을 막고 자신의 지혜를 쓰십니까. ‘관원은 어진이를 임용하라.’는 것이 《서경》의 가르침인데, 어찌하여 전하는 사람을 알아서 잘 임용하기를 미진하게 합니까. 《서경》에 ‘집안에서 씀씀이를 검소하게 하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검소하고 소박함을 보이는 것이 옛날 제왕에 미치지 못합니까. 《서경》에 ‘사랑은 친한 친척에서부터 베풀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은혜와 정의의 두 가지를 다함이 우리 조종에 미치지 못합니까. 《서경》에 ‘집안과 나라에서 시작한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궁중의 엄밀함이 차츰 당초와 같지 않습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 책을 읽지 않았을 때나 읽고 난 뒤나 똑같은 사람이면 책을 잘 읽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전하의 9년 강학이 잘 읽지 못한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이는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성현이 서로 전해 준 심법(心法)을 높고 멀어서 배울 수 없다고 여긴 나머지 그 근본은 탐구하지 않은 채 한갓 그 말단만을 일삼고 그 본지는 궁구하지 않은 채 그저 그 글만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연을 열어 책을 펴놓고 읽은 것은 한 때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여 상자만 사고 구슬은 되돌려 주듯 실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잠자코 있는 것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차리는 예가 너무 엄격하여 정의(情意)가 도탑지 못하니, 경연의 신하가 강독을 권한 것도 한갓 고사(故事)에 따라 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경연도 하루 걸러 열기도 하고 수개월 동안 폐하기도 하여 어진 사대부를 접하는 날은 적고 궁첩과 환관을 가까이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도를 떠나고 정(情)은 사사롭게 움직여서 맑고 밝은 심성이 날로 떠나가고 뜻과 기상이 날로 소멸되니, 의리의 귀추를 끝까지 구명하지 못하고 공사(公私)의 나뉨을 가리지 못합니다. 영합하는 말이 쉽게 틈을 비집고 들어오고 격동시켜 목적을 이루려는 말이 마치 물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듯 하는데, 현란하게 핍박하는 의논이 날마다 앞에 나오고 위엄으로 제재하여 독단하는 조짐이 위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기쁨과 성냄을 표출하는 것이 중화(中和)의 올바름을 얻지 못하여 응대하는 말 사이에 거의 성내는 쪽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송(宋)나라의 신하 주희(朱熹)가 말한 ‘우레와 같은 위엄을 끼고서 사람의 위에 멋대로 군림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한다.’는 것에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이목(李楘)과 조경(趙絅) 등을 논죄하라는 분부가 한번 정원에 내려지자 보고 듣는 자마다 대소의 관원을 막론하고 모두 놀랐는데, 다행히도 일식과 월식이 정상을 되찾듯 곧바로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거두셨으니, 보통에서 훨씬 뛰어난 대 성인의 거조를 누군들 우러러 바라보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도성을 떠난 사람은 이미 미칠 수가 없고 감히 할 말을 다 하는 선비가 앞으로 떠나려 하는데, 머물려 두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도 오래도록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대간이 인피(引避)하는 까닭이며 신들이 개정해 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점입니다.
유생의 광망(狂妄)한 거조는 본디 천지와 같은 도량에 비추어 볼 때 개의할 것도 못 되니, 정거(停擧)하라는 처벌을 어찌 또 지존께서 간여하셔야 되겠습니까. 조형(趙珩) 등이 이미 정거하라는 명을 받든 뒤 사관(四館)과 한 번 회합을 가져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다면,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어야 마땅한데도 끝내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상의 분부가 내린 뒤에야 비로소 회계하였으니, 참으로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새로 진출한 사람이 조정의 사체(事體)를 몰라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명을 어기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상의 노여움이 과격하여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아침에 상을 모시다가 저녁에 옥리(獄吏)에게로 나아가 원통함을 안은 채 구속되어 정실(情實)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중도에 맞게 벌을 주고 아랫사람을 예로 대접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심지어 윤명은(尹鳴殷)은 나이 젊은 신진(新進)으로서 혼자 우뚝서서 감히 말하였으니, 전하께서 의당 훌륭히 여겨 권장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텐데 도리어 특별히 체직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아, 엄한 분부가 여러 차례 내리자 기상이 근심스럽고 참담하여 조정의 신하들이 벌벌 떨면서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데, 이는 바로 무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온갖 초목이 모두 병들어 원기(元氣)가 쓸쓸히 시든 채 다시 살 뜻이 없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크게 경각심을 가지고 거경(居敬) 궁리(窮理)의 학술로써 몸에 증험하고 인심(人心) 도심(道心)의 싹으로써 더욱 그 기미를 살펴, 마치 샘물이 흘러가고 불이 타들어가듯 확충하고 마치 싸움에 이기고 공격하여 탈취하듯 제대로 제거하심으로써 의리가 항상 밝아 물욕(物慾)이 물러가 그 명을 듣게 하소서. 또 자주 유신(儒臣)을 접하여 조용히 강마(講磨)하고 말을 주고받으며 토론하는 한편, 치도(治道)의 잘잘못과 사방의 이해도 다 말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 위아래가 마치 일반 가정의 부자간의 정처럼 통하게 하되, 만일 올바른 이치를 어기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거나 이익을 앞세워 백성을 병들게 하는 말이 있거든, 통렬히 제재를 가하고 장황하게 하지 못하게 하여 국체(國體)를 높이고 다스리는 법을 바루소서.
