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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3‘개봉 일을 추석 연휴에 맞춘 것은 고도의 상술이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한
두 달 전에 개봉을 해서 추석에 대박을 치는데 말입니다. 남들보다 이른 퇴근을 하고
CGV를 찾아갔습니다. 안성은 참으로 요상한 동네입니다. 명절인데도 귀성객을 볼 수가
없어요. 모르긴 해도 안성대중교통이 낙후된 이유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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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분 티케팅에 맞춰 E마트를 찾아갔어요. 그냥 주말 풍경정도 돼보여요. 떡 갈비
한 조각 시식을 하고 오징어, 고구마, 메추리 튀김에 오뎅 한 개로 4,000원을 지불했어요.
우리 어렸을 적에는 오징어 튀김 한 개에 10원이었는데 자그만 치 100배가 올랐네요.
원조 떡갈비가 내 고향 담양(신 식당)인 줄을 혹시 아시나요? 고향에서 살 때는 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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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도 못 먹어봤습니다. 오징어 튀김을 먹으려면 삐쩍 마른 육 남이 아저씨가 데자뷔됩니다.
포장마차를 하던 육 남이 아저씨는 6번째로 태어났을 것이고, 노모와 업둥이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사는 가장입니다. 여자는 당시 십대 쯤 되었는데 백치 아다다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임신을 했는데 육 남이 아저씨는 씨 없는 수박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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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꼬마 때부터 그 아저씨를 봐왔어도 나이부터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기만 했습니다.
중학교 때 그 집에 ‘섰다‘노름을 하러 다니면서 케케묵은 사랑방 냄새와 도박을 같이
기억하게 되었어요. 육 남이 아저씨는 농사, 고기잡이, 남의 집 잡일, 포장마차, 노름 방까지
도대체 직업이 몇개인지 모릅니다. 나보다 20살 쯤 더 먹은 육 남이 아저씨를 형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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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렀습니다. 이 양반은 지금 뭐하고 살까요? 담양은 안성만합니다. 지정학적으로
내륙에 위치를 해서 농축산이 주업인 것도 안성과 비슷합니다. 안성 인들은 여자들도 민물
매운탕을 좋아하고 패쇄적이다 보니 쓸데없이 텃새가 셉니다. 평택, 천안, 이천에 절대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전설의 조폭 김 태촌 이 담양사람인데 안성 대장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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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중3때 수곤 씨네 빨간 벽돌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천 변리에서 지침리로
왔으니까 뚜벅 이로 걸으면 15분쯤 되는 거리입니다. 큰방과 가운데 방만큼의 토방마루가
햇볕으로 인해 양지와 음지를 만들던 남향집입니다. 우리들은 토방마루에서 숙제도 하고
봉숭아물도 들이고 여름엔 평상처럼 누워서 참가번호 18번 명지대학교 심 민경 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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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을 백번 이상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박 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직후라서
그랬는지 중학생인 저뿐 아니라, 고등학생인 둘째 누나도, 초 딩인 진호 명희까지 목청을
높여 열라 따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우리 세대는 국민교육헌장처럼 긴 문장을 외우고
검열을 맞던 세대가 아닙니까? 중풍으로 누워계신 할머니가 수곤 씨네 쪽 작은 방을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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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었고, 가운데 방은 내 방인데 겨울엔 추워서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
방은 어머니의 공방과 거실을 겸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부엌과 화장실 사이에는 마중물을
넣는 샘터가 있고 20평 정도의 마당이 출입문 까지 연결되어있었습니다. 정면체로 보면
빨간 벽돌 담벼락이 50m의 왼쪽부터 10m정도에 작은 쪽 문이 달려 있고 토방마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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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이로 2m정도마당이 작은 방과 화장실까지 연결된 곳입니다. 우리 집 건물 뒤쪽으로
수곤 씨네 큰 마당, 화장실 뒤쪽은 우리 반 스님, 갑신이네 집과 국어선생님이었던 유진숙
선생님 네 집입니다. 큰방 옆은 7평정도 되는 부엌이 부뚜막 두 개에다가 연탄아궁이 하나,
곤 로 까지 있었는데도 겨울엔 연탄을 200장정도 잠겨 놓고도 남을 만큼 공간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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컸습니다. 보신탕을 좋아하신 아버지는 중 캐 한 마리를 잡아서 새끼줄로 매달아 놓고
겨울을 새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울 아버지는 부엌에 자주
들어가셨습니다. 조기세끼나 전어 같은 고기는 아버지가 좋아하신 생선인데 엄마가 구운
것보다 더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날 것을 숯불로 구운 직 화라서 그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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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셔서 그런지 주전부리를 많이 했고, 아버지가 집에 계신 날
이면 제 입이 궁금하지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먹 방에 일찍 눈을 뜨신
것이지요. 저도 홀로서기를 하려면 박상민이 정도의 요리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간혹 가다
아버지는 형식적으로 우리들 숙제검사를 하셨는데 엄마가 경을 치는 날엔 아버지가 기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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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덧 뺄셈을 물어 보시니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가끔 우리 공주들에게 피드백을 할
