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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맹자반 봄 야외수업 융건릉.용주사 탐방기
2014.4.25
강남 논어반과 맹자반 학생 43명이 봄 야외수업에 참가하였다. 올해는 유난히 날씨가 일찍 더워 매년 5월 하순에 하던 야외수업을 한달 앞당겼다. 버스를 타고 가던 행사를 취소하고 수도권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으로 수원 화성에 있는 융.건릉과 용주사를 택했다. 조선왕조 역대 왕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군주인 정조대왕과 그의 생부 사도세자 장조의 왕릉이 있는 곳이다. 필자는 이곳을 몇차레 탐방과 견문기를 남긴 곳이기에 감히 추천하였는데 과연 어떠하였는지? 전국민이 진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수백명의 사망과 실종으로 비통에 빠진 때라 계획을 진행해도 될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단순한 소풍이 아니라 야외수업이고 유적지 탐방이니만큼 무방하리라 믿었다. 예약한 식당에서도 혹시 취소할까 몇번이나 확인전화까지 왔다.
예전에 기록한 탐방기를 바탕으로 해설사의 추가된 내용을 보충하여 수업 기록으로 남길까 한다. 11시 정각에 융,건릉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전에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는 교통편을 설명하고 홈페이지 공지사항에도 자세히 남겼지만 역시 대중교통이란 일사분란하지가 않다. 전원이 다 모인 것은 예정시간보다 10여분이 지나서- 미리 예약한 문화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 다. 먼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에 대한 설명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09년)된 조선왕릉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무덤으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왕릉은 조선시대의 27대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 44기(基)에 이른다. 44기 중 40기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한 왕조가 지속된 사례도 드문데다가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도 유례가 드물다. 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공간으 로서 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하다. 조선왕과 왕비의 무덤 44기 중 가운데 북한 지역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융.건릉(隆.健陵)
융릉(隆健陵)/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이 시간이 갈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임금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결국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뒤주에 가두라"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의 기록이다. 마침내 세자는 폐세인이 되고 뒤주에 갇히어 8일만에 이 세상을 떠났다.
장조(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프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세자빈으로 책 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 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사도세자가 장조 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융릉의 연혁을 살펴본다.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 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 불렀다.1816년(순조 16)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81세 승하)와 합장하였다. 1899년(광무3)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높이게 되었다.
원대황교(元大皇橋) 마음을 정제하는 명당수 금천(禁川)을 지나는 금천교인 원대황교-원래 금천교가 있는 곳인데 수원비행장이 생기면서 철거되는 대황교를 1969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청나라를 事大 할때라 萬, 皇字는 사용을 극히 피했으나 정조대에 들어 금기를 깨고 많이 사용 한 흔적이 보인다.
곤신지(坤申池) 입구에서 해설사를 만나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홍살문이 나온다. 좌측으로 여의주를 상징하는 둥근 못 "곤신지"가 있었다. 왕릉에서는 보기 힘든 원형 연못이 특징이다. 곤신방이란 남서방향으로 풍수지리의 원칙에 맞춰 조경되었다고 한다.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자각과 능침의 배열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데 이곳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홍살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능 봉분이 보일 수 있게 설계되었다.정자각은 제물을 차리는 곳이며 좌측에 수라간 반대쪽에 비각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 만든 참도 (參道)는 매우 넓고 무반쪽이 문반보다 더 넓은게 특징이다.
아름답게 조각된 병풍석,곡장,석물 융릉의 봉분은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특별히 입장을 원하는 경우 노란 쪼끼를 입고 입장할 수 있다. 합장묘인 융릉의 봉분 아랫부분은 12지신상 대신 목단과 연꽃 문양이 양각된 12면의 병풍석이 감싸고 있다. 난간석은 없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다. 석물로는 상석 1좌, 망주석 1쌍,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1쌍, 문인석 1쌍, 팔각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배치되었다.봉분의 인석 위 연꽃봉우리 석물 등 그 어느 능보다도 화려하고 정성을 들인 흔적을 볼 수 있다.