송(宋)나라 신하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사람의 감정 중에 쉽게 폭발하여 가장 억누르기 어려운 것은 성내는 것이다. 그러나 화가 날 때에 문득 그 노여움을 잊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관찰하면, 밖에서의 유혹은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 이쯤 되면 도(道)의 경지가 반절은 넘어간 것이다.’ 하였고, 사양좌(謝良佐)는 말하기를 ‘극기(克己) 공부는 모쪼록 성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을 향해 이겨 나가야 된다.’ 하였습니다. 여조겸(呂祖謙)은 젊었을 때 성품이 거칠고 사나웠는데, 《논어(論語)》를 보다가 ‘자신의 잘못은 스스로 두텁게 책망하고 남에게는 적게 책망한다.’는 데에 이르러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생각이 일시에 평탄해져서 죽을 때까지 이런 병통이 없었습니다. 다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분한 생각을 징계하는 데 더욱 뜻을 두소서. 신들은 전하의 결점이 무엇보다도 여기에 있다고 망령되이 여겨지는 까닭에 거듭거듭 말씀드리면서 감히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조목별로 진달한 일이 격언(格言) 아닌 것이 없다. 내가 두렵게 생각하여 채택해서 시행하겠다."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옥당이 임금의 어질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국가가 장차 망할까 걱정하여 과인의 잘못과 민생의 병폐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였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며 감탄하는 바이다. 해사(該司)로 하여금 각기 구마(廐馬) 1필씩 하사하게 하여 나의 뜻을 표하라."하고,
또 하교하기를, "차자 가운데 이른바 ‘선조(先祖)의 왕자도 집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전하가 대군을 위하여 먼저 집을 짓는다.’는 등의 말은 지극히 충직(忠直)하다.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내 허물을 듣지 못할 뻔하였다. 왕자군으로서 집이 없는 자는 집을 살 자금을 헤아려 지급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직언(直言)을 시행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註 056]상림(桑林)의 육책(六責) : 은(殷)나라 시조 성탕(成湯)이 7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자 상림에서 비를 빌며 자책한 여섯 가지. 곧 정치가 잘 조절되지 않았는지, 백성을 병들게 하지 않았는지, 궁실이 지나치게 화려하지나 않았는지, 여자의 청탁이 성행하지 않았는지,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지 않았는지, 참소하는 사람은 없었는지 한 것이다. 《순자(荀子)》 27 대략(大略).
[註 057]운한(雲漢)의 8장(八章) : 운한은 가뭄을 하늘에 하소연한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으로, 주 선왕(周宣王)이 여왕(厲王)의 폭정을 이어받아 잘 다스리려는 뜻이 있었으나 한발을 만나자 두려워하면서 하늘에 하소연한 내용이다.
