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국악특강 노래의 향기에 김영기입니다.
오늘도 정경태 선생님 편입니다.
우선 선생님의 노래 한 곡 듣고 시작하겠는데요.
완제 평시조 (백초를) 정경태 선생님의 노래로 듣겠습니다.
백초(百草)를 다 심어도 대는 아니 심으리라
살대 가고 젓대 울고 그리나니 붓대로다
어이타 가고 울고 그리는 대를 심어 무삼하리오
이 곡은 완제 평시조라고 써있는데요. 중장을 잘 들어보시면 경제에서 나오는 속소리도 없고 또한 전라도 지방에 느짓하고 깊이 있는 시조의 맛이 느껴질 것입니다. 또한 이 ‘백초를 다 심어도’의 노랫말은 작자미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설인데요. 남도민요인 육자배기 가락에도 나오지요.
정경태 선생님의 이야기 계속 하겠습니다. 정경태 선생님이 한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쓰는 것에 대해 최정민 선생님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석암은 음악으로 인간문화재이지만 한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쓰고 사군자나 그림까지 잘 그린다. 그래서 전시회를 8회나 했고 미국에 가서도 서예를 지도하고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할 수 있었을까.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글씨를 쓰다보니 자연히 사군자를 하게 되었다. 거기에 첨가하서 소나무, 포도, 연꽃, 모란까지 그리게 되었는데 포도 그리는 것은 광주에 의제 허백년 선생에게 배웠고, 매조는 이당 김은호 선생한테 배웠다. 그리고 산수화 설경부터는 심향 선생을 모시고 전주에서 배웠다. 석암은 그림을 배우는 방법도 별난 데가 있었다. 어느 화가의 집에 찾아가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화가 어른들을 만나는 기회에 석암은 시조를 불러주고 화가들은 그에게 그림을 지도해 주는 식이다.’
석암 선생님이 그림과 글씨를 배운 과정을 들으시고 글로 쓰신 것입니다.
선생님의 노래 한 곡 더 듣고 이야기 이어나가겠습니다.
중허리시조 (춘광 구십일에) 정경태 선생님의 노래로 듣겠습니다.
춘광 구십일에 꽃 볼날이 몇날이며
인생백년이로되 소년행락이 몇날이냐
아마도 화장춘인 장수는 도양란인가 하노라
중허리 시조는 가곡에서의 중거와 같이 중간을 높이 든다고 해서 초장 셋째장단과 중장 셋째장단 후반에서 높이 들어내는 시조입니다.
정경태 선생님 대한 이야기 계속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이당선생이 매조를 그려주고는 모방에서 그려보라고 했다. 석암이 그 이당의 매조를 보고 그대로 그려놓았더니 석암의 친구인 송당이 와서 보고는 왜 똑같은 매조 그림을 두 개나 그려놓았냐 하는 것이었다. 그 때 석암은 ‘아 나도 장래에는 이당 선생을 따라갈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정말 석암은 많은 재주를 타고 난 사람이다. 그림까지 그렇게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그에 재능이 후히 다 어울려져서 멋진 작품을 많이 내는 명인이 되게 한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에 자기가 지은 한시를 붓글씨로 쓴 서화는 아주 많다. 또 그냥 본인이 늘 그냥 짓는 한시를 붓글씨로 쓴 서예작품도 많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그냥 노는 일이 없다. 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작품을 만든다. ’
석암 선생님의 예술가 적인 기질이 또한 예술가 적인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노래 한 곡 더 듣고 얘기 계속 합니다.
사설지름시조 (태백산하) 정경태 선생님의 노래로 듣겠습니다.
태백산하에 굽은 길로 중 서넛 가는 중의 그 중의 말째 중아 게 잠간 말 물어보자.
인간이별 만사 중에 독수공방을 마련하시든 부처님 어느 절 법당 탑전
탁자위에 감중련 하옵시고 동두럿이 앉았던가
소승도 수종 청송이 금시위로되 모르옵고 상좌노스님 알으신가 하노라.
정경태 선생님의 그림이며 시의 대한 재주가 많으신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선생님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늦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작품들이 모이자 1965년부터 시화 서예전이라는 이름에 전시회를 시작 했습니다. 처음 전시회를 한 것은 포항이었구요. 전국을 떠돌면서 시조를 보급하고 작품을 하는 분이라 그가 전시하는 장소도 전국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71년 제2회 전시회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가졌고 대한시우회 해남 지휘의 초대전으로 해남 양지다방에서 전시회를 했다고 합니다. 제3회 전시회는 1972년 대한시우회 영주 지회 초대전으로 영주 청자다방에서 가졌고 제4회 시화 서예전은 대전에서 1977년에, 제 5회 전시회는 1977년 6월에 전남 구례에서 또한 78년에는 여수에서 가졌고 그 다음 1980년에는 부산에서, 이렇게 전국을 순회하면서 작품 전시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982년 서울 예총화랑에서 석암의 제8회 시화 서예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때 안동의 대학자 권오인은 장건, 정석과 함께 3전 3절이라고 칭송했다고 하네요. 몸소 지은 시를 손수 쓰고 또 그리고 하는 그 작품에서 율동과 조화의 호흡이 역력하니 이는 혼연일체로 승화한 불후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주변에서 많은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노래 한 곡 듣고 계속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사설시조 팔만대장 정경태 선생님의 노래로 듣겠습니다.