건릉(健陵)/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시간이 되지 않아 정조대왕의 능인 건릉은 참배를 생략하였지만 아래에 개략적인 능 소개를 한다. 정조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둘째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즉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 을 다 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썼다. 효의왕후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빈에 책정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지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의 초기 무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부친 사도세자의 능의 발치인 '강무당 터 초장지'에 있 었으나 1821년 현재 위치로 천장되었다.
건릉은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부모의 능침인 융릉이 화려한 병풍석만 있고 난간석이 없는 것과 대조적이다. 문무석인의 조각이 사실적인 점이 눈에 띈다. 건릉 주위에는 참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25만평이나 되는 융건릉 숲길산책은 걷기 코스로 아주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화산 송충이에 얽힌 설화
정조가 1789년에 아버지의 능을 조성하고 해마다 능행을 했는데 어느해 송충이가 워낙 많아 퇴 치 방법을 생각중에 신하보고 송충이 우두머리를 잡아 오라고 하니, 신하가 어느것이 우두머리 인지 몰라 제일 큰 놈을 잡아 대령하니 송충이를 보고 정조 왈, " 너희가 이토록 버릇이 없느냐" 하며 이빨로 콱 물었더니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바람이 불어와 소나무에 붙어 있던 송 충이가 모두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가 있다고. 또 다른 설은 실록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능행을 하면서 주민들을 모우라고 하고는 송충이 박멸 지시를 내리는데 송충이 한 바가지 잡으면 1푼, 두 바가지 잡으면 2푼을 준다고 하니 어렵던 시절 백성들이 좋아라 송충이를 잡았는데 그것을 가마니에 모우니 작은 산만 하였단다. 죽이는 것도 아무렇게나 할 수 없어 왕에게 "불에 태워죽일까요, 땅에 묻을 까요" 물으니 정조께서는 미물도 생명이라 마음에 걸려 바다에 수장을 하면 바다의 기어 다니는 생물로 다시 태어날지 모르니 바 다에 넣어라 하시어 지금의 제부도 앞바다에 수장하였다고 전한다.
시간이 모자라 정조대왕의 능과 산책로 코스를 생략하고 바로 예약한 식당으로 갔다. 인근에 대식구가 식사할만한 곳이 없어 사전 답사중 이곳 "24시해장국"집으로 선정하였다. 오후 용주사 답사 스케쥴이 있으니 바쁘다. 메뉴를 단일화하여 신속히 대처하였다. 맛여행이 아니니 양해해주리라 믿고--
원대황교 문화해설사의 융간릉에 대한 자세한 설명 곤신지 홍살문,정자각,뒤로 비스듬히 왕릉이 보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가는 참도에는 궁궐처럼 박석이 깔려 있다.
정자각 정자각과 내부
정자각 오르는 계단의 아름다운 구름무늬/능 봉분 주위에는 비공개 출입금지 팻말이~ 출입이 금지되어 예전에 찍은 아래 사진으로 대치한다. 융릉의 봉분,병풍석,곡장,석물들
석물 석등 / 무인석 문인석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돌려 세운 돌(병풍석)에 십이신의 모양을 조각,또 십이신 글자를 연꽃 봉우리에 넣었다.
장조의황제 융릉, 현경의황후 부좌 : 비석의 글씨는 고종황제의 친필(전서체)이라고 한다. 용주사에 도착하니 1시 30분. 원래 2시부터 해설사를 부탁해 놓았는데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융건릉의 여자 해설사가 똑똑한 음성으로 융건릉의 조성과 당시의 역사배경 그리고 설화까지 상세한 해설을 해준데 반해 이곳 용주사에서는 나이 듬직한 남자 해설사가 구수하고도 재미있게 사찰의 건축물과 정조의 효행에 관한 설명까지 제대로 해설을 맡아 주었다.
