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어달라 … 김포에 안장 유택 가는 길 … 아름답고 정겨운 오솔길이었으면
봄멍게에 술이 한 잔, 또 한 잔. 오랜 만에 내려온 막내딸과 마주앉아 두 볼이 발그레해진 우리 아버지 입술에 이야기꽃이 방긋 피었다. 오늘은, 트럭을 몰던 젊은 날 전라도 여수 나병환자촌에 마늘 실으러 고갯길을 넘는 중. 따라온 조수는 음료수라도 살까 하고 동네 가게에 들어갔다가 얼굴 반이 허물어져 내리는 주인을 보고 기겁해서 뛰쳐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갑 낀 손 죄인처럼 내밀고는 삶은 감자 건네던 동네 사람들 틈에 껴 두 알 세 알, 같이 우걱대니 귀 없고 코 없는 그네들이 참 좋아했다던 50년이 더 지난 이야기. “문둥이라꼬 하도 사램겉잖게들 본께, 사램 대우만 해줘도 그리 좋다쿠더라. 정이 고파 그란 거 아이겠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김포 장릉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들풀이 무성한 사잇길마다 줄줄이 늘어선 누군가들의 묘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낮은 봉분에 비석 하나가 전부. <시인한하운태명지묘> 문둥이 시인 한하운과 몸이 성했을 때의 이름 한태명, 분열된 그의 삶을 담아내듯 두 개의 이름이 묘비에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문둥이지만 문둥이가 아니(한하운,「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 절규하는 한 맺힌 설움이, 제 입으로 자신을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하늘과 땅에 잘못 돋아난 버섯(한하운,「나」)’이라 세상에서 내쳐진 자가 내지르는, 어찌할 수 없는 자기부정의 메아리가 웅웅거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내가 없어져야(한하운,「나의 슬픈 반생기」)”했던 그는 맏상제이면서도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여러 날 홀로 숲을 헤매다 정신을 잃은 그를 깨운 건 서늘한 밤이슬. 그날의 눈물겨운 새벽바람이 내 마음에도 부는데, 퇴근길에 들린 이곳은 더디 지는 여름 해가 아직도 더웁다. 무덤가에는 하얀 계란꽃과 진분홍 들꽃이 잔뜩 피어 살랑거린다. 비석의 뒷면에는 대표작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첫 구절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는 그가 김포에 잠든 이유를 알게 한다. 한하운의 고향은 ‘꽃 청산/어린 때 그리’운, 함경남도 함주.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 담긴 아름다운 곳이고, 끝내 돌아갈 수 없던 아린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유언은, 얇은 강줄기 사이에 두고 남북이 가장 가까이서 마주보는 김포에서 지켜졌다. 여기 누운 그는 어느 밤, 나날이 뭉개지는 눈, 코, 입, 이미 뭉툭해진 손으로 가리우고 어둠 속에 홀로 서서 ‘인환(人癏)의 거리/인간사 그리워’ 보릿잎 꺾어들고 마을이 보이는 골짜기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따스한 불빛과 된장찌개 바글거리는 냄새, 가족들 둘러앉아 숟가락 밥그릇 달그락거리며 저녁 먹는 소리에 서러움 한 사발 혼자 울컥 삼키고는 침묵의 숲길, 거친 돌길로 발길 돌리어 ‘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울음처럼 홀로 보리피리를 불었으리. 피―ㄹ 닐니리, . 피-ㄹ.. 닐..니리. “그 사램도 정이 고파 그란 거 아이었겠나…….” 시인 한하운이 잠든 장릉 공원묘지 가는 길은, 그가 버텨낸 삶의 결처럼 거칠고 메말랐다. 낮은 샌들을 신었는데도 가파른 오르막과 모난 돌부리에 발목을 조금 다쳤다. 쉴 겸, 주저앉아 지는 해를 보며 생각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모든 생명을 품는 아름답고 정스러운 오솔길이었으면 좋겠다. 설레는 연인이 폼나는 구두로 멋내고 걸어도 눈물 찔끔 안 나고, 걸음마하는 꼬마가 넘어져도 안전하고, 어르신들 약한 뼈마디에 무리가 없었으면 좋겠다. 유모차도 휠체어도 부드럽게 오를 수 있고, 술에 젖어 휘청이는 그이에게도 관대했으면 좋겠다. 해가 지면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신혼부부가 행복하게 웃으며 밤마실을 나오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그 길에선 마음 시퍼렇게 멍든 이가 걸음걸음 눈물방울 후두둑 떨구며 밤새 걸어도 좋겠다. 그의 무덤가에는 청춘들의 푸른 넋두리가 새벽까지 이어졌으면 좋겠고, 직장상사 흉을 보고 떠난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에 좀 있다가는 그 상사들이 와서 요즘 젊은 것들 일은 안 하고 놀 생각만 한다고 투덜대다 가면 좋겠다. 한하운 시집을 든 문학소녀가 그의 무덤가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 어느 문학소년은 소녀의 날리는 머릿결을 보고 심장이 두근거렸으면 좋겠고, 욕쟁이 할머니의 시낭송이 흘렀으면 좋겠다. 그 길에선 누구나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한하운,「여인(女人)」)’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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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어릴 적 만화가게에서 본, '김민'이라는 만화가가 한하운 시인을 주인공으로 그린 만화. 이때 처음 알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