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옮기셨으니
「예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장 13절)」
우리는 이 말씀을 믿기 힘듭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데 옮기셨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읽으면서도 거짓말처럼 들립니다. 성경에는 거짓말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러셨는데, 현실적으로 보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말씀을 분명히, 옮기실 것이다가 아니라 옮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옮겨지지 않았는데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고행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벌써 옮기셨다 하셨습니다.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곧 구속 죄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장 13절)」
여기서도 얻을 것이라가 아니라 얻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완성된 말씀을 해 주신 후 이런 부탁을 하십니다.
“못하겠지? 그러나 좀 믿어라.”
사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확실히 주어졌고, 나는 거기 간다고 생각하고, 그런 마음이 들면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기고, 점수를 매기시고, 컷트라인이 있어, 그 만큼 점수를 얻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전에 컷트라인이 아브라함의 선인줄 알았습니다. 아들 하나쯤은 가져다 바쳐야 하는데, 못 갖다 바친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지고 쉼, 즉 안식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 하나 필요 없이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안식이 온다는 것입니다.
뉴 스타트 프로그램은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시는 것 이외에 무엇이 또 필요합니까?’ 하는 것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해 보면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 무엇을 해야만 마음의 안식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운동을 하고 있는 의사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건강한 음식․운동․물․햇볕․절제․깨끗한 공기․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 외에 다른 것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여러분 마음에도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그 외에 하나도 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결과들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신 모든 자연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드디어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는 받을 것을 받았구나 생각하십시오. 마음에 편안함이 없으면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얼 하시더라도 절대로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이 뉴 스타트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 자꾸 병 낫는 것이 성공이라고 해서 이상합니다만은 - 그것을 완전히 깨닫고 드디어 자기가 하던 노력을 중지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만 마음껏 받는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공기의 오염도 심하고, 더러워져 가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데, 왜 성경은 옮기셨다고 말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장 4절)」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입니다. 육체라는 것은 죄입니다. 사단의 영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사단의 영이 들어가서 서서히 유전 인자를 퇴화시키고, 이기적이 사람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진노의 자녀를 잘못 해석하면 하나님이 아주 무서운 분이 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깨끗한 사람을 창조해서 생기, 생명의 기운, 즉, 성령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원칙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생기를 거부하고 죄, 즉 악령을 받아 들였습니다. 사람이 생명이 되어야 하는데 다른 엉뚱한 영을 받아들여 육체가 되었습니다. 결국 육체가 되어버리니까 악령이 지배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가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속타심의 상태가 바로 진노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냐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 보다 착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서」라는 성경절을 이렇게 바꿔야 됩니다. “점수를 매기시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착한 행실을 보고”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로 하셨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생기가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움직이는 핵산에 불과하며 하나의 물체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핵산마저 빨리 파괴해 버리는 죄가 들어가 있습니다. 핵산은 알맞은 온도․공기․물․영양소만 공급해 주면 오래 삽니다. 그런데 핵산을 파괴하는 죄 (스트레스를 의미) 가 들어가, 입맛을 바꾸어 놓아 우리가 먹지 못할 것을 먹도록 하고, 절제해야 할 때를 잊어버리도록 하여 자신을 파괴하면서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뉴 스타트 프로그램이란,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사람의 상태로의 회복, 또 생기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온전한 의미의 생명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위마에 오셨으니까 생명이 되어가고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가 몸을 깨끗이 하여야겠다. 그리고 내가 이상한 방법으로 병을 낫기보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서 건강해져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나게 해 주시는 성령, 그 생기이신 분을 통해서, 비록 몸이라도 순간적으로 받아들인 말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진짜 생명처럼 훌륭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제는 생명이 되었다고 취급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살리실 것이’ 아니라 ‘살리셨고’, ‘앉히실 것이’가 아니라 ‘앉히셨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정말 혼동이 됩니다.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지극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착해서 그 착한 행실의 대가로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세세토록 전하기 위해서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성경의 종교는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는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선사업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잘 봐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면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할 것입니다. “저는 70만 불이라는 수입을 다 버리고 위마라는 곳에서 뉴 스타트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를 일곱 개 세웠습니다.” 