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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선사 유트브로 보기 https://youtu.be/r0lcML1Y784
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21-1. 주장자로 몽땅 쫓아냈다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들과 편안하게 지내면서 누군가를 만나면 누구라고 알아본다. 노파심으로 이토록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모르니, 매일같이 배부르게 밥 먹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무얼 찾느냐. 이 망상꾸러기들아. 여기에 기대어 무엇을 하느냐?"
그리고는 주장자로 몽땅 쫓아냈다.] 하시면서 사부대중들을 다 내쫏아 냈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나는 그대들과 편안하게 지내면서 누군가를 만나면 누구라고 알아본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 사찰에서 밤낮으로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으니 굳이 말을 안해도 서로 보기만 하면 다 알아차린다는 뜻이니 바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뜻입니다.
도란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밥먹고 똥누고 피곤하면 자고 낮이면 일하고 배고프면 밥먹는 즐거운면 웃고 싫은 소리들어면 화내고 고함치고 사랑스러우면 사랑을 하고 싫어면 떠나버리고 하는 평상 그대로의 마음이 평상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른 평상심을 두고 조직된 규칙과 규울에 따라 새벽이면 종을 치고 목탁을 치며 도량을 돌고 식사시간에는 운판을 쳐 모여서 함께 같은 도구로 규울에 따라 밥을 먹고 수행도 짜여진 틀에 따라 선방에 모여서 하고 죽비에 따라 휴식하고 또 실참시간에 참선을 하고 하는 모든 짜여진 규울과 규칙에 따라 하는 것은 전부다 조작되고 자여진 가짜의 형식인데 왜 그렇게 햐고 있으면서 무슨 깨달음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하면서 마치 꿈속같은 생활을 하면서 알음알이 견문각지로 마치 내가 스님인척 하면서 공짜로 주는 밥을 먹고 주지가 주는 일상생활비를 타 쓰는 그대들은 사실 축행이나 화단에 심으놓은 꽃과 같이 형상과 형식에 맞추어 놀고 있는 인형같은 생활를 하면서 그것이 마치 승인야 여긴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축을 기르는 주지의 구호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부속으로 로벗처럼 사는 것이 수행이라고 착각하며 중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문답을 한답시고 경전에 있는 12경계를 질문이나 하고 18계의 경계와 형상에 집착하여 묻는 것을 보면은 과연 그것이 선문답일까 여겨진다는 것이다. 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그대들이 함께 눈깆만 스쳐도 지금 여기서 무슨 행동을 할까를 스스로 알고 쳐신하는 자율적 자각적인 행동과 말이 그대로 진리이며 진여인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래서 하신 말씀인 “노파심으로 이토록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모르니”라고 하신 것은 내가 그대들을 이 자연서른 평상심 그대로가 다 진여를 알고 있고 느낄 수 있고 밝힐 수 있도록 선문답을 통하여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 늙은 몸을 이끌고 힘들지만 오직 그대들이 스스로 자각(自覺) 할 수 있는 인연이 되기 위하여 선기방편을 베풀고 있지만 사실 지금 여기인 공각적 실상을 밝혀 주려고 힘쓰고 있지만 알아차리지를 못하는 것은 참으로 조작된 법집과 형식논리에 의한 논리와 법칙에 사로잡혀 알아차리지를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다는 뜻을 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배부르게 밥 먹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무얼 찾느냐.” 매일 같이 공양시간되면 공양간에 갔어 밥을 먹고 잠자고 슆으면 방에 들어가 자고 법회시간이면 이렇게 모여서 쓸데없는 이른 선문답이나 하면서 마치 자기가 진리를 연구하는 과학자나 되듯이 하고 있는 꼴이 너무나 우숫다. 오직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다 진실여상한 진여인데 무엇을 찾는다는 말이냐.