[註 058]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겠다는 말 : 백성의 재물을 긁어 모으는 신하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는 것이 낫다는 맹헌자(孟獻子)의 말.《대학(大學)》 전(傳) 10장.
[註 059]‘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임금의 아들을 봉하였다.’ : 전국 시대에 위 문후(魏文侯)가 중산(中山)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아들 격(擊)을 봉하자, 신하 임좌(任座)가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아들을 봉하였으니 인군(仁君)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한 고사《자치통감(資治通鑑)》 1주기(周紀) 위열왕(威列王) 23년조.
[註 060]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람 : 광해군의 후궁인 소원(昭媛) 임씨를 말함. 광해군을 강화의 교동(喬桐)에 안치(安置)한 뒤, 시녀(侍女)가 없자 임 소원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23 안치광해군조(安置光海君條).
[註 061]감반(甘盤) :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스승.
<출처 : 인조실록 25권, 1631년 인조9년 10월3일 부제학 이경여(李敬輿) 등이 하늘을 공경할 것 등 8조목을 아뢰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副提學李敬輿、校理李景曾、副校理吳竱、修撰姜大遂等, 上箚曰:
臣等伏見, 近來臺閣之臣, 以聖躬闕遺、時政得失, 前後陳戒者, 亦非一二, 未聞有採納之效, 率下未安之敎, 拒人於千里之外, 如臣等狂瞽之說, 尤不足以動天聽, 而回聖意矣。 然臣等職忝論思, 輔導是任, 則何可徒爲屋下之憂, 而不爲盡言極論, 以效匡救之責乎? 不量譾劣, 條陳于左。 其一曰敬天。 人君處崇高之, 位居得肆之地, 所畏者天而已。 天者, 理也。 一念之萠, 不合於理, 則是違天也; 一事之行, 不循乎理, 則是慢天也。 古之帝王, 小心翼翼, 對越上帝者, 良以此也。 事天以誠, 則申命用休; 違天悖理, 則永終厥命, 而天心仁愛, 未忍遽絶, 必以災異譴告之, 昏迷罔覺, 終不改圖然後, 大降其罰。 臣等不暇遠引古昔, 其在昏朝, 天災、物怪, 疊現、層出, 而乃以顯思之命, 諉之高遠; 勸戒之言, 謂之常談, 迷而不復, 自絶于天, 當時之事, 尙忍言哉? 若使其時, 恐懼修德, 則惟天無親, 豈必輕棄於向時, 而有私於我殿下哉? 其所以殄滅眷佑者, 莫非敬與不敬, 誠與不誠耳。 天命靡常, 可不懼哉? 殿下卽阼以來, 星文、地道、昆蟲、草木之異, 固難枚擧。 數年以來, 廟樹之震、眞殿之災、半年之旱、八月之水、偃禾拔木之風, 實是近古所無之變。 殿下以爲氣數所關, 而自恕乎? 不然則何無大戒懼, 何無大省約, 何無大施措也? 減膳、避殿, 謂可以回天怒乎? 放釋若干罪累, 謂可以伸冤抑乎? 求言而得何嘉猷, 進言者何言得施? 求之不以其誠, 故言者不肯盡言; 聽之不以其誠, 故盡言者不得見採。 殿下之謂可以克享天心者, 不過圭璧旣卒而已。 噫! 災異之作, 有甚於昔時, 而修省之實, 未聞有大異於前日, 告戒之言, 率歸於報罷。 加以聖上傲然自聖, 而乾道日亢, 好惡循己, 而上下否隔, 無惑乎天怒未已, 太白晝見, 經月不滅, 雷雹之變, 又發於收聲之月, 變怪之興, 愈往而愈甚也。 水旱之餘, 禾穀之棲畝者無幾, 生民終歲勤苦, 以寄命脈, 計日待穫者, 擧皆損剝。 哀我民生, 其何以延歲月之命哉? 在昇平安泰之日, 變異之作, 若是荐臻, 則國之所存者幸也。 況以今日國勢, 以今日艱危, 以今日民心, 殿下以爲可保數年無事乎? 豈不大可寒心哉? 禍福, 無不自己求之者。 伏願殿下, 深懲旣往之失, 自求將來之福, 以桑林之六責, 省躬反求; 以雲漢之八章, 側身修德, 自心術隱微之際, 宮庭屋漏之地, 動靜云爲之間, 莫不嚴恭寅畏。 