때마다 내가 울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을 되받을까봐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울 아버지는
한문도 잘 알고 구학문을 하셨는데도 산수는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레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전어를 사다가 아버지처럼 해먹어봤는데 그때 그 맛이 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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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습니다. 70년대 말이면 울 아버지가 50세 어머니가 45세이니 지금의 저보다 어린
나이입니다. 가장이신 아버지는 20년차 우체국에 다녔고, 엄만 삯바느질 부업을 하셨지만
박봉인 아버지의 월급타령을 입버릇으로 하시는 것으로 봐서 어머니가 아버지 월급을
추월하신 것 같습니다. 어머닌 그때에도 방학 때가 되면 우리들을 데리고 외가인 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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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셨습니다. 물론 광주고속을 타고서 말입니다. 저는 엔트리 넘버 쓰리이면서도 장남
이라 매번 차표 한 장으로 비좁은 서울 여행을 다녀야했습니다. 사실 제가 촌놈이면서
거의 서울 놈으로 산 것은 다 울 어머니 덕입니다. 울 어머니가 가장 잘한 일로 봅니다.
주말이면 우리 집 여자들은 빨래 감을 한 가득안고 이고 방에 도랑까지 빨래를 하러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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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에서 식모처럼 집안 일를 했고, 방청소와 마당 청소는 제가 우리 어머니 맘에 들게
잘했습니다. 저는 내 동생 진호랑 거의 붙어 다녔는데 진호가 중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철이
나는 바람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집 앞에 도랑이 있고 왼쪽으로 희수네 집
그리고 연주네 경로당을 못가서 배기술 선생님 집까지 꽤나 긴 골목이 꼬불꼬불 펼쳐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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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우범지대로 변했습니다. 집 앞 공터는 택지 개발구역이라 밭을 갈아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홍신 이네 이발소까지 대부분이 공터여서 천변 리 살 때도 이곳으로 놀러 다녔습니다.
이 공터는 벽돌 공장을 빼놓고 가장 늦게 개발 되서 그런지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기도
했는데 저는 이곳의 오이 가지를 서리해서 먹었고 갱 깡이나 오징어 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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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관계없이 그땐 왜 도랑이란 도랑은 일부러 다 뛰어 넘어 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중2, 진호가 초6,명희가 초4, 명옥 이 고1 때, 우리 집 대표 효자 진호는 신문 배달을
했고, 그때 받은 3,000원으로 엑스란 추리닝을 사 입었습니다. 진호가 어느 날인가 엄마한테
객인 후로 사춘기를 겪었는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무섭게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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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별로 인원수가 600~700명 중에 학년 석차50등까지 주는 금 밧지를 진호가 달고
다녀서 식구 때문에 처음으로 어깨가 으쓱했습니다. 어머니가 힘이 빠졌는지 영천 상회
안 집에서 보다는 우리들을 체벌하는 것이 훨씬 약해졌습니다. 어쩌다 우리들이 뺀질거리다가
걸리면 매를 번다며 인상을 쓰셨지만 전처럼 단체로 하는 한 딱 까리는 더 이상 물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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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맛있는 것을 가급적 혼자서 잡수셨는데 걸핏 하면 허리가 아프거나
물팍이 저린 이유를 며느리도 모르고 할머니도 몰랐습니다. 저는 아빠를 존경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께서 그것을 아셨는지 어느 날인가는 제가 밥상의 구운 갈치에 손을 댔다고 엄청
맞았습니다. 그대 입은 입술의 흉터가 지금까지 있지만 저는 이 일로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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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본 적은 없으니 저도 준 효자가 아닙니까? 완전한 효자 진호는 아버지의 넘쳐나는 물동량을
위해 배달 일을 종종 도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 한 번 나갔다가 너무 창피해서 다시는
아버지를 돕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우체국장을 하던지 점방을 하지, 하필 배달하는
일을 하시는지 아주 많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루는 우리 집 식구였던 복실 이가 보이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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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을 했는데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들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강아지 때부터 키운
개를 15,000원에 팔아넘기신 것입니다. 화폐가치를 가만하더라도 지금 돈 15만 원 정도
입니다. 똥개치고 귀도 쫑긋 하고 털을 세우면 늑대처럼 생긴 개인데 아버지가 팔아 버렸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날 내 동생 진호는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한 나절을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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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의 표시할 만큼만 울었습니다. 한 번 효자는 영원한 효자라고 지금도 진호는
88세가 되신 아버지를 끔찍이 봉양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쯤 되었습니다.