그러니 조작하고 사기였어 그대들은 다 시기꾼이라고 멏번이나 꾸짓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떠났어 말하고 행동하면 이것은 다 남을 속이기 위한 사기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구후를 이렇게 날립니다. “그리고는 주장자로 몽땅 쫓아냈다.” 부처님의 초기불교 같이 고행수행이든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을 하듯이 모든 것은 스스로 자각(自覺)해야 하는 것이며 밖에는 그 무엇도 없으며 모든 불교의 행위와 수행은 다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며, 격외소식(格外小識)이며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이루어 지는 밀교(密敎)임을 믿고 실참수행으로 직지인심(直旨人心)이라 각자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알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야 하는데 이른 무슨 선문답(禪問答)이 필요한가 하고 호통치시며 행위(行爲)가 아닌 무위(無爲)이를 통하여 면벽수행을 하든 무엇을 하든 다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만이 다 이루어 지는 것이니 이 선문답도 하나의 법집이 될수 있다는 뜻으로 주장자를 휘둘러 모든 사부대중을 쫏아 내 버립니다. 이 운문선사의 깊은 심지(心地)를 투득하시기를 두손모야 봅니다. 옴 바아리 믹~!!!!!!!!!!
그 때 한 스님이 물러가지 않고 바로 삼배을 올리며 물었다.
["여름도 끝물이라 가을로 들어서는군요. 누군가 길을 막고 물어온다면 무어라고 대꾸할까요?"] 여기서 이 한 스님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여름도 끝물이라 가을로 들어서는군요”라고 불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를 물었습니다. 여름도 끝물이란 말입니다. 여름이면 여름이지 여기서 삼세인과법을 적용시켜 끝자락이라고 했으니 시간상 초여름 초복 중복 말복이라고 하여 여름을 시간대로 분류한 말입니다. 진리나 도리에는 두 가지의 바라보는 관점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입니다. 시간을 두고 바라본다면 태초로부터의 과거심(過去心)과 지금 여기의 현재심(現在心)과 아직 다가 오지 않은 미래심(未來心)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연기적 현상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량수(無量數) 무량광(無量光)일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팔만사천 대장경도 부족합니다. 이 찰라 찰라사이로 벌어지는 연기적 현상은 말로써도 글로써도 생각으로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시간을 두고 바라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공간적(空間的)으로 시간을 찰나사이로 탁 끊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라는 찰나사이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인 것입니다.” 돌~!!!!!!!!!
여기서 다음 말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누군가 길을 막고 물어온다면 무어라고 대꾸할까요?"라고 했는데 이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에서 본다면 묻는것도 길을 막은 것도 없는 하나의 형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을 하고 답하는 선문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제법실상이 드러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을 하십니다.
이른 쓸데없는 생각이 필요없다고 다 주장자로 물리쳤는데 이른 말이 왜 필요 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연기법으로 본다면 무량수 무량겁으로 벌어지는 것은 다 그대들의 알음알이 견문각지이라 하시면서 이렇게 답을하십니다.
"대중은 뒤로 물러나라."하시면서 지금 여기의 제법실상을 두고 무슨 것을 본고 듣겠는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제법실상인데 무슨 선문답이 필요할까 그러니 쓸데없는 말을 묻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공간적으로 이렇게 드러나 있는 제법실상을 그대로 믿는다면 어 어디에도 걸려 들지 않을 것이라며 재중은 뒤로 물러나거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한 스님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런 시절인연이 왔는데 왜 물러나겠습니까. 끝까지 묻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이나 회광반조(廻光返照)해 보든가 역설적으로 물러나라니 다시 달려들어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문선사는 더 이상 이런 선문답을 해 보아야 이 스님의 안목이나 견처로는 어쩔 수가 없다라고 인정하시고는 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이 한 스님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라고 오히려 따지고 있다. 이것은 시비분별인 것입니다. 시와 비가 하나인데 왜 차별심과 분별심으로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할 노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나에게 한 철 밥값을 돌려다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래 여기에 왔어 주는 밥먹고 행랑에서 자고 법회에 나오서 이른 말도 안되는 질문이라 하고 있으니 왜 우리 문중에서 돈들여 자네같은 스님을 뒤를 봐 주어야 하느냐 자네는 아직 밥값도 못하는 천제이니
그동안 생활한 밥값이라도 되돌려 다오라고 혹독하게 비판을 해 쫖차내 버립니다.