天命自度, 存以天理, 動以天則, 洞洞屬屬, 如孝子之事親, 務積誠意, 期致底豫, 而又渙發哀痛之敎, 以謝前過, 廣求直言, 翕受敷施, 無如前日文具之歸, 以爲消災之一助焉。 一曰恤民。 惟天建后, 實佑斯民, 非爲一人逸豫而已也。 撫之則后, 虐之則讎, 民心向背, 國以存亡。 明君、誼辟, 莫不以民碞爲畏, 朽索爲戒者, 良以此也。 斯民塗炭, 至於向時而極矣。 民罔常懷, 歸于有仁, 深山窮谷, 莫不歡欣鼓舞, 有若去虎口而歸慈母。 於時保民而王, 猶反手也, 而有司不能仰體聖意, 施措失宜, 惜小費而忘大信, 先細務而後遠圖。 蕩滌之恩, 反爲失信之歸; 變通之政, 遂爲紛更之端。 加以勳臣, 或有不待朝家之處置, 爭售封己之欲, 向時田民之見奪於權奸者, 不問契券之有無, 不計曲直之如何, 自相圖占, 有若攫金, 稱欲後已, 靡有限量。 自古定封、行賞, 各有限制。 千戶、萬戶, 視功輕重, 未有如今日之紊亂無統, 不爲限節, 使之聞見自取者也。 十年見奪, 抱怨待時者, 愁怨轉極, 揚眉之喜, 反爲蹙頞之憂, 前後一轍, 只易其主, 被奪則同, 在民何益? 此失之於初, 而民怨之所由始也。 內需司投屬之弊, 殿下龍潛之日, 亦必聞而知之矣。 中興之後, 雖不能拔本塞源, 而此弊少戢, 近來前習漸滋, 或因嫌陳告; 或得罪其主, 逃死來托; 或避苦趨逸, 因緣圖屬。 守令怯怵, 莫敢明辨, 歸之本司, 遐遠窮民, 其能得伸者幾何? 且事涉內司, 殿下不能虛心以處, 據法該郞, 至有推考之命, 聖心有所偏係。 弊端由是漸興, 有司之法, 不能行於其間, 掖庭之勢, 亦有異於當初, 不但下民其咨, 實爲識者之憂矣。 各衙門征利之弊, 已悉於頃日本館論箚, 臣等不敢更爲煩瀆, 今日生民之害, 莫大於此。 外方之人, 固已不堪, 而京師之民, 尤爲切害。 其隣族侵徵、破家流離、怨號道路之狀, 殿下必不得而聞之矣。 殿下爲生民父母, 癢痾疾痛, 視猶在己, 何忍於民, 何必曰利, 而不爲奮發乾剛, 洗滌此陋習、痼弊乎? 寧有盜臣之言, 臣等竊有疑於聖訓之太過, 以今觀之, 殆有甚焉。 宮家徵債之弊, 有甚於各衙門。 久遠未捧之債, 或持券而呈納, 或無據而陰囑。 縱其無賴之奴, 擇其富實之人, 謂負某人之債, 謂之某人之一族, 結縛倒懸, 囚係私第, 百般侵虐, 一日之內, 或徵數百銀兩。 赴京譯官, 勒付廉價, 及其回還, 橫奪十倍, 傾家、破産, 猶未能償, 遠近族屬, 俱被擾害。 至於四方州縣之吏, 因事抵京, 則窮搜極探, 邑人負債, 竝爲徵責, 囚係侵奪, 罔有紀極。 以此外方之人, 一入都門, 如就死地, 古今天下, 建國設法之後, 安有如此時者乎? 臺諫論之, 猶不加罪, 臣等固知聖意之所在, 然法者, 祖宗之法, 殿下安得而私之? 侵民害國, 越法犯科, 若是其甚, 而罪罰不及, 官爵猶在。
宮奴、府屬, 縱臾爲惡者, 竝皆晏然, 揚揚閭巷曰: "誰敢我何?" 齊民見之, 如逢鬼叉, 驚懼避匿, 氣象愁慘。 殿下如不早爲之所, 特加痛禁, 則橫恣之患, 不止於此, 而遠近之怨, 悉歸于殿下。 祖宗之法, 自此廢矣; 朝廷紀綱, 自此替矣; 殿下赤子, 自此不得措手足矣。 守法之責, 專在憲府, 而私威甚張, 下吏脅息, 寧受刑於本府, 不敢見忤於宮家。 嗚呼! 王綱未解, 國法未滅, 憲府身爲法官, 安得諉諸下吏之不從令, 而不思所以振綱、救民之道乎? 因災恤民之命已下, 該曺自當奉以周旋矣。 然有司之意, 常恤經費, 惠鮮之澤, 不得下究。 非殿下惻怛宸衷, 斷然行之, 必不免屯膏之弊矣。 貢賦之役, 比之向時, 卽減其半, 而譬之於人, 盛壯之時, 雖痼疾重病, 猶可支過, 及其衰老, 小小微恙, 亦不能堪。 今日民役稍歇, 而怨讟無異於前者, 亦猶是也。 民窮財竭之後, 有若新經大病之人, 必糜粥以食之, 梁肉以養之, 安置枕席之上, 以待氣血之復盛, 方可以安全, 而國家不幸, 變亂相尋, 兵革屢興, 策應日煩, 不得不取辦於民, 仍之以凶荒, 旣無恒産, 又無恒心。 號牌停罷, 流民四散, 不定厥居, 移來移去, 存者無幾。 諸色之役, 名目猶存, 該曹、該司, 按簿責布。 其他正軍, 亦多流亡, 隣族之弊復起, 一人之亡, 一里受害, 展轉相侵, 遠近騷擾, 守令無策可救, 方伯亦無善處之道。 流亡之役, 至有責出於田結者, 民安得不困, 怨安得不作? 不救此弊, 不出十年, 斯民不得安田廬矣。 唐、胡交侵, 財貨已罄, 吉凶大禮, 連歲稠疊, 大小取辨, 皆出市民, 此中外竝困, 本末俱病者也。 