용주사(龍珠寺)
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갈양사로 창건된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대왕께서 보경스님으로부 터 부모님의 넓고 높은 은혜를 설명한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아버지 사도세 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790년 용주사를 세웠다. 보경스님을 전국 8도도화주로 임명하고 정조대왕의 지원과 백성들의 정성스런 시주로 7개월만에 용주사를 건립하고 비명에 간 아버 지 사도세자의 극랑왕생을 발원하였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밤 정조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 용주사는 또한 정조대왕의 효심을 계승하기 위해 효행교육원을 설 립, 운영을 통해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용주사 건립은 성리학이 성했던 조선후기에 불교는 전혀 발을 부치지 못하던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으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정조의 효심으로 발원된 사찰이므로 효찰대본산으로 불린다. 사천왕문으로부터 용주사 탐방이 시작되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일주문,금강문이 없고 홍살문과 궁궐 양식의 삼문이 있다. 좌우에 7칸의 행랑이 이어져 있다.
*대웅전(大雄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설명 대웅이란 석가모니불을 말하는 것으로 대웅이 들어가면 석가모니를 모시는 절이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은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협시보살로 문수보살,보현보살릉 모시고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 세분 즉 석가모니물,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을 모시는 경우에 대웅보전이라 한다.
사천왕문(四天王門)-불법을 보호하고 악귀의 출입을 막아 사찰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국천왕,광목천왕,증장천왕,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홍살문-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인 용주사는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능침 사찰이다. 왕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홍살문을 세웠다.
효행박물관- 일반 사찰에서는 성보박물관이 있지만 효찰답게 효행박물관이 홍살문 좌측에 자리한다. 정조대왕이 기증한 부모은중경을 비롯,보물 제1095호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 용주사가 소장하고 있는 격조높은 문화 재를 전시하고 있다.
삼문(三門)-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양식이다. 좌우에 7칸의 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른다. 기둥에 각각 "龍.珠.寺.佛"로 시작되는 주련이 걸려 있다. 문루에 龍珠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竹濃 안순환의 글씨이다.
천보루(天保樓)와 5층석탑 경기도 문화재 제36호. 1790년 창건 당시 지어진 정면 5칸,측면 3칸의 2층누각이다. 목조기둥 아래에는 석조기둥과 같은 높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이는 궁궐건축과 유사하다. 보통의 누마루는 좁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데 반해 이곳 천보루는 출입구가 넓고 팔각 돌 기둥이 큰 것이 특징이다. 5층 석탑에는 부처님의 사리 2과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1790년 창건 당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 불,아미타불을 모신 아름다운 전각이다. 특히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삼세여래후불탱화는 조선 중기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귀중한 성보이다. 초등학교 5학년 국어교과서에 김홍도가 그린 용주사 탱화가 올라 있다. 한편 단원 김홍도의 낙관이 없고 그의 작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설과 제자 화원들의 작품이라 는 설 등 다양하게 화제에 오르고 있다. 이 탱화는 최초로 북경에서 배워온 서양기법 즉 음영법, 원근법 그리고 색채법이 적용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천불전(千佛殿)-천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법 화경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모시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석가모니불을 모신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칠성과 산신,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삼성 각의 다른 이름이다. 시방이란 동서남북 그리고 그 사이 네방향과 상하 모두 열개의 방향을 의미 한다. 중앙에 칠성탱화,우측에 독성탱화,좌측에 산신탱화를 모신다. 칠성신앙은 중국 도교에서 유래되었는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장전(地藏殿) 지장전(地藏殿),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이라고 일컫는다.