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2026.8.9.연중 제19주일
1열왕19,9ㄱ.11-13ㄱ 로마9,1-5 마태14,22-33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외딴곳의 쉼터, 삶의 현장, 공동체의 중심>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시편85,10)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날마다 일어나 <외딴곳> 집무실에서 강론을 쓰면서 하루를 여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 회개하는 시간, 주님 안에서 쉬는 시간입니다. 엣 현자의 가르침입니다.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 반복되면 습관이 된다. 스스로 변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지금 단호해져야 한다.”<다산>
“예(禮;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마라.”<논어>
예를 사랑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바로 지금 사랑을 하고 주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사랑중의 사랑이 주님과의 사랑입니다. 이래서 기도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시를 찾는 마음은 주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이래서 <기도시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 주님을 찾는 시인입니다. 오래전 두 편의 자작시를 나눕니다.
“푸른 하늘마음이었으면 참 좋겠다
칼같은 말에 베이지 않고
뱉어놓은 말에 더럽혀지지 않고
떠가는 감정의 구름들에 매이지 않고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푸른 하늘마음이었으면 참 좋겠다
흙 마음이었으면 참 좋겠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온갖 오물 받아 들여 썩혀 비옥해진
그런 흙마음이었으면 참 좋겠다
흙humus, 사람homo, 겸손humilitas, 같은 어원이라 하지 않나
초연한 하늘마음 사랑,
수용의 흙마음 사랑이었으면 참 좋겠다”<마음;1998.4.27.>
주님과 일치될수록 이런 초연한 하늘마음, 수용의 흙마음이 됩니다. 엊그제 입추가 지나니 아침저녁 시원한 바람에 밤에는 풀벌레들 합창이 시작되니 생각난 또 하나의 시입니다.
“하루 종일 일하신 하느님
밤에는 쉬신다
대지에 누워 별빛 맑은 푸른 하늘 이불 덮고
풀벌레 맑은 합창노래 자장가 삼아
쉬시는 하느님이시다
밤마다 맑게 깨어 쉬시는 하느님이시다”<밤에도 쉬시는 하느님;1998.10.5.>
얼마전 레오14세 교황의 휴가와 관련된 <잃어버린 쉼의 기술>이란 칼럼의 내용 일부가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이 참된 휴가다. 잠시 멈추고 영육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쉼은 결코 자신을 가두는 요새가 아니다. 쉼은 여전히 하나의 요청이며, 거의 계명과 같다. 멈출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세상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쉼은 신학적 겸손의 행위다.
영성은 일상생활과 분리된 특별한 시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성은 리듬과 교대, 그리고 음악에서 쉼표가 소리에 형태를 부여하듯 삶에 형상을 부여하는 멈춤 안에 머문다. 그러므로 쉼은 영적 생활을 아루는 본질적인 음절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첫째 답이 나왔습니다. 외딴곳의 쉼터를 찾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적절한 시간 적절한 장소에서 쉬는 것은 참 좋은 분별의 지혜입니다. 노자의 <공성이불거>의 정신대로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 열광하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피해 신속하게 지체함 없이 주님을 만나러 산을 찾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은 생래적으로 고독과 침묵을 사랑합니다. 홀로와 함께는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위기나 쓸쓸하고 외로울 때 살기 위해 찾아야 하는 외딴곳의 하느님입니다. 엘리야 역시 밤에 하느님의 산 호렙 동굴 앞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산 위에 섰을 때, 주님이 지나면서 강한 바람에 이어 지진이, 불이 일어났지만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오니 바로 주님의 소리요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섭니다. 저는 날마다, 밤마다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수도원 집무실 천장암天藏庵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둘째,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외딴곳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제자들의 항해 여정 중 풍랑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주님은 물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대로 인생항해 여정중의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다음 대화가 긴박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유령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오너라.”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우리 주님은 바로 이렇게 자상하고 친절한 분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주님 체험은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일상의 크고 작은 주님 체험을 통해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임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음 고백도 그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 체험의 반영입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흡사 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다 구제되기까지 지옥에 남아있겠다는 불가의 지장보살의 일화와 흡사합니다. 결국은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기도로 마감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답은 기도뿐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우리 남양주 성 요셉 수도원이 1987년 3월19일 개원이후 39년 동안 세상 항해 여정중 무수한 위기 중에도 조난이나 파선됨이 없이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하루하루 날마다 바쳤던 <공동전례기도>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셋째, 주님을 내 삶과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중심이 여럿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갈립니다. 돈도 일도 기계도 사람도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내 공동체의 중심에 모실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안팎이 고요해집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주님이 공동체의 중심임을 고백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이요 공동체입니다. 서로 좋아서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기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답은 셋입니다.
첫째, 나만의 공간, 외딴곳 쉼터를, 기도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둘째,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셋째. 내 삶과 공동체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친교를 날로 깊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2).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시인이신 이신부님 주옥같은 강론 고맙습니다. 올려 주신 환희 평화 님 감사합니다 🙏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