又有一種議論, 以國事、民事, 岐而二之。 慈詳、愷悌之人, 謂之悅民干譽; 辨事、衒能之輩, 謂之盡心奉公, 黜陟以是, 毁譽以是。 朝家所尙, 遠近承風, 承宣之臣, 反爲督責之政、箠楚之刑, 遂及分憂之吏。 旣有爵賞之勸, 又有刑罰之責, 方伯、守令, 自救不贍, 奚暇布寬大之條, 盡撫字之方乎? 伏願殿下, 其自今日, 與民更始, 勳臣受賜之籍及當初沒官之簿, 令該司詳査書啓, 仍令諸道方伯, 別定守令中, 剛明不畏强禦者, 罪人籍沒田民所在處, 躬自摘奸, 某罪人田幾結、幾區, 某功臣受賜幾何, 某人被奪幾處, 一一成錄上送後, 與該曹所錄相准, 不在籍沒中, 而冒占者及被奪於向日, 而仍爲奪占者, 使其官還給本主, 數外濫占者, 移給他功臣, 俾無不均、橫占之弊, 且紓被奪稱枉之怨。 內奴之投屬者, 令該司査考文券, 使之還給, 如涉相訟, 付諸有司及守令, 使之依法裁決, 勿使本司干與於其間, 有陳告者, 亦令該道、該曹, 詳細憑閱, 如或誣告, 繩以重律。 掖庭官員及下人, 勿令出使外方, 且飭吏曹, 凡內需司關由、文移, 必察其可否而取舍, 勿爲苟循, 以復祖宗之舊制。 各衙門句管之人, 明降敎戒, 使之一切停罷, 以塞其源。 仍命憲臣, 糾摘夤緣作弊之人, 重論不饒, 諸宮之違制害民者, 進于榻前, 丁寧敎戒, 亦飭憲府, 宮奴、府屬之橫拏者及以債券呈納, 陰囑侵民者, 囚禁重刑, 繩以常法, 曉諭中外, 使被侵之人, 齊訴法府及該曹, 被奪之物, 一一推給, 以解生民倒懸之急。 赴京時, 勿許私貿貨財, 犯者亦爲重究。 恤災之擧, 勿循常例, 痛自抑損, 特爲蠲免, 專意撫養。 御史考講、點馬之行, 亦爲停止, 以待年運稍豐。 各邑流亡絶戶, 令該道明査善處, 以除隣族之弊。 各樣應納之布, 精麤、長短, 亦依當初裁省廳事目, 毋使濫踰。 今番被災之處, 詳加踏驗, 仍給其災, 更施矜恤之典, 以慰民心。 然則節目間事, 自有有司存焉, 其大本則惟在殿下頓然悔悟,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先德而後利, 損上而益下。 辦事之臣, 勿爲太奬, 循良之吏, 勿爲太貶。 苛刻之政, 抑而不行; 仁恕之道, 擴而廣推。 擧一國之民生, 而咸囿於博施之仁, 無一物不得其所, 以盡人君之道焉。
一曰聽言。 人君臨兆民之上, 接萬幾之煩。 雖聰明睿智, 首出庶物, 非明目、達聰, 則視聽有所蔽, 無以正己而圖治, 此必然之理也。 故以重華之聖, 而舍己從人; 成湯之德, 而從諫弗咈。 古之聖人, 何嘗以聖智自居, 而狹人乎? 三代以後, 數千餘年, 治亂非一, 而從諫則治, 拒諫則亂, 昭載史籍, 非可誣也。 後之人辟, 非不知從諫之爲美, 拒諫之爲惡, 而從諫而治者少, 拒諫而亡者多, 何也? 人情常悅於順己, 不常悅於逆耳。 或爲己私之誘, 或爲利害之惑, 或爲喜怒之動, 此忠臣直士, 常不容於世, 而國隨以亡者也。 惟我殿下, 英明冠古, 天質粹美, 而其於聽言、納誨之道, 則有不及漢、唐之主。 臣等請冒鈇鉞之誅, 悉陳中外之所共憂者。 今日臺閣之臣, 固眇然矣。 然而豈皆無忠君、愛國之心哉? 殿下旣付以耳目之任, 論思之責, 則隨事論列, 是其職耳。 言有可採, 卽宜快從, 雖或不中, 亦當優容, 而殿下未恢虛受之量, 先示厭聞之色, 言及乘輿, 則疑其侮慢不敬; 糾劾官邪, 則疑其傾軋排擊; 論事得失, 則疑其失實搆虛; 事涉宮掖, 則怒其直斥; 係關廊廟, 則慮其動搖。 不察言論之是非, 不諒本心之無他, 非但不用其言, 或嚴譴而責之, 或特命而遞之, 或下情外之敎, 或斥黜下邑, 或廢置散地, 或於除拜之際, 顯示好惡之私, 至於玉堂五臣之竄, 旣出於過擧, 改悟之後, 固宜洞然氷釋, 而尙今置散, 不加收用。 三司相規, 自是常例, 有何深過之罪也? 以此稍號剛方之士, 率皆去朝, 持祿保身之人, 僅得苟容, 臺閣索然, 直氣不振。 循例之啓, 塞責之論, 連章累牘, 猶未見從, 悠悠泛泛, 日就汚下, 含默成風, 上下相蒙, 軟熟是尙, 淸議日孤, 言路之杜絶, 比諸向日, 無甚相遠。 上自聖身闕失, 下至生民利病, 孰肯爲殿下言之? 若如殿下之摧折臺閣, 自去耳目, 則雖使龍逢、比干之忠, 布列臺端; 程、朱、范、眞之賢, 日侍經幄, 亦末如之何也已, 尙何望裨補聖德, 振肅頹綱乎? 伏願殿下, 克去自廣之病, 樂取諸人, 雖邇言而必察, 雖逆耳而求道, 惟恐過之不聞, 言之不盡。 責勵臺諫, 使之悉心救正, 極論無隱, 和顔而待之, 虛心而受之。 