중3인 저는 남초등학교로 축구를 하러 다녔습니다. 학교생활도 별로고,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게 시작되었습니다. 한 1년 돈내기 축구를 하면서 중간 중간 짤짤이도 하고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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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치기를 하다 보니 이젠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는 완전히 손을 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때부터 종종 아버지 옷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소도둑까지는 아니지만 엄마가 갖다
주라던 계돈마저 도박에 날리고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어디서 잤냐고요?
볏짚을 짓고 논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때 정말로 불알이 얼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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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작은 방이 비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내 친구 형용이 은영이 정우 형이랑 종종 드러누워 음악을 듣곤 했는데 하루는
형용이가 내 고추를 마구 흔들어댔고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오줌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나는 혼자서 그 짓을 해봤고 그것이 나의 첫 자위 경험입니다. 우리 집은 남자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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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진호 밖에 없었는데 다 아버지가 상 남자 스타일이 아니라서 누나들을 부를 때도
‘언니‘라는 호칭을 썼고, 진호가 나를 부를 때도 ’언니’로 불렀으니 중3때 자위를 배운 것도
기특한 일입니다. 그해 명옥 이 누나가 많이 컸습니다. 가방을 옆으로 매고 다니기 시작
하더니 정통 칠공주파도 아니면서 몰려다니는 서클 친구들이 5명인가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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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 넙치, 삼치, 갈치 한 명은 기억이 안 납니다. 제가 고1 연합고사를 치르기 전 후로
1년 정도 집에서는 동생들이랑 공기놀이나 땅따먹기를 하거나 진호를 데리고 읍 교회 뒤로
새총을 만들어 사냥을 다녔는데 하루는 진호가 얼떨결에 쏜 새총에 눈먼 참새가 맞아서
일일이 털을 뽑고 구워먹은 기억이 생각납니다. 영천상화 안 집에 살 때는 토끼나 닭을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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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키웠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이사 와서 몇 번 키우다가
그만뒀습니다. 영천상회 안집 살던 어느 날, 토끼와 중닭을 쥐가 잡아먹는 것을 목격한 뒤로
가축 키우기가 싫어졌습니다. 작은 쥐가 자기보다 훨씬 큰 가축을 잡아먹는 것은 적잖이 충격
이었습니다. 명 옥이 누나 친구 중에 향옥 이는 장쯔이를 닮았습니다. 저는 그 누나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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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친구 중에 젤 마음에 들었는데 2년 선배라 내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향옥이 누나는 나 정도는 애들 취급을 했고 이따금 육남이 아저씨네 포장
마차에서 오뎅이며 튀김을 사줘서 나는 혼자서 괜히 부끄러워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누나는 '친구1'에 나오는 진숙이 캐릭터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다닌 것 까지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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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았습니다. 제가 중2에서 고1까지 2년 동안 수곤 씨네 집에서 살면서 길 건너 도효 형네
집을 가끔 갔는데 내가 갔을 때마다 도효 형은 나를 꼬마 취급을 해서 재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도효 형은 부모님께서 쌀 가계를 하셨고 그의 형이었던 옥담 이는 말투는 여자처럼
상냥했어도 배구나 축구 오자미 놀이 같은 운동은 곧 잘 했습니다. 도효 형은 옥담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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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형인 것이 부끄러웠던지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게임을 할 때도 같은 편먹기를 싫어
했을 뿐 아니라 화나면 호모세끼라고 욕지거리를 해서 나는 속으로 도효 형이 개새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무렵 남초등학교에서 나이 많은 형들 영민, 용선, 키 큰 형, 도효, 광천,
종대 중에 몇몇 빼고 다 명옥 누나 또래 형들입니다. 그 형들은 "누나 잘 있냐?"를 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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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물었는데 저는 그때마다 개자식들이라고 속으로 대답을 해줬습니다. 고1이 되면서
고등학교 재수생부터 대학교 재수생까지 남초등학교는 백수들로 넘쳐났고 우리는 광천이
형을 중심으로 농구 골대에서 돈 따먹기 축구에 미쳐 있었습니다. 저는 운동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돈을 펐는데 그때는 축구를 하지 않으면 왕 따가 되는 분위기라 하루도 축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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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농구 골대에서 정구 공으로 하는 게임은 1년 선배 광호 형이랑
조무래기들이 주로 했고, 형들이랑 섞어서 하는 메이저 리그에서는 도효, 광천이 형이
스트라이커였습니다. 제가 볼 때 펠레는 광천이 형이었어요. 그 형은 별명도 놀부입니다.