이러다보면 컷트라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것을 정말 믿을 수 있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편안할까를 깨달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상태가 바로 안식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시장에 가지 않고, 편지 안 읽고, 신문 읽지 않는 것을 안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적인 안식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엿새동안 먹고살겠다고 바빠서 명상을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루를 주셔서 그 날만은 내가 여기서 고생하고 있는 몸이라도 사실은 내가 하나님과 보좌에 같이 앉아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안식의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이 나야만 하나님께서 옮겨 주신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그건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그 안에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저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면 그 말씀을 알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글자만 가지고 말하는건지.’ 또 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렇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건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우리들 상상 속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저는 하나도 기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앞의 성경 절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보도 아니고, 바보들에게 편지를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똑똑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히 시간 감각이 없습니다. 그는 현재와 미래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고, 4차원의 세계는 현재와 미래가 왔다갔다하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4차원 이상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감이 좀 잡힐 것 같은데, 그러나 이것 역시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복권 제도가 상당히 유행하고 있습니다. 당첨이 돼서 많이 받으면 이백만불, 팔백만불을 받기도 합니다. 복권 발표가 나면 사람들이 미칩니다. 백만불을 받았다 하면 넘어지고 난리 납니다. 저는 그들을 가만히 보면, 그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한 후에도 넘어질까 안 넘어질까 궁금합니다. 백만불이 중요한지, 우리가 영원토록 예수님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지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입니다. 한번은 복권이 오천불에 당첨이 됐다고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 친구 좋아 죽는 답니다. 오천불이 사람을 저렇게 기쁘게 하는데, 우리가 하늘나라에 이미 가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믿는 많은 사람들은 오천불에 더 기뻐합니다. 하늘나라에 가 있다라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복권 오천불이 당첨이 되었다고 텔레비전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오천줄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틀림없이 믿습니다. 그래서 기쁜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내 번호가 나왔으니, 그 돈은 내 것이다 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성경에 적용하면 이 세상은 변화할 것입니다. 구두쇠인 그 친구가 한 턱을 내겠다고 말하더란 말씀입니다. 그 친구가 변화하려고 억지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 감사하니 한턱 내고 싶어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가 받은 바 계시와 은혜가 풍성하여 이렇게 변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받은 것을 나누어 드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업을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희생하라는 말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구 박사는 참 훌륭한 사람이야. 하나님 사업을 위해 70만불의 수입을 감수하다니'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70만불보다 7000만불보다 더 큰 것을 얻어서 저는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이 나누는 과정에서 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금광을 얻고 있고, T-임파구가 강해져 가고 있고, 아마도 그 동안 자라났던 암을 싹 죽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가 보아야 발견할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제가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늘나라에 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같이 믿어 주시면 춤이라도 같이 출텐데 하는 생각이 솟아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여기 계신 자원 봉사 대원들이 이 상구 박사를 위마에 가서 도와주면 하나님께서 점수를 5점 더 주신 대서 올라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운 것이 많고, 얻은 것이 많아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을 나누어주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 올라 오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과정이 자원 봉사자 각자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물론 희생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여태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온 이상 희생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내가 하늘나라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확실하면 할수록 내 믿음이 확실해집니다. 또한 믿음이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내 생활이 힘이 나고 내 하는 일이 더 보람되고, 일이 더 많이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싶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해 놓은 것을 보면은 왼쪽 뇌가 나이가 들수록 자꾸 훈련이 되어 더 똑똑해진답니다. 이 때까지 심리학자들이나 의사들은 왼쪽 뇌가 점점 퇴화하여 기억력이 없어지고, 계산을 잘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왼쪽 뇌와 오른쪽 뇌를 검사해 보니까 왼쪽 뇌는 나이가 든 사람이 훈련이 더 잘 되어 기능이 더 좋은데 반하여 놀랍게도 오른쪽 뇌의 기능은 떨어지고 있더랍니다.