公卿啓箚、草野章疏, 亦皆廣採, 罔有攸伏。 前後以言被斥之人, 竝皆收召, 復置邇列, 兩司爭執之啓, 竝爲允許, 廓開言路, 洞達群情。 日新聖德, 以立其本, 措諸事業, 弘濟時艱。 下濟而道光, 回否而成泰, 祗在殿下一轉移之間耳。 一曰用人。 天生一世人材, 自足了一世之事, 唯在人君至誠而求之, 隨才而任之耳。 後之人辟, 不知用人之要, 每發無才之歎, 不幾於誣一世乎? 殿下照臨群下, 已近一紀, 其邪正、賢否, 必皆洞燭, 而涇渭之矣。 宜其各適其用, 奮庸熙載, 而上自公卿, 下至百執事, 皆失其職, 庶事墮哉, 莫可收拾, 殿下亦必臨朝發歎, 以無才爲恨也。 目今朝多吉士, 野無遺賢, 得人之美, 於斯爲盛。 殿下果能灼見愼簡, 推誠委任, 則豈無碩輔、良弼擔當國事者乎? 旣得一人, 置諸左右, 使之寅亮天地, 經綸國事, 使之旁招俊彦, 列于庶位, 則必有剛方、正直之人出, 而爲殿下之臺諫; 學古多聞之士出, 而爲殿下之講官矣。 平易近民之良, 可布於列邑矣; 百執事奔走之職, 可得庶吉矣; 閫寄之任, 可得干城之將, 而方面之選, 可得澄淸之才矣。 內外得人, 何患治道之不成? 只因殿下旣不能灼見而愼簡, 又不能推誠而委任, 進退大臣, 如置奕碁, 責望臺閣, 專取疲軟, 守令則以掊克爲能, 閫帥則以履歷爲先, 方伯以催科爲賢, 故大臣充位, 奉行文書而已; 臺諫備員, 摘抉細過而已; 講官執卷, 展讀而已。 守令, 虐民自保而已; 閫帥, 剝割軍卒而已; 監司, 巡歷督責而已。 加以搢紳之間, 私意大行, 公卿士大夫, 爲子弟、親屬, 請囑求官, 惟恐不及, 銓選之官, 注擬之際, 不量人器之當否, 以請托高下爲次第。 是以奔競成風, 廉恥日喪, 銓曹雖欲勉行公道, 習俗已成, 難以猝變, 官方漸紊, 特不以賄賂得官而已。 伏願殿下, 委任大臣, 以托心腹; 敬重臺閣, 以寄耳目; 親信儒臣, 以盡啓沃。 如知其不稱, 易其人, 而更求可合者, 其人可退, 其任不可苟充。 勿以一人之非, 而竝其任而輕之; 勿以一事之失, 而竝其全才而棄之; 勿以親屬, 而有所重; 勿以踈遠, 而有所輕; 勿以親屬, 而有所偏信; 勿以踈遠, 而有所疑忌, 取舍一循乎公議, 擧措無係於私意。 阿意、順旨之人, 察其邪侫, 而毋悅其巧言; 繩愆糾謬之臣, 許其忠直, 而毋怒其狂妄。 嚴飭銓官, 勿循私情, 勿行私請, 戒諭公卿大夫, 務薦人才, 毋或私囑, 而殿下又以大公至正之道, 照臨於上, 廓開公道, 永杜邪徑, 進退與奪, 皆服人心。 又命內外諸臣, 搜羅遺隱, 旌招以禮。 林下養德之人, 不幸而已亡者, 優加褒恤; 幸而憖遺者, 益篤《緇衣》之好, 聳動視聽, 使一世趨善之人, 有所矜式焉。 朋黨之害, 植根已固, 五十年來, 父傳子承, 一朝欲革, 其勢未易。 然殿下以則哲之明, 察其賢否; 以至誠之道, 任之勿貳, 毋論彼此, 惟取才能; 論議之間, 痛辨邪正, 勿爲先有係着, 勿爲太嫌形迹, 自然賢者在上, 不肖者在下, 同寅之美, 不難致矣。
一曰崇儉。 古人云: "奢侈之害, 甚於天災。" 儉者, 德之共也; 奢者, 惡之大也。 上自天子、諸侯, 下至卿士大夫、庶民, 崇奢、極欲, 則未有不亡其家國, 喪其身者, 可不戒哉! 卽今奢侈之習, 日盛一日, 士大夫家第宅之盛, 膳服之侈, 婚喪之過制, 務勝相高, 靡有紀極, 閭閻相效, 貴賤無章, 倡優下賤, 得爲后服, 民窮財竭, 未必不由於此。 殿下惟懷永圖, 愼乃儉德, 內無聲色之娛, 外絶遊田之好, 宜乎上行下效, 風動草偃, 而汚俗未殄, 侈風益滋者, 何也? 臣等抑恐殿下導率之本, 猶有所未盡於上也。 臣等不敢知, 乘輿、服御之飾, 有減於曩時乎? 珠玉、錦繡之玩, 不近於前乎? 宮庭服使之輩, 無盛飾之人乎? 臣等有以知殿下之不能也。 何以言之? 王子吉禮, 務尙侈靡, 珍異寶貨, 私貿上國, 玩好之具, 製造之技, 亦頗留念之說, 傳播外間。 臣等未知其言之果信與否, 而所以得此說於外間者, 必有由矣。 此時, 何時, 而甲第營繕, 乃踰祖宗之制, 臺諫論之, 亦不允許? 監董匪人, 務爲壯麗, 中庭虛地, 亦爲杵築, 近處空基, 瓦石皆盡, 伐石、曳木, 呼耶動地, 觀聽不美, 遠近駭歎。 殿下牽於親愛之辟, 輕棄祖宗之典章, 不從臺閣之公議, 其何以率下而化俗乎, 亦何以遵憲而設防乎? 況敎以義方, 猶懼或失, 先以侈導, 豈是養德? 漢帝之言曰: "吾子, 豈可與先帝子等? 先朝王子, 亦有無家者。 奪入民家, 因以貽害, 以致民怨" 云。 