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 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 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시왕중 제1 진광대왕, 제2 초강대왕, 제3 송제대왕, 제4 오관대왕, 제5 염라대왕, 제6 변성대왕, 제7 태산대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각 7대왕이 심판을 맡으며 그 뒤 백일에는 제8 평등대왕, 소상 때는 제9 도시대왕, 대상 때는 제10 오도전륜대왕이 차례로 생전에 지은 선업과 악업 등 잘잘못을 심판한다고 한다.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셨다. 1905 한일 을사늑약이후 1907년 고종이 폐위되면서 제향도 중단, 해반후 다시 제향을 한다고 한다. 그전에는 하루에 6번의 제례를 드렸다고 한다. 여기 승려는 일반 부역(종이제조, 두부제조)을 면제받을 뿐만 아니라 월급까지 받았다고--
불설부모은증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은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고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제시한 경전으로 조선시대에 널리 간행되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된 불설부모은중경판은 목판, 동판, 석판의 3종류가 있다. 목판은 용주사가 창건되고 정조가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 여 정조의 지시에 의해 1796년 제작하여 용주사에 하사되었다. 동판과 석판은 순조2년(1802)에 용주사로 하사되었다. 목판은 변상도(變相圖), 한문판, 한글판으로 되어 있고 석판은 한문판, 동판은 변상도이다. 변상도(變相圖)는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인데, 당시 도화서 최고 의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부모은중경, 열가지 효행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십대은은 ①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 주는 은혜[懷耽守護恩], ② 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어머 니 은혜[臨産受苦恩], ③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生子忘憂恩], ④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아 먹이는 은혜[咽苦甘恩], ⑤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廻乾就濕恩], ⑥ 젖을 먹여서 기르는 은혜[乳哺養育恩], ⑦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洗濁不淨恩], ⑧ 먼 길을 떠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遠行憶念恩], ⑨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짓는 은혜[爲造惡業恩], ⑩ 끝까지 불쌍 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은혜[究意憐愍恩] 등이다.
범종각(梵鐘閣)-국보 제 120호로 지정된 고려초기의 범종이다. 범종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삼존불과 비천상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음각이 특징이며 용,연뢰와 연봉이 사방 네곳에 9개의 꽃봉우리로 장식되고 종치는 자리가 네군데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 4대범종의 하나이다.
법고각(法鼓閣)-대웅보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안에는 법고가 있으며 축생들을 위해 울 리는 사물(四物) 중 하나이다.
전강대종사사리탑(田岡大宗師 舍利塔) 전강큰스님은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어 불조의 혜명을 밝히신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다.2005년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사대부중의 뜻을 모아 수행과 위덕을 기리는 사리탑을 조성했다.
해설사로부터 용주사 건립에서 부터 효행의 기본도량 효찰대본산으로서의 용주사 등 상세한 해설을 1시간 가량 듣고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쳤다. 대웅보전 앞 계단에서 단체사진으로 출석 부를 대신했다. 봄 야외수업으로 진행된 융건릉 그리고 용주사, 모두 위대한 성군으로 숭상받는 정조대왕과 직접 관련된 곳이라 더욱 뜻깊고 보람있는 수업이었다.
사천왕문
사천왕상은 대웅전을 향하여 칼을 들고 있는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과 당(幢)과 탑을 들고 있는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비파를 들고 있는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과 용과 보주를 들고 있는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등이 있다.
到此門來 : 이 문을 들어오는 사람 莫存知解 : 알음알이(헛된 망상)를 피우지 말라.
용주사에도 홍살문이 있다는 것이 다른 사찰과 다르다. 홍살문 앞에서 해설사를 만나다. 용주사 삼문(三門)
용주사 삼문(三門) 기둥의 주련/우측부터 용으로 시작,용-주-사-불의 네기둥 주련을 풀어본다. 龍 蟠 華 雲 : 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珠 得 造 化 :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寺 門 法 禪 :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고 佛 下 濟 衆 :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제도 하도다.
