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인가 모방인가
착란의 돌, 오렌지 / 함기석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칼이 어머니 가슴을 횡단했다 어머니가 쓰러지며 촛대가 쓰러지고 이불에 불이 붙었다 불은 순식간에 지붕을 불태우고 하늘을 불태우고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를 불태웠다 밤마다 누이는 그림을 그렸다 재와 꽃가루를 눈물에 개어 내 발톱에 식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주었다 하얗게 눈이 내렸다 머나먼 얼음의 들판에서 전신주 하나가 늑대의 울음소릴 내며 쓰러졌다 누이는 그 울음소릴 주어다 마당에 심었다 봄이 되자 하늘 가득 검은 조개들이 돋아났다 누이의 귀에서 눈먼 새들이 쏟아져 나와 쌀알처럼 하늘로 흩어졌다 나는 가슴에서 새까맣게 타죽은 연못을 꺼내 아버지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집을 뛰쳐나갔다 홀로 철길을 걸었다 철길 가득 어린 들꽃들이 단발머릴 흔들며 바다로 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밤나무 겨드랑이 사이로 샘물이 밀려왔다 초승달이 보였다 채송화를 머리에 꽂고 누이가 달의 눈썹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걸었다 상처 난 그림자를 철길에 눕혀 놓고 홀로 걸었다 기차가 그림자의 배를 가르고 지나가자 들판 가득 검붉은 노을꽃이 피어났다 나는 걸었다 맨발로 걸었다 땅만 보고 걸었다 노을의 숨구멍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며 나는 말했다 내 발에게 말했다 발가락에게 말했다 오렌지가 먹고 싶어요 오렌지 오렌지
멜랑콜리의 금서, 레몬 / 황정숙
허공을 가르고 지붕을 통과한 유령이
여자의 가슴을 횡단했다
여자가 부르르 떨며 어린아이처럼 무섭다며 울었다
양들이 기침하듯 소리를 내었고 방안을 둥둥 떠다니고
여자의 검은 눈동자를 빨간 삼각형으로 빛나게 했다
밤마다 여자는 보이지 않는 얼굴들과 속삭였다
불안과 공포를 불면의 꽃무늬를
꿈꾸는 아프리카 상아 가면처럼 새겨 넣을 것이라고
머나먼 빙하의 바다에서 북극곰 하나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여자는 헛디딘 발을 들어다 방에 심었다
밤이 되자 방안 가득 별자리가 생겨났다
빨간 삼각형 눈을 가진 여전사가 튀어나와 해파리처럼 휘감았다
나는 가슴에서 빨갛게 달궈진 심장을 꺼내 금서에 올려놓고는
긴 머리를 싹둑 자른다 홀로 다크 초콜릿을 먹는다
초콜릿 가득 세로토닌 도파민이
기분을 전환시키며 바다로 가고 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혈관 사이로 포말이 밀려왔다
여자는 여전사 발밑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나는 금서를 넘겼다
영혼 없는 그림자를 빙하에 올려놓고 넘겼다
태양이 빙하의 그림자를 녹이고 사라지자
방안 가득 장다리꽃이 피어났다
나는 넘겼다 금서를 넘겼다 죽음만 보고 넘겼다
장다리꽃 숨구멍 속을 빠져나오듯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넘겨가며 나는 말했다
그냥 날씨 같은 것, 내 금서에 말했다
까맣게 사라진 심장에 말했다
“레몬 레몬,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 ―이상(李箱) 시인이 눈을 감기 전 남긴 말.
어느 계간지의 ‘알림’글에 황정숙 시인의 「멜랑콜리의 금서, 레몬」은 함기석 시인의 「착란의 돌, 오렌지」의 표절임을 밝힌다는 기사. 내가 보기에도 두 편이 어딘지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두의 첫 문장과 결말의 마지막 문장은 특히 그렇게 혹사합니다. 하지만 시의 몸통인 중간 부분은 한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서로 다름을 부인할 수 없는 작품들입니다. 주제는 전혀 다르고 표절이라기보다는 모방한 작품, 모작이나 아류로 보고 싶습니다. 함기석 시인의 초현실주의 기법의 뛰어난 상상력의 구사를, 황정숙 시인이 흉내를 내어보긴 하지만 숨이 차고 훨씬 그 치밀함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멜랑콜리의 금서, 레몬
⸺함기석의 「착란의 돌, 오렌지」 풍으로
이렇게 황정숙 시인이 발표할 때 부제를 달아서 애초에 ‘모작’임을 밝힐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함 시인의 뛰어난 작품을 보고 평소에 열렬히 함 시인의 작품세계를 선망하여 그 표현 방식을 모방해서 쓴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모방 대상작을 사전에 밝히지 않은 실수를 송곳처럼 추궁하여 표절했다고 다그침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황정숙 시인에게 함기석 시인의 시집 『뽈랑공원』을 적극 소개한 건 필자였습니다. 십 년 전 일입니다. 그 이후에도 황정숙 시인은 함 시인의 작품 세계에 완전히 매혹되어 시인의 다른 시집도 구하여 열독한 모양입니다.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황 시인은 그렇게 함기석 시인의 열렬한 애독자가 된 것입니다.