殿下不先於此, 有所處置, 而先爲大君營宅, 此不幾於不以封君之弟, 而封君之子者乎? 伏願殿下, 翻然惕悟, 克己復禮, 其於外人之言, 有則改之, 無則加勉, 乘輿、服御之开, 務令朴素; 珠玉、錦繡之類, 勿留宮中。 不貴異物, 而罷上國之貿; 嚴飭宮妾, 而去侈靡之習。 新營第宅之役, 今姑停罷, 以待他日, 以空閑舊宮, 移給以居, 如不得已, 則造間之數, 一從法制, 又令宗戚、外屬、貴近之家, 先遵儉約, 屛絶豪奢, 申命法府, 頒布禁條, 如有犯科者, 公卿大夫、貴戚之家, 勿以私撓, 按法以治。 行之以公, 守之以久, 一切以洗滌曩時敝化爲心, 不出家而敎成焉。 一曰敦宗。 書曰: "敦敍九族。" 敦者, 厚之之義; 敍者, 有倫之謂也。 帝王之於宗族, 不敦則傷於仁, 不敍則傷於義。 必也兩盡其道然後, 方無一偏之弊, 而能盡親愛之道。 惟我世宗、光廟、成廟, 皆明峻德, 以親九族, 設敍倫之堂, 自近屬諸親, 至踈遠宗室, 常自引接, 簡其禮貌, 爲設酒食, 使盡其歡。 問其飢寒, 恤其困窮, 婚娶失時者, 公擇婦壻, 官給資裝, 至親近戚, 則引入大內, 禮如家人, 外屬之類, 亦皆存恤, 而至於作奸犯科, 少有擾害者, 則雖諸叔之尊、大君之親, 一任外庭之議, 繩以有司之法, 罔敢私貸, 外屬之人, 不使與聞朝政, 只享富貴。 是以宗屬等, 內感其恩, 外畏其威, 旣無怨懟之心, 而又無踰越之患, 此敦敍之兩盡也。 今我殿下, 明德親親, 固無愧於祖宗矣, 國家物力, 不如昔時, 宮禁禮數, 與世益嚴, 其不得引接盡歡, 延入盡禮, 婚嫁困窮, 不得軫恤者, 勢或使然。 然殿下誠以祖宗之心, 念祖宗之後裔, 無論遠近, 俱是一本一源之人, 則其愛親惻怛之心, 油然而生矣。 因此推廣, 待以至誠, 如或挾貴病民, 或越法踰制, 或驕奢濫溢者, 不可不敎戒之, 敎戒而不從, 則三尺甚嚴, 不可以私恩而廢之也。 此則非殿下罪之也, 公議罪之也。 其中兇逆絶屬之輩, 得罪於祖宗, 得罪於一國, 自絶于殿下, 通天之惡, 固當延及後嗣。 然其子女若孫, 皆宣祖之骨肉, 而殿下之至親也。 若非與於兇謀者, 所宜哀矜而憐恤, 不宜猜忌而疾怨也。 周公以天下之誅, 誅管、蔡, 而以至親之義, 封其子仲。 若無蔡仲之率德改行, 則固難輕議, 而聖人至公、至仁之心, 豈非帝王所當法者哉? 前後誅死者, 其子若女嫁娶過時者, 雖有許婚之命, 罪人子女, 孰肯連婚? 若非自國家擇定, 則終無嫁娶之日, 恩命歸虛, 恐非誠實之意矣。 窮閻下賤, 皆有配耦。 雖曰罪人子女, 豈忍使先王血屬, 不得降同於黎庶, 以傷天地之和哉? 至於光海廢處九年, 尙今保存, 此前古所罕有, 而殿下所以待之者, 無所不用其極, 衣食供給, 少無欠乏, 聖德如天。 不但擧國臣民, 欽仰歎服, 書之史冊, 亦有光矣。 第生長富貴之中, 久處困苦之地, 塊然獨居, 必有所難堪者。 任姓人之死後, 未知何人侍奉乎? 此殿下所宜軫念處也。 伏願殿下, 以祖宗之心, 待宗戚; 以祖宗之法, 禁其非。 如外屬之類, 戒之以驕奢, 毋假以權要, 其飢寒窮困者, 特加撫恤。 誅死絶屬者之子女, 隨其年歲, 擇定婦壻, 給其婚資, 俾免失時, 丁零無依者, 公給廩料, 俾得存活。 光海所處, 稍加葺理, 高廣垣墻, 士族、宮人之存者尙多, 擇其平日少知謹愼者一二人, 許令共處, 使之優遊度日, 得終天年, 以益昭聖德焉。 一曰刑內。 詩曰: "刑于寡妻, 以御于家邦。" 傳曰: "家齊而國治。" 齊家者, 正始之本, 王化之基也。
人君正位于外, 后妃正位于內, 內言不出於梱外, 外言不入於梱內, 以嚴內外之限, 以杜私邪之徑。 左右宮妾, 肅恭敬畏, 罔敢爲非; 戚屬姻婭, 嚴憚隔絶, 毋得夤緣, 此刑內之法也。 殿下內無嬪御之人, 外絶攀附之路, 家法可謂正矣。 然而臣等竊有私憂過慮, 恐殿下嚴內之政, 不惟不及於古之帝王, 尙有不及於癸亥之初者。 何以言之? 問安婢僕, 出入禁門, 私獻酒食, 交錯闕庭, 祈禱山川, 宮女公然往來, 搬運雜物, 廐馬疲於道路。 殿下上奉慈殿, 固知無違之道, 不能一從繩墨, 亦豈殿下之所盡知? 然而流聞於外, 竊歎者衆, 臣等如聞父母之過, 安得不盡陳於君父之前? 伏願 殿下, 體家人" 威如之吉, 反身以正", 肅淸宮闈, 如大明中天, 而群陰自消; 如正門洞開, 而曲徑自閉。 待宮妾以嚴, 臨暬御以莊, 毋啓寵而納侮, 毋以恩而掩義, 毋以私而害公。 至於戚屬姻婭之輩, 亦是人臣, 何敢私相問安, 私相獻進, 訪問宮中? 如有此弊, 擧其姓名, 言于外廷, 付諸有司, 以示公明正大之道焉。 