그 때 또 한 스님이 나와서 예를 올리며 운뭍선사에게 묻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야 이 법회를 찾아왔습니다. 이곳 가풍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이 스님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얼마 전에야 이 법회를 찾아왔습니다.”라는 시간적으로 물었습니다. 이것은 연기법이며 차별과 분별심으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말은 “이곳 가풍은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마자 처음으로 질문을 올리면서 그 동안의 운문선사가 해온 종풍을 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돌한 질문입니까? 종품을 보려면 법회에서 멏번이라고 묻고 답해서 차츰 알아가는 것이지 무슨 종풍이 어떻고 법통이 어떻고를 묻는단 말인가 그래서 운문선사는 이렇게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한마디 질문도 받지 않았으니 어떻게 말하겠느냐?" 선문답이란 진여의 실체나 깨달음으로 가는 항상일구(恒常一句)를 물어야지 무슨 종풍이 어떻는지는 지금부터 여기 있어보면 알 것을 오늘 처음 왔다면서 남의 종풍이나 거들먹거리니 참으로 가소롭다.하는 뜻으로
“한마디 질문도 받지 않았으니 어떻게 말하겠느냐?"하시면서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한 스님은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시방국토 가운데 일승법(一乘法)이 있을 뿐이라 하니, 무엇이 일승법입니까?" 이 스님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일승법(一乘法)울 물었습니다. 그럼 일승법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긴 참으로 난해 합니다. 논술적으로 일승법을 먼저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법문은 성철스님의 법문입니다.
일승법(一乘法)과 방편(方便)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만 있고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부처님의 방편설도 빼놓는다.
시방국토중(十方國土中)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 제불방편설(除佛方便說)이라고 화엄경을 인용해 본다면
쉽게 말하자면 온 시방세계는 이대로가 항상 있는 세계인 상주법계(常住法界)이고, 걸림이 없는 세계인 무애법계(無碍法界)이고, 하나의 참 진리의 세계인 일진법계(一眞法界)인데, 이것을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일승법(一乘法)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가 있음으로써 무애법계, 무장애법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시 이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인데 부처님이 그것을 바로 아시고 그것을 중생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전체가 일승뿐입니다. 무애법계, 일승법계뿐이지 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고, 온갖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일승 이외의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딴 것이 아니라, 못 알아들으니까 방편(方便)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그것이 실설(實說)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처님 법문을 알려면 일승법계의 소식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방편설로는 모릅니다. 방편설은 실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고서 '돈설화엄(頓說華嚴)'이라고, 처음 한꺼번에 {화엄경}을 설해 버렸습니다. {화엄경}을 설(說)해 놓으니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없고 하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처님 혼자 아무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나 안 하시나 중생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워 이러하니, 차차 키워 가지고 귀도 조금 듣고 눈도 조금 밝게 해 가지고 일승(一乘)법문을 해야 되겠다, 하고 물러섰습니다. '퇴설삼승(退說三乘)'이야, 물러서서 삼승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막 나옵니다. 이런저런 말도 나오고, 유치원 아이를 보면 유치원 아이에 해당하는 법문을 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또 그에 해당하는 법문,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 보아 가면서 옷 해 입히는 식입니다. 키 작은 사람은 짧은 옷 해 입히고, 키 큰 사람에게는 긴 옷 해 입히고,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팔만 사천 법문이 벌어진 것입니다. 중생 근기가 팔만 사천으로 모두 다 각각 다르니, 그게 소위 방편설(方便說)입니다. 그것은 전부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처음에 일승법문, 돈설화엄 할 때 그때에 모두 알아 버렸으면 눈깔사탕 따위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유치원 이야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이야기 모두 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할 수 없이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법문이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정도 커졌습니다. 부처님 법문을 알아들을 만큼 근기가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에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으로 말한 연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화엄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이고 최후에 또 {법화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인데, 화엄·법화 중간에 40년 동안 설한 그것은 전부 다 방편설입니다.
