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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식의 이제의
지난 글은 '업'에서 출발하여 '연기'를 설명했다. 이번 글은 '연기'에서 '업'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즉 실상의 이제의에서 인식의 이제의를 다룬다는 뜻이다.
이 글 이후에 적을 글은 다시 '업'에서 '연기'로 돌아갈 것임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옳다. 다만 '연기'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업'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실상은 인식의 면을 표면에 내세우면 업(과 업보)이며 전체적 성립의 면을 내세우면 연기이기 때문이다.
중론을 공부하다 보면 실상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느낌이 들고, 유심론을 공부하다 보면 인식에 무게중심이 가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불교를 이해하려 한다면 항상 중도를 기억해야 하며 무게중심의 편중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인식의 이제의를 말하려면 다시 '관조'라는 기법을 예로 들어야 한다.(불교는 종교이다.)
'관조'기법은 요가의 기법 중 하나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는 기법이다. 즉 관조라는 기법의 끝에 이르게 되면 일체의 경계가 사라지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특이한 점은, 길을 걷는 중에 일체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엑스타시상태로 돌입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걸어가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일체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에도 의식을 일으키려면 의식을 일으킬 수가 있다.
즉 일체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가운데에도 의식은 존재하는 것이다.
일체의 경계가 사라진 경우는 바로 '무'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없음의 연기'인 것이다.
그런데 의식을 일으키려고 하면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은 분명 의식이 있긴 있다는 뜻이다.
'의식-이 세계의 없음'이 연기로 성립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위에서 아라한의 업(과 업보)를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라한은 없음에서 없음으로 넘어가는 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있음과 없음 모두 이며, 있음과 없음 모두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있음과 없음 모두 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에 있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그 사람은 그냥 평범하게 길을 걸어가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결국 '의식-현상계'라는 연기임을 알 수 있다.
즉 '의식-현상계 있음', '의식-현상계 없음'이 동시에 성립한다(화엄철학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게 된다).
인식의 이제의로 검토했을 때, 현상계에 있어서 진속원융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제 인식의 이제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됨을 알 수 있다.
'의식 - 속제'의 연기 : 업과 업보
'의식 - 진제'의 연기 : 업과 업보
그리고 속제와 진제는 하등 다르지 않고 '바로 여기(진속원융)' 임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세속의 진리(방편)와 참진리라는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식 - 공'의 연기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언제나 제 자리'인 것이다.
방편의 의미는 바로 중도임을 알 수 있다. 법과 비법의 중도가 방편인 것이다. 방편은 진리의 자기부정이며 중도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진리의 멈추지 않음 즉 진리에 대한 자성적 사고를 지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논증은 중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바로 이러할 때에만 진리가 온전하기 때문이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주 불교를 가지고 말장난을 만드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러한 말장난 중 하나가 '나는 진리도 부정된다고 생각한다(혹은 나는 중도조차도 부정된다고 생각한다)'라고 겉멋을 부리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면 진리라는 말 자체를 안하면 그만이다. 진리라는 말이 있다면 진리는 있는 것이다. 적어도 불교에서는 그러하다.
실상의 이제의에서는 '있음'과 '없음'의 교차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어느 정도 '있음'과 '없음' 사이에 차별상을 인정할 수 있었지만), 인식의 이제의에 들어오면 '있음'과 '없음'의 교차를 보게 된다. 심지어 인식의 이제의에서는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성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식의 이제의에 와서야 비로소 '연기'라는 것 조차도 '공'하다는 것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의 이제의 즉 유심론의 이러한 특징이 화엄의 총체성을 설명하는데 보다 용이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의식'이라는 자성이 남아 있다. 이 점이 또한 유심론으로 화엄의 총체성을 설명하는데 한계로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인식의 이제의는 다시 실상의 이제의로 넘어가야만 한다. 바로 인식과 존재 사이에 또 중도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화엄의 총체성이 온전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이번 글 이후에 다루어야 할 내용이다.(아마 적지는 않게 될 것이다...)