팔만대장 부처님께 비나이다. 나와 임을 다시 보게 하오소서
여래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십왕보살) 오백나한
팔만가람 (삼천계제) 서방정토 극락세계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후세에 환토(도)상봉하여 방연을 잇게되면, 보살님 은혜를 사신보시하오리다
1985년에 정경태 선생님이 고희를 맞이하여서 김립시집직역본과 석암병서화제집 2권을 고희기념으로 발행했습니다. 선생님의 시서화 작업은 꾸준히 이어져 왔는데 8회까지 하였고 그 이후에는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많이 하지를 못하셨습니다.
또 선생님은 악보도 굉장히 많이 내셨습니다. 가사의 악보를 최초로 담은 거문고 악보로는 19세기 전기 악보로 추정되는 ‘삼죽근보’로 보고 있고요, 이 악보에 상사별곡, 춘면곡, 길군악, 황계곡, 매화곡, 권주가 이렇게 6곡이 전하고 있습니다. 현행 가사의 악보로써는 정간보로 채보된 악보가 처음으로 출판된 것이 이주환의 가사보이고, 그 뒤가 이양교의 12가사전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정간보는 현행 12가사를 장구 반주보와 함께 기보해 놓았습니다. 정경태 선생님은 그래프 식 기보법과 정간보로 채보한 정경태의 가사보를 냈습니다. 정경태 선생님의 가사보를 보면 정간보와 함께 그래프 식 악보를 봐서 비교를 해 볼 수도 있고 또한 시조보는 이 정간보를 보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해서 그래프 식 악보를 창안에서 널리 퍼뜨리셨죠. 그리고 현행에서 오선보로 채보된 악보로는 김기수의 한국음악 제 9집에 가사보를 오선보로 채보해 놓으셨습니다.
선생님의 노래 한 곡 더 듣고 얘기 계속 하겠습니다.
각시조 (봉황대상) 정경태 선생님의 노래로 듣겠습니다.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러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로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이요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라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이요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로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하니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하더라
이 노래는 이백의 시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다 한글로 토를 단 것입니다.
'봉황대 위에서 봉환이 놀았더니 봉황이 날아간 빈 누대에 강물만 헛되이 흐르는 구나. 오나라 궁궐의 화초는 오솔길을 뒤덮었고 진나라의 의관은 옛 언덕을 이루었네. 세 산의 봉우리는 하늘 밖으로 반쯤 걸려 있고 두 갈래의 강은 백로주를 가운데로 갈라져있네. 모든 어지러운 것들은 뜬구름이 되어 해를 가리니 장안이 보이지 않아 사람을 시름겹게 하는구나.' 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경태 선생님의 얘기 계속 합니다.
최종민 선생님은 ‘석암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그의 능력도 보통이 아니고 생활도 보통이 아니다. 가정을 돌보기 위해서 직장을 가진 적도 없고 출세를 하기 위해서 애쓴 흔적도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는데 그 일이라는 것이 노래요, 시요, 서화이기 때문에 풍류와 통하는 것들이다. 음악은 성인이 즐기던 바이니 음악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군자 어찌 성인의 뜻을 헤어릴 수 있으리오. 내 비록 제주가 없으나 일찍부터 가창과 고금을 닦은 것도 모두 성인을 담고자 하니라. 성가와 음율을 익히고 다듬을 때 마다 볼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다음과 같이 십여권에 이르고 있다. 그 십여권의 악보는 한국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고, 실제 실기 연습에 활용할 수 있는 악보들이다.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국악 악보를 가장 많이 낸 분이다. 또한 가곡 가사 시조 시창에 이르기 까지 많은 것을 부를 수 있는 실기의 달인이기도 하며 가장 창조 작업을 많이 하는 분이여서 일생동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다듬으면서 살았다. 그리고 기존 가곡 곡조에 현대시를 얹어 가르친 일도 있는데, 그것은 아주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정민 선생님의 글에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노래 한 곡 듣고 계속 하겠습니다.
가사 춘면곡 정경태 선생님의 노래로 듣겠습니다.
‘석암이 천문을 연구하고 길흉을 점치는 학문을 한 것도 실은 풍류의 하나이고, 정악을 몸으로 익히고 보급한 것도 풍류를 전파하여 전파곤생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인의 흔적과 통하는 것이다. 석암이 어느 곳을 가든 그곳의 자연과 사적을 낱낱이 알아보고 그의 걸맞는 관광 시조를 지은 것도 다 풍류의 하나이며 그의 삶이야 말고 풍류의 삶이였고 풍류의 전통을 이 시대에 확산시키려고 노력한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최정민 선생님의 글이 너무 정경태 선생님과 맞아 떨어지는 듯 해서 이 글을 마무리로 선생님의 대한 얘기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정경태 선생님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선생님의 노래를 감상하셨습니다.
여러분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