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느낌을 무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기억력은 뇌세포의 기능이 물론 좋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른쪽 뇌와 왼쪽 뇌가 함께 활동해야만 더 분명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주 혼이 난 일을, 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른쪽 뇌가 혼이 나서, 어떤 느낌이 따라오고, 그 사실이 있으면, 그 사실과 느낌이 함께 작용할 때 기억이 더 잘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느낌을 무시하는데, 사실 학문적이고, 과학적으로 볼 때, 새로운 것을 더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나는 하늘나라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라는 성경말씀을 가르치면서 보니,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노화 현상도 늦게 오고, T임파구도 그 강함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고, 노화 방지를 위해서 성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화 방지나 건강 유지는 하나님을 믿을 때 생기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정말 치명적인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시간관념이 없습니다. 분명히 모두 되었다고 말씀하며, 구원을 얻을 것이라 가 아니라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말씀에 확신을 얻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 집은 지금 토끼를 기르고 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토끼를 기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때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양이가 뒷마당에서 무언가 잡을 태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쥐를 잡나보다 생각하고 힐끗 쳐다본 후, 아침 식사를 하려고 들어가는데, 쥐라고 하기에는 색깔이 연하다는 느낌을 오른쪽 뇌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보니까, 회색빛의 산토끼 새끼가 고양이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토끼에게 자비가 풍성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읽은 말씀같지 않습니까? 네가 토끼를 구원하러 나간 것은 토끼가 착해서가 아니라 제가 토끼에 대한 긍휼이 풍부해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단계를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대개의 다른 경전의 하나님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저는 우선 나가지 않고 창문을 열고 토끼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토끼야 고생이 많지. 구원 받고 싶으면 착해볼래? 착한 일 좀 해보지, 그러니.” 그래서 사람들은 이 토끼가 고양이 앞에서 착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묘한 신앙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이 없고, 착한 일을 해도 구원의 길은 까마득하기만 한 것입니다. 저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제가 나가니까, 고양이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토끼를 만지니까, 발로 차고 제 손을 할퀴어서 제 손에 피가 났습니다. 고양이의 발톱에 할켜져서 피가 난 제 손에 의하여 토끼는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골로새서의 말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낸 것처럼 주인이 토끼를 고양이의 권세에서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제가 피를 흘려가며 토끼를 구원해서, 이제는 토끼가 안전한 품으로 옮겨졌는데, 토끼는 그것을 믿지 않고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토끼야, 내 피 좀 보아라. 이피.” 이렇게 말해도 토끼는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성경을 믿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착하지 않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러한 말을 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자신들은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착하고, 나오지 않으면 착하지 않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도 착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교회에 나오겠다는 말은 내가 믿지 않던 토끼였는데, 이것 좀 믿었으면 한다는 표시일 뿐입니다. 교회에 나오시면, 이러한 말씀을 듣고 점점 그 믿음이 조금씩 강해진다는 말이지, 어떻게 교회에 나온다고 모두 착한 사람입니까? 그래서 성경 말씀이 믿어지면 감사하고, 그때부터 사람이 좀 변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교회에 나온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이 착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이 착하지 않다고들 말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니꼬와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토끼는 구원을 받았는데도 아드레날린이 나와 자신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믿지 못하고 불안하여, 고양이 발톱으로부터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하늘나라로 옮기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고 우리를 고양이의 발톱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는데도, 착하면 구원받는다고 계속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 토끼와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해방되어 내가 드디어 긍휼의 풍성함으로 인하여 미리 하늘나라로 옮겨졌다는 말씀을 믿는 순간 우리는 기뻐하여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종교는 굉장히 특수한 종교이며, 현실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말도 되지 않는 종교며, 믿기 힘든 종교입니다. 성경은 4차원의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토끼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믿어’하고 소리치면 믿지 못하고 고양이의 소리인 줄 압니다. 그러니까 토끼를 믿게 하려면 사랑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토끼를 한 마리 키우는데, 마당에 내 놓고 운동을 시킵니다. 토끼를 토끼장에만 가두어 놓으면, 근육이 없어지니까 제가 토끼에게 뉴 스타트를 시킵니다. 그런데 내 놓았다가 다시 잡아넣으려면, 어떻게나 빠른지 고생입니다. 토끼가 잡히는 과정에서 얼마나 아드레날린이 나오겠습니까?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방법은 오직 사랑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읽다가 성경의 원칙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토끼에게 먹이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렇게 계속했더니, 이제는 토끼가 저를 알아봅니다. 다른 사람이 나오면 가만히 있으면서, 저만 나가면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토끼장을 열고 토끼를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습니다. 토끼가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토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을 받을 때 생기는 반사 작용인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깡을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믿을 능력이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뼈 속 깊이 깨달았을 때 믿음이 자라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믿으셔야죠. 믿으셔야죠.”