어쩌다 들어온 원고 청탁 기회. 신인이 작품 준비가 되지 않아서 모처럼의 청탁을 물리친다는 건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익숙한 시의 모작을 만들어 볼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제목 아래에 한 줄의 부제만 달았어도 이러한 소란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을.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위에 보인 김춘수 시인의 「꽃」은 너무나 잘 알려져 그 패러디 작품도 여러 편 볼 수 있습니다. 장정일 시인의 「라디오와 같이…」는 김춘수 시인의 「꽃」의 형식을 모방한 시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경우는 표절이 아니라 모작일 뿐이지요.
그런데 표절인지 모작인지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의 두 편을 비교하여 주제와 형식 등을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자유(自由) / 폴 엘뤼아르
초등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 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폴 엘뤼아르(1895∼1952)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이 「자유」라는 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발표한 저항시로 엘뤼아르의 대표작입니다. 박정희 군사정부 유신 시대에 쓴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와 비교해봅니다. ‘네 이름을 쓴다’는 핵심 문장이 겹칠 뿐만 아니라 주제와 표현 형식, 구성, 어조 등에서도 유사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건 우연히 이루어진 모방일까요? 가장 중요한 주제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표현상의 병렬 혹은 나열형의 시상 전개 방식도 판박이로 똑같습니다. 판단에 주저할 것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엘뤼아르의 「자유」를 표절한 시입니다. 우리나라의 저명 시인이 썼다고 하여 판단이 흐려져선 안 될 일입니다.
살기에 바쁜 생활인으로서 신작시 청탁을 받을 때마다 척척 준비된 작품을 꺼내기는 쉽지 않을 때가 더러 있을 터입니다. 넉넉한 시간 여유가 없어서 도저히 신작을 쓰기 어렵겠다 싶으면 시인들이여, 청탁을 고사하십시오. 몇 달 간의 슬럼프 기간이 있을 때도, 아니 십 년 넘는 슬럼프 기간이 찾아올 때도 있을 겁니다(신현정, 서정춘 시인의 경우 십 년, 이십여 년 슬럼프 기간이 있었습니다). 주어진 신작 발표 기회를 물거품으로 돌리기 차마 아쉬워 과욕을 부리다가 자기 시를 망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평생 시를 쓰는 사람, 결코 일이 년 시를 쓰고 그만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시를 쓰는 사람, 그가 시인입니다. 과거의 시집 몇 권으로 우연히 얻은 빛나는 명성에 기대어 거들먹거리다가 요즘 들어 성추문에 시달릴 뿐 수십 년 동안 시를 작파한 이는 이제 시인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자기만의 세계를 갈고 닦은 시인의 높은 기량이 탐난다고 하루아침에 흉내 내어 그게 될 일이 아닙니다. 수십 년 전 이야기를 하나 꺼내봅니다. 내 첫 시집에 흠뻑 빠진 후배 박 시인이 내 시집 『이상기후』 속 탐나는 구절구절을 자기 데뷔작 속에 마구 쑤셔 넣었습니다. 1968년 신춘문예 당선작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그림자/ 머언 기억 밖에서’를 ‘죽은 그림자 머언 기억 밖에서’로 변형시키고, ‘뛰어다니며 예감하는/ 건강한 우리들의 죽음’을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로 변형시키고, ‘미친 듯이 나부끼는 가슴 속의 /바람 뜨거운 나무’를 ‘자꾸만 바람 뜨거운 나뭇가지’로 변형하는 둥, 그러다가 마침내 겨울 속에 숨어있는 봄의 기운을 말하는 그 시의 대미는 이렇게 맺어집니다.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었다.”라고. 그런데 이 구절은 필자의 시구가 아니라 그 시인의 고교 2년 선배이자 내 1년 후배인 무명 시인의 「씨 뿌리는 마음」의 결말에서 표절해온 것이었습니다. 무명 시인이 쓰기를 “여름이/ 땅강아지 앞다리에서 바쁘게 무너져 오는 것을 본다.”라고 썼던 것을. 여름철 밭둑의 흙속에서 많이 볼 수 있던 땅강아지, 그게 겨울철을 노래한 시 속에 홀연히 등장한 건 단지 땅강아지 앞발에서 흙이 무너지는 멋진 이미지만 무단 차용하다 보니 계절과 맞지 않는 이상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신춘문예 시 심사를 맡은 이가, 당선시킨 학생이 재학 중인 대학 교수여서 눈에 뭐가 씌워져 결정적인 흠결을 못 본 걸까요. 지금도 그 속내가 못내 궁금한 대목입니다. 표절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