奢麗之飾, 浸潤之言, 不但斥遠, 且加罪罰。 祈禱之風, 無益之作, 一切禁斷, 雖事係慈殿, 大則盡誠幾諫, 小則方便善處, 無俾慈殿塞淵之聖, 或蹈有過之地, 使大聖人所爲, 萬物咸覩焉。 一曰進學。 帝王爲學之道, 莫先於窮理。 窮理之要, 不外於讀書, 而讀書之法, 貴在循序而致精, 居敬而持志, 以爲修齊、治平之本焉。 惟我殿下, 聖學旣就於甘盤, 講論益篤於經幄, 經書、史冊, 無不涉獵, 宜其學造罔覺, 道積于躬, 有以窮天下事物之理, 有以盡格致、誠正之功, 有以立修齊、治平之本, 有以致中和、參贊之功, 而奈何發諸樞機, 施諸政令者, 有與經訓, 大相背悖者多也? 試以一二事言之。 書不云乎? "克謹天戒。" 何殿下, 不能盡敬天之誠, 以致天心之不豫也? 書不云乎? "若保赤子。" 何殿下, 不能盡愛民之仁, 以致邦本之日搖也? "從諫則聖", 書之訓也, 而何殿下, 拒諫、自用之至此也? "任官惟賢", 書之訓也, 而何殿下, 知人、善任之未盡也? 書曰: "克儉于家", 何殿下之昭儉、示朴, 不及於古帝王也? 書曰: "立愛惟親", 何殿下之恩義兩盡, 不及於我祖宗也? 書曰: "始于家邦", 何殿下之宮闈之嚴, 漸不如初也? 先儒曰: "未讀是書猶是人, 旣讀猶是人, 此不善讀。" 殿下之九年講學, 不幾於不善讀乎? 此無他, 殿下以聖賢相授之心法, 謂之高遠而不可學, 不探其本, 而徒事其末; 不究其旨, 而徒取其文。 開筵展讀, 不過爲一時之文具, 買櫝還珠, 了無實見之得。 加以淵默是尙, 下問是恥, 禮數嚴絶, 情意未孚, 筵臣勸講, 徒備故事。 或間日開筵, 或數月廢講, 接賢士大夫之日少, 親宮妾宦官之時多, 故心與道離, 情以私動, 淸明日去, 志氣日消, 未極義理之趣, 不擇公私之分。 迎合之言, 易以抵隙; 激成之說, 如石投水, 眩亂、逼迫之論, 日進於前; 威制、獨斷之漸, 已著於上。 喜怒之發, 不得中和之正, 而辭令之間, 率爲忿懥之歸, 宋臣朱熹所謂挾雷霆之威, 肆然於人上, 而莫之敢攖者, 不幸而近之矣。 李楘、趙絅等論罪之敎, 一下於政院, 瞻聆所及, 大小驚惶。 幸賴日月之更, 旋收風霆之威, 孰不仰大聖人所爲, 出尋常萬萬哉? 第去國之臣, 已無及矣, 敢言之士, 將離禁闥, 而請留之章, 久未蒙允, 此臺諫之所以引避, 而臣等之不能無望於庶幾改之者也。 至於儒生狂妄之擧, 本不足以介天地之量, 而停擧之罰, 又豈至尊之所宜知哉? 趙珩等旣承停擧之命, 與四館一會, 論議不一, 則當以不敢承受之意, 具由啓達, 而終無一言, 及夫聖敎之下, 始爲回啓, 固不得辭其責矣。 然而此不過新進之人, 不識朝廷事體而然, 豈有一毫違命之意哉? 天怒過激, 至有拿鞫之命, 朝侍威顔, 夕就獄吏, 抱冤囹圄, 情事未暴, 恐非用罰之中, 接下以禮之道也。 至於尹鳴殷, 以年少新進, 獨立敢言, 殿下宜嘉奬之不暇, 而反下特遞之敎。 噫! 嚴旨屢降, 氣象愁慘。 廷臣惴惴, 無樂於立朝, 正如繁霜積雪之下, 百卉具腓, 元氣蕭索, 薾然無復生意, 豈非不幸之甚哉? 伏願殿下, 大警於心, 以居敬窮理之術, 驗之於身; 人心道心之萌, 益察其幾, 擴充之如泉達而火燃; 克去之如戰勝而攻取, 使義理常明, 物欲退聽。 又頻接儒臣, 從容講磨, 酬酢論難, 至於治道之得失, 四方之利病, 亦令盡言畢陳。 君臣之間, 上下洞徹, 如家人父子之情, 而如有違理逢君, 先利病民之說, 痛加裁抑, 毋使張皇, 以尊國體, 以正治法焉。 宋臣程頤曰: "人之情易發, 而難制者, 惟怒爲甚。 第於怒時, 遽忘其怒, 而觀理之是非, 亦可見外誘之不足畏, 而於道思過半矣。" 謝良佐曰: "克己, 須從性偏難克處, 克將去。" 呂祖謙少時, 性氣粗暴, 看論語至" 躬自厚而薄責於人", 忽然覺得, 意思一時平了, 終身無此病。 更願殿下, 益加意於懲忿也。 臣等妄意, 殿下受病處, 尤在於此, 故重言複說, 而不敢避煩瀆也。
答曰: "條陳之事, 無非格言, 予當惕念而採施焉。" 因下敎曰: "玉堂恥君不賢, 憂國將亡, 寡人闕失, 民生利病, 畢陳無隱, 予用嘉歎。 其令該司, 各賜廐馬一匹, 以表予意。" 又下敎曰: "箚中所謂先朝王子, 亦有無家者, 而殿下先爲大君營宅等語, 殊極忠直。 若非此人, 幾不聞予過也。 王子君無家者, 量給買家之資, 一以施直言, 一以安予心。"
<출처 :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