화엄으로 갈 때에야 비로소 일체의 자성적 사고를 벗어던지고, '공(=연기=업과 업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현상계
불교에서 무엇을 현상계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감지된 바로 이 세계?
...
불교에서 말하는 현상계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화엄철학까지 이해하여야 한다. 매번 무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 화엄철학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러하기도 하지만, '안다'하는 생각으로 멈추지 말도록 권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멈추는 순간, '진리'는 사라져 버린다. 멈추는 순간부터 '지혜'가 '어리석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끝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될 뿐이다. 그 순간까지는 지혜는 멈춰 서 있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의식-공'의 연기라는 말을 하였다. 물론 이때 의식이 있으므로 이는 '업'이라는 개념이 표면에 나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현상계에 대한 설명이 바로 업을 드러내는 것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식-공'은 (관조라는 기법을 통해 이해하였듯) 의식은 '현상계의 있음의 면(유전연기)'과 '현상계의 없음의 면(환멸연기)'과 동시에 연기로 성립할 수 있다는 의미임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의식-공'이라는 연기가 가능한지 이론적으로 살펴보자.
'의식-유'와 '의식-무'의 동시성립이 가능한 이유는 '의식'이 중첩적으로 연기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유-의식-무'의 연기(진속원융)인 것이다.
이미 위에서 지적하였듯 중생은 '무'의 면을 외면하고 아라한은 '유'의 면을 외면한다. 즉 중생은 '유'에 집착하고 아라한은 '무'에 집착한다. 그래서 중생은 업을 지어 윤회하고 아라한도 업을 지어 윤회한다. 다만 원칙적으로 아라한은 '유'로 윤회를 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중생과 아라한은 집착의 대상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집착하고 있음에는 차이가 없다. 양쪽 다 중도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유-의식-무'라는 연기인데, 왜 어느 한쪽만을 의식하는가?
'유-의식-무'의 연기라는 말은 실상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중생은 실상을 '의식-유'의 연기로 파악하고 아라한은 '의식-무'라고 파악할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물론 그렇게 조건지어지는 업(=연기)을 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을 하게 되면 현상계 역시 그렇제 조건지어지는 업(=연기)이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부정해 버리게 되니 곤란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설명을 하게 되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적을 내용은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하여 수행하는 사람에게 그다지 필요한 지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은 불교라는 종교와는 무관한 지적인 작업일 뿐인가?
그렇지도 않다.
?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럼 무엇인가?
위에서 수행(요가)과 지식(지혜) 중 어느 것을 더 강조하고 중요하다고 보는가는 각 종교 혹은 각 학파마다 의견이 갈리고 있다고 한 기억이 날 것이다. 이는 불교 내부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 수행과 지식 모두 중요하다. 지식은 사실 수행이기도 하며, 수행은 사실 지식이기도 하다(관조라는 기법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중도'이기 때문이다.
다만 각 종파마다 더 중요성을 두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예로 '아상가(무착)'이라는 분은 지식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지금 할 서술 역시 아상가와 바수반두(세친)로 부터 출발하는 유식학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제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한 쪽만을 보게 되는지를 설명해 보자.(뭐 사실 아는 게 없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너무 짧으면 '폼'이 안나서 길게 끈다고 애 먹었음을 고백한다. 하하하)
이는 소위 '마나스'의 작용이다. 마나스라는 말이 어려우니 그냥 앞으로는 '잠재의식'이라고 하기로 한다.
아라한은 '있음의 현상계'를 윤회하면서 수행을 통해 '없음의 현상계'에서 윤회하게 되었으므로 양쪽이 다 있음을 알 것이다. 하지만 마나스에 의해 '있음의 현상계'는 외면되고 있으며 '없음의 현상계'에 집착하여 '없음의 현상계'를 고집하는 업을 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생은 어떨까? 중생은 '없음의 현상계'에 무지한 상태인가?
그렇지 않다.
중생 역시 없음의 현상계를 알고 있다.