우리 돈을 하도 따먹어서 놀부가 되었어요. 도효 형이 광천이 형보다 까져서 오기를 부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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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그 편이 이길 때도 있었습니다. 도효 형은 그때부터 우리들과 '섰다'도 하고 1년 정도
함께 놀았는데 제가 아버지 바지에서 훔친 돈을 그 형이 '섰다'로 다 따 먹었습니다. 나는
나를 꼬마 취급 하는 그 형이 싫었지만 어느 것 하나 그 형을 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도효는 삼수를 하면서부터는 담배도 피우고 '라일락'파 내 친구들이 인사를 하고 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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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았는데 도효 형네 집에 가보면 그 형은 대입 문제집을 가지고 샤프펜슬을 그어가며
공부를 하고 있어서 이 형이 학구파인지 깡패가 되려고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도효는 재수를 해서 4년제 대학에 갔을 것입니다. 아주 가끔 영천 상회 안 집 살 때
놀았던 병주 형이랑 수발로 법수를 가지고 고기잡이를 갔다가 누나 동창인 용규 형을 만납니다.
결국 그가 우리 큰 매형이 되었습니다. 효석 고1, 진호가 중2, 명옥이 고3 무렵 어머니는
외출이 잦아지셨고 결국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정읍에 600만 원짜리 여인숙을 전세로 얻었습니다.
나는 가장이라는 막중한 역사적 사명감을 입고 발전해갔습니다. 우선, 키가 168cm에서 178cm로
자랐고, 일주일 생활비를 맡아 관리하면서 보직이 사람을 만든다고 1학년 2학기부터는 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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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를 12인치 통바지에 엉덩이에 후다 까지 달고 다니면서 짱 의 꿈을 키우다가 고2때는
우리학교 짱 을 먹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숙박업을 하시는 일로 집을 자주 비우자
우리 집은 다시 남초등학교 뒤편 노 치과 앞으로 이사를 했고, 졸지에 밑으로 동생들 3명을
거느리고 학교를 다니는 소년가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고2가 되면서 옥이 누나가 취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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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으니 우리 집은 완전 아지트입니다. 영화 후기를 쓰려고 했는데 삼천포로 빠져버렸네요.
'타짜3'은 짝귀가 누군가에 의해 배 가판에서 떨어져 죽고 20년 후의 그의 아들(박정민)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도출이 그놈은 고삐리부터 까져가지고 메이저급 포카 판을 들락거립니다.
예쁘지도 않고먼 마돈나(최 유화)에게 빠져 기둥서방 이상무(윤제문)에게 아후러시를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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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하우스(2집)로 손 목아지를 잘릴 지경이됩니다. 여기까지는 봐줄만 합니다.
