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성서 안의 막장드라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38장 8~10절을 보겠습니다.
8 유다가 오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형수와 결혼해서, 시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라. 너는 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
9 그러나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그가 자기 아들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
10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난도 죽게 하셨다.
창세기 37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38장에, 요셉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단편설화가 등장합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좀 이상한 스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편설화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셋을 낳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유다는 장남을 위해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얻어주었는데, 장남이 일찍 죽는 바람에 다말을 둘째에게 줍니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받아들여 형의 대를 잇게 하는 풍습이 폭넓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둘째 아들 또한 일찍 죽게 됩니다. 둘째아들 이름이 오난인데요. 형수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면 그 아이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 형의 아들이 되겠지요. 그게 싫어서 합방을 할 때 질외사정을 했답니다. 그런데 오난의 행위가 악하다며 하나님이 오난을 죽였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나니즘’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위행위를 뜻하는 말인데, 바로 본문에 나오는 오난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자위행위를 죄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를 이 본문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위행위는 죄가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습니다. 진보적인 교회 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자위행위를 죄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일부 극단적인 교회에서 그런 엉뚱한 편견을 갖고 있어서 교인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도 질외사정을 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오난의 죄는 형의 대를 잇게 해야 하는 동생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어쨌든 유다는 둘째 아들까지 잃게 되자, 셋째도 잃게 될까 두려워 셋째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다말을 아내로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말은 친정으로 쫓겨나게 되고 여자로서는 큰 치욕이 됩니다. 그래서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고 유다를 유혹하여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합니다.
나중에 임신사실이 밝혀지자 유다는 다말이 음행을 저질렀다며 불태워 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말이 관계의 대가로 받았던 물품을 증거물로 제시하자 유다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합니다. 후에 다말은 유다의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조상 베레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단편설화가 요셉이야기 중간에 삽입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다윗왕과 예수님의 직계 조상인 베레스의 탄생을 설명할 의도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레스가 다윗왕의 조상으로 룻기에 기록되고,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이 베레스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설화와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또는 구분하지 않는 교리주의자들의 억지해석입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이 사실이 되려면 적어도 베레스의 출생 전후에, 그가 나중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위대한 지도자의 조상이 된다는 예언이나 암시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암시의 성격을 가진 글들이 숱하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그런 암시나 예언이 전혀 없습니다.
진보신학자들 중에는 이 설화가 왜 요셉이야기에 끼어들어 왔는지 자신 있게 말하는 신학자들이 별로 없습니다. 단지 기록 당시에, 어떤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 기록되었는데, 그것이 모세오경의 최종편집자에게 채택된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유다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이 문제였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과 가까이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설화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 역시 근거가 부족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유다가 이방여인과 결혼했다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이스라엘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거나 하는 암시나 평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서에는 이런 부분이 많습니다. 기록 당시에, 이스라엘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채택된 건 분명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성서 본문에서 찾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성서 이외의 다른 문헌에 기록되어 있거나 고고학적 자료가 있다면 밝혀낼 수도 있겠지만, 이삼 천 년 전의 이스라엘에 대한 문헌이나 자료들은 성서본문 이외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사이비 종교집단의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이런 내용을 제 멋대로 자기 종교조직에 유리하게 해석하고는 신의 특별한 계시로 이 난해한 부분을 해석했노라고 순진한 교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과 조직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