삼문 대문 위에 걸린 龍珠寺 현판/죽농(竹濃) 안순환의 글씨이다. 천보루와 5층석탑
(3) (2) (1)
(6) (5) (4) 천보루 기둥의 주련 (1)自笑一聲天地驚 스스로 웃는 웃음 한마디에 천지가 놀라고 (2)孤輪獨照江山靜 외로운 달 홀로 비추니 강산이 고요하다. (3)心得同時祖宗旨 마음과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얻으니 (4)傳持祖印壬午歲 조사의 인가 전하고 간직하니 때는 임오년 (5)叢木房中待釋迦 총림숲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기다리니 (6)眞歸祖師在雪山 진귀조사(문수보살)는 설산에 계시네 대웅보전 대웅보전/중앙이 석가모니불,좌측이 아미타불,우측이 약사여래불 /탱화는 김홍도 주관 25인의 작품으로 전해짐. 천불전
천의를 휘날리며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 범종각/비천상과 삼존불이 음각으로 조각된 국보 제120호 고려초기의 범종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삼존상 - 옷자락이 가볍게 휘날리고 있다 시방칠등각 호성전 호성전에 모셔진 위패/사도세자 장조와 혜경궁홍씨 그리고 정조와 효의황후의 위패이다. 지장전에는 지장보살과 열명의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 곳이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 고려때 세운 불탑으로 동남아 형태이며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원본이 있다. 서예가 김충현의 글씨 부모은중경 부모은중경에 대한 해설 전강영신대종사 사리탑 단체사진 출석부를 대신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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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찍 올리셨네요. 해설사 말씀 들은것 기억하며 잘 보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여요.
역시 카페에 글 올리기 대표께서 댓글도 가장 먼저시네요.
카페지기로서 너무 소홀한 것을 늘 미안해 하던터라 이번 탐방기는 서둘렀십니다.
역시 회장님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정리해서빨리 카페에 올리셨서니 말임니다 수고했습니다
예전에 다녀온 글이 있어서 조금은 수월했습니다.카페 활성화의 공헌자이라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관 하느라 수고 많이 하셨소.
이상하게 야외수업의 책임을 맡아 은근히 신경이 많이 쓰이네요.애쓰고 욕 먹을까봐~~큰 하자는 없었지요?
모든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빈틈없이 챙기는 그 마음씨에 늘 놀랍니다.
사진 올리기에 나는 결국 실패했는데 귀하는 멋진 현장사진과 훌륭한 편집솜씨까지 보여주시네요.
우보의 글만 읽어도 기분좋은 여행이 되는데 사진이야 없어도 무슨 상관이리요.귀하의 글로 야외수업의 격이 한단계 오른 느낌.
공부 한번 제대로 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길고 지루한 내용이라~.단지 총정리하는 기분으로 옛날 기록과 이날 해설사 얘기까지 보태다보니 꽤나 길어져버렸어요.
우와~ 김수철 선생님 여행 동호회 만들면 첫번째 회원으로 등록하고 싶네요. 여행지 선정부터 탐방기까지~ 전 과정이 완벽하십니다! 박수!!!
아이고~부끄럽네요. 웬 비행기를 띄우십니까? 국내여행은 여러팀에서 반복 다니다 보면 전에 썼던 여행기가 큰 도움이 됩니다. 자꾸 게을러지고 귀찮아져서 생략하는 것도 많아지고--내일은 우리 논어반에서 갔던 전주 한옥마을,그리고 완주의 송광사, 욕심을 내서 한군데 더 김제 금산사 세곳을 목적지로 24명이 아침 일찍 떠납니다. 이곳 여행기는 또 논어반 여행기를 참고가 되겠지요.
여러말 할것 없고 미전 여러모로 너무너무 수고 많았습니다. 가을에는 금산사 쪽으로... 어떻습니까?
감사합니다.원칙이 봄에는 장거리,가을에는 근교입니다.왜냐하면 가을은 해가 짧아서~허지만 올해 봄은 봄야외수업이 갑자기 당겨지는 바람에 버스대절이 어려워 근교로 바뀐 겁니다.그리고 인원이 늘어서 버스 한대로는 불가하게 되어 걱정입니다.선생님과 상의 연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