일단 ‘타짜3’을 보려면 세븐 포 카드 룰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영화라도 1편을 능가하는 건
없다고 봅니다. 타짜1은 명작이고 타짜2는 섰다나 고스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흥행몰이를
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타짜 ‘원아이드 잭'은 애매한 영화입니다. 도박 영화는 느와르를
살려야 영화가 사는데 제가 다 아는 시시껄렁한 내용들입니다. 시멘트 드럼통에 발을 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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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담그는 시퀀스로는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짧은 신이라도
발단-전개-절정의 과정을 거쳐야 임팩트가 있어요. 플롯을 생략하고 바로 오브제를 사용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방식입니다. 냉탕 온탕 속 코믹이 없어요. 악역이 코믹스러우면 웃기지
누가 무서워합니까? 논두렁 깡패들도 그렇고 마돈나도 치명적인 카리스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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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코믹 로맨스로 콘셉트를 잡는 게 나았을 것입니다. 류 승범은 분장만 잘했고요.
짝귀, 아귀, 마귀 중에 마귀는 업계에서 ‘마구’로 부를 것입니다. 타짜3 편에서는 애꾸눈,
일출(박정민), 까치(이광수), 영미(임지연), 권원장(권해효)가 원아이드 잭을 만들고 타짜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사기도박을 하는 내용입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타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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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를 굳이 구별하자면 타짜는 정석으로 도박을 하는 놈이고 마귀는 사기도박을 하는
놈을 지칭합니다. ‘타짜3‘은 사기도박단인 셈입니다. '타짜'는 투전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처음엔 한자인 '타자'(打子)로 표기하다 타자가 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짜를 전문
도박꾼으로 생각하지만, 타짜는 쉽게 말해서 승부를 조작하는 범죄자입니다. 그러니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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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를 타짜라고 부르면 곤란합니다. 정정당당하게 도박 실력이 뛰어난 도박사는
그냥 ‘고수’라고 부르거나, 한국 전통 노름판에서는 '참 꾼' 내지는 '백지 꾼' 이라고 부른
답니다. 물론 타짜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도박 실력은 기본이며, 반대로 순수 고수 역시
상대방이 타짜인지 아닌지 알아내야 상대할 수 있으므로 타짜의 다양한 기술을 잘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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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아주 별개로 구분할 순 없습니다만 90년대 이후론 무선통신,
편광렌즈, 적외선 투시카메라 등등으로 사람의 손기술이 아닌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경우에는, 직접 손기술을 구사하지 않고서도 타짜 수준의 사기게임을 할 수는 있습니다.
더불어 포커에서는, 화투와의 용어가 살짝 다릅니다. 타짜가 아닌 보통 '마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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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 교재로 유명한 이 윤희 씨의 경우, 마귀라는 말을 그저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애초에 도박판이라는 게 협회가 있어서 명확하게 정의된 용어를 사용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용어가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예를 들자면 구라를
치지 않고 하는 게임을 보통 실화(카)라고 하는데, 구라와 실화의 발음의 유의성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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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를 ‘굴화’ 라고 하거나 실화를 ‘시라’라고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화투와 포커의
모든 속임수 기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의 경우는 블랙 조(타짜+마귀)라고 한답니다. 목적론
적인 차이를 따지자면, 일반적인 갬블러는 단순히 도박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지만, 타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기를 쳐 상대방의 돈을 뺏다시피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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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 꾼은 승부사가 아니다. 승산 없는 게임엔 절대로 덤벼들지 않는다." 그 수단과 방법에는
밑장빼기, 바꿔치기, 스테키 등의 도박 내적인 요소 뿐 아니라 호구를 꾀어 들이는 행위(설계
사)판짜기, 뒷거래, 심지어는 공갈협박이나 폭력, 살인 등 도박 외적인 요소도 들어가며,
이것이 타짜와 갬블러 간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지금 전국구 도박판에서 세븐 카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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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 ‘땁데기‘라는 바둑이게임이나 마작, 그리고
사설 바카라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포천에서 게임장을 13번 하다 보니
건달들과 동패를 먹고 전국구 통을 몇 번 맞춘 적이 있습니다만 별 재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인트로에서 짝귀가 동패로 딴 돈을 가지고 튀다 잡혔는데 배낭에는 신문지 뭉치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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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딩에서 목숨 걸고 딴 돈을 동패 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들어온 도출이, 냉장고에서
발견한 돈뭉치는 아버지 짝귀가 자신에게 남겨준 유산인 셈입니다. 그러고보면 도박꾼도
자식은 목숨인가 봅니다. 슬슬 움직여야겠습니다. 여수 팀이 도착했다고 톡이 왔네요.
해피 추석!
2019.9.12.tuu.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