여기서 또 다른 의식이 하나 나온다. 바로 알라야식(아뢰야식)이다.
중생의 알라야식은 '없음의 현상계'를 알고 있다. 하지만 중생의 의식은 잠재의식의 작용에 의해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의식이라고만 해 온 것은 사실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까지 거론한 것은 세개 즉 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알라야식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또 없는가? 있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촉식) 이다. 각각은 순서대로 눈, 귀, 코, 입, 몸(촉각)이라는 감각기관에 의존한다. 의존한다는 것은 조건지어져 있다는 말이고 조건지어져 있다는 것은 연기임은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알라야식은 무엇을 감각기관으로 하고 있을까? 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알라야식은 감각기관이 없는가? 즉 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알라야식은 연기하는 감각기관이 없이 바로 현상계와 연기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의식과 잠재의식 그리고 알라야식의 감각기관이 있으며, 그 감각기관을 '마음'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마음'은 눈, 귀 코등과 같은 감각기관이다.
이상에서 거론된 8가지를 8식이라고 한다. 종파에 따라서는 9식을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고, 사실 더 많아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오온에서 '온'이란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쉽게 생각하면 '온'은 집합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오온 즉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은 각각이 하나의 집합이다. 식온은 '식'이라는 '집합'이라는 뜻이다.
(오온의 이해는 아주 어려운 것이다. 상좌불교를 공부할 때 철저히 하는 것이 좋다. 보통 추상적 원리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오온을 그냥 훑어 보고 지나가게 되는데(사실 내가 그랬다), 그렇게 하고 나면 이후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찰나적 존재인 '나'라는 것이 어떻게 윤회하는가는 12연기에 잘 나와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여기의 주제는 아니니 생략한다. 상좌불교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이후에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니, 불교공부를 하려면 반드시 상좌불교의 기초개념을 숙지해야 한다. 화엄까지 이해하는데 있어 상좌불교를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 이제 다시 현상계의 설명으로 돌아가자. 먼저 아라한에 있어 현상계는 '무'만이 흘러가므로 별로 이야기 할 것이 없다. 그러니 아래에서는 중생의 현상계만 살펴 보도록 한다(중생에 대한 설명이 아라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따라서 아래에서 현상계라 하면 별다른 표시를 하지 않는 한 '있음의 현상계'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위에서 왜 우리가 '있음'만을 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통의 세계를 가지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
우리는 공통의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
?
이상한가?
하지만 불교에 따르면 확실히 그러하다. 이는 불교가 '연기'라는 것으로 현상계를 설명하는데, 연기는 위에서 보았듯 인식론과 존재론 모두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인식과 존재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인식을 고찰하게 되면 결코 같은 현상계에서 살 수가 없다. 이는 모두가 동일한 업을 지니지 않는 것만을 생각해 보아도 당연한 말이다. 연기의 내부로 들어가서 인식을 고찰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업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현상계는 '업'이다. 그래서 모두 서로 다른 현상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서로 공통된 현상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까?
분명 이 현상계는 객관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현상계에서 살고 있다고 하면 궤변을 말하는 것 같다.
현상계...
불교의 현상계는 우리가 바라 보는 이 세계만이 아니다.
그것은 '있음' 과 '없음' 이 함께 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관념이나 느낌등까지 포함하는 세계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느낌이나 관념을 가지고 살아 가는가?
누구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통된 현상계에 살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 교육이란 결국 소위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이 동일할 수 있도록 연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연기는 고정불변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업'이다.
있음과 없음에 관점에서 본다면 매 순간 전체 현상계는 찰나적으로 명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한 것을 감지한다.
예로 뜰앞에 있는 나무를 보면 누구나 그 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바로 '식'이 동일하게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눈'이 있다. 그래서 '안식'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안식'은 모두 동일하게 우리가 가시광선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감지하도록 조건지어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관념이나 느낌등을 모두 고려하면 분명 우리는 서로 다른 현상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무'는 분명 그곳에 있기에 우리가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공유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명 주관적인 인식과 무관한 그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즉 주관적 인식의 공유에 의해 객관적 인식이 됨으로 인한 객관적 존재의 실재에 대한 의문이다.