거기에 가면 온갖 법문이 다 있습니다.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그것도 실제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승(一乘)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 이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것은 실법(實法)이니까.
일승이란 화엄·법화가 일승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화엄·법화는 어떤 진리에 서 있는가? 화엄·법화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일승 원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조직하여 집대성한 사람이 천태 지자(天台智者)선사입니다.
{법화경}에 대해 천태 지자선사가 정의(定義)한 말씀이 있습니다.
"원교라 함은 중도를 나타낸 것이니 양변을 막아 버렸다. 원교자(圓敎者) 차현중도(此現中道) 차어이변(遮於二邊) 일승 원교란 것은 실지 그 내용이 중도(中道)인데 중도란 것은 양변을 여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양변이란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이것이 전부 양변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전부 양변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차별적 양변이란 것은 실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양변을 쌍으로 막고 정히 중도에 들면 이제를 쌍으로 비춘다.
심즉명정(心卽明淨) 쌍차이변(雙遮二邊) 정입중도(正入中道) 쌍조이체(雙照二諦) 말하자면 도를 자꾸자꾸 많이 닦아 가지고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연히 밝을 것 아닙니까. 수도(修道)를 많이 해서 마음이 완전히 밝고 깨끗해져 버리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이 얼음같이 그렇게 깨끗해져 버리면, 그러면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런 동시에 정(正)히 중도에 들어갈 것 같으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그것도 양변과 같은 것인데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이 밝아 가지고 확철히 도를 깨칠 것 같으면 쌍으로 이변을 막아 버린다, 이변을 초월한다고 했고, 그러면 그것이 중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중도에 들어가면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은 진속이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제(二諦), 진(眞)과 속(俗)이 서로 합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합합니다. 서로 융합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차별적인 선악이나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는 동시에 이것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중도라 하며, 이것이 원교(圓敎)이고, 이것이 일승이다, 그 말입니다.
천태스님 말씀은 {법화경} 위주인데,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이란 것은 현실 이대로가 절대(絶對)라는 말로, 이것은 그 원리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현실의 모든 차별적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에 있습니다.
그러면 '차(遮)'와 '조(照)'라 하는 말, 양변을 초월한다[遮]와 양변이 서로 통한다[照] 하는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
양변을 여읜다, 초월한다는 이 말은, 비유를 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꽉 끼어 있어 해가 안 보이지만 구름이 확 걷히면 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변을 초월한다는 말은 '구름이 걷힌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양변이 서로 통한다 하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구름이 걷혔다' 하면 으레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해가 드러났다'고 하면 '구름이 걷혔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遮)'와 '조(照)'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쌍으로 걷히고 쌍으로 초월하고!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통하고! 쌍으로 통한다 하는 것은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승원교, 중도라 하는 것은 모든 차별을 초월하고 모든 차별들이 원융무애하여 서로 융통자재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세계를 일승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진법계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평등하여 전부 진여(眞如)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애법계(無碍法界)라 합니다. 유무도 가림이 없고, 시비도 가림이 없고, 선악도 가림이 없고, 이래서 모든 것이 무애자재, 무애법계인 것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 즉 무애법계이고, 무애법계 즉 일진법계인데, 이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법화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원교대종(圓敎大宗)이라고 하는 화엄에서는 일승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셔씁니다. 성철스님의 법문은 다음시간을 빌어 마감을 하고자 합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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