그렇다.
개개인의 인식과 무관하게 나무는 있다.
?
개개인의 인식과 무관하게 나무가 있다면 연기가 틀렸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연기하기에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만약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현상계에서 일체 중생이 사라져 버리면 '있음의 현상계'는 어떻게 되는가? 설마 없어져 버린단 말인가?
여기서 다시 '불교는 종교'라는 점을 말하게 된다. 불교는 종교이므로 도대체 그러한 경우에 현상계는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의미가 전혀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굳이 밝히려 한다면(사실 화엄의 이해에 필요하기도 하다), '의식-공'이라는 연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의식-공'에서 '공'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에서 설명한 현상계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공'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
'공'은 곧 연기이다.
'의식-공'이라는 연기는 '의식-연기'라는 연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연기 속에 연기가 있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의식이 사라져도 현상계는 바로 연기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즉 반야까지는) 만물은 언제나 제 자리인 것이다.
결국 위에서 적은 것들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나올 수 없는 질문들이었던 것이다.
너와 나의 몸은 동일하게 조건지어져 있으며 동일하게 조건지어진 만큼 객관을 구성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업이다.
바로 동일한 현상계에 놓여 있는 그 자체에서 나오는 업인 것이다.
현상계의 개개인에게 업이란 우주적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알라야식이다. 알라야식은 만물이 모두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너와 나의 알라야식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부분이 동일하다. 그리고 그 동일한 부분만큼의 우주를 공유한다.
연기속에 시간과 공간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계'라고 한다.
우리는 동일한 현상계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동일한 법계에 살고 있기도 한데, 그것은 우리의 업이 그 부분만큼 동일하기 때문이다.
법계란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인 것이다 !
법계란 바로 우리의 여섯가지 감각기관(눈, 귀, 코, 입, 몸, 마음)인 것이다 !
우리는 그만큼 동일하게 조건지어져 있으며 그만큼 동일한 연기를 공유하면서 흘러간다.
쉬지않고 흘러간다.
'제행은 무상하다 !'
5. 주절주절
음... 생각했던 것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나서 다 적을 수가 없다. 머리가 점점 나빠져서 그런가 보다. 이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기억이 나면 그 부분을 보강하여 적되 파란색으로 적기로 한다. 뭐 사실 기억이 나도 안적을 수가 많겠지만... 하핫
불교공부를 할 때는 불교에 머리를 맞추어야한다. 즉 자신의 주관적인 선호등은 배제되는 것이 좋다.
물론 어느 분야를 공부하더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불교는 그러한 점에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불교공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로는 도저히 끼워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지 때문이다.
...
흠... 마지막 말에 적을 부분도 기억이 안나는군... 또 다시 게으름이 나를 장악하고 있구만...
요즘 일이 많아서 피곤해 그런가 보다... 하핫
어쨌건 대충은 마무리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이제 한단계만 더 가면 되는 데 위에서 언급하였듯 화엄철학이다. '화엄-반야를 넘어...'를 제목으로 하면 적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공부를 하면서 모호한 말은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불교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적어도 모호한데, 사용하는 표현조차 모호하면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만큼 그 사람은 모르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모호한 표현이 이 글에도 많은가?
다시 읽어 보기 귀찮을 정도로 양이 많구만...
푸헐
중언부언한 부분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몇 일에 걸쳐 내킬 때 마다 조금씩 조금씩 쓰다보니 이 글을 쓴 나도 어떤 내용들을 적었는지 잘 모르겠구만...
헐헐
혹 중언부언한 부분이 있다면 반복학습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첫댓글 너무 꼭꼭 숨어 있어서 제가 공부하는 김에 올리는 것이니
많이 올린다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찾기 쉬워서 좋죠.. 뭐
회원이 적어 조회수가 안올라가니까, 글 올리는 분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