자꾸 말하면 여러분은 오히려 불안해지고, 아드레날린이 나와서 자신의 T임파구를 자기가 죽이게 됩니다. 제가
“토끼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거야.”
하고 토끼를 쓰다듬어 주어도 무서워합니다. 제가 만지면 만질수록 아드레날린이 더 나오는 것입니다. 만지지도 못하니까, 시간이 좀 걸려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오래 참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저는 토끼를 위해 상자도 구해오고 먹이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고양이가 나에게 먹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토끼를 깨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토끼는 스스로 깨달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믿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성경을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가보면 자꾸 믿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려고 사랑을 보여 주실 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사랑을 볼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도 토끼를 믿도록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저의 아들의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그 녀석이 보니까, 토끼가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하늘나라로 옮기었는데, 좋은 음식을 주었는데도 먹지 않고, 좋은 말씀을 주는데도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가 우리 아들이 여덟 살 때인가 아홉 살 때인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있다더니, 기타를 가지고 왔습니다. 토끼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해도 소용없으니까 음악으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기타를 가지고 와서 노래를 불러도 토끼가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침에 있었던 일인데, 그 날 밤 드디어 토끼가 무얼 먹기 시작하고 우리가 좀 건드려도 움찔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 토끼가 믿어 주고, 음식을 먹어 주는 것에 우리 아들하고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죄인이 믿는 순간에 하늘의 천사들도 ”야, 믿는다!“하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답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착해야지. 죄를 한 순간도 지으면 안돼.“하면서 항상 긴장해 하니까 안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토끼가 믿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날 밤 기분 좋게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토끼가 던져 준 것을 다 먹고, 똥도 변비증 없이 싸 놓아서 얼마나 기쁘던지,
”토끼가 크게 자라면 우리 뒷마당에 내 놓고 훈련시켜서 나중에 자유롭게 내보내야지. 영원히 살도록 해주어야지.”
하고 생각하니 더 기뻤습니다. 그 날 우리 꼬마는 학교에 가고 저는 환자를 보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까 토끼가 없어진 것입니다. 토끼가 왜 도망갔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토끼는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뛰어 나간 것 같았습니다. 고양이가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 놓았었기 때문에 고양이에게 잡힌 것도 아니고, 토끼는 틀림없이 집 안 어딘가에 있을 것을 확신하고 저는 토끼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토끼를 찾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려고 달아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아담이 죄를 짓고 나무 뒤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이 자신의 아들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아담을 찾는 과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찾는다는 과정은 죄인들을 위해서 참으로 은혜로운 과정인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무시한 말로 조사 심판이라고 말하는데, 이 과정은 꼭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도망갔으면 “믿지 못하면 할 수 없지. 도망 가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토끼를 찾았습니다. 구원을 해주었는데 믿지 못하고 도망갔으니 또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찾아서 보니까, 토끼가 구석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잡으니까 도망가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상자에 집어넣어 놓고, 상자가 너무 낮아서 뛰어 나올 것 같아 상자를 좀 높였습니다. 뉴 스타트를 시켰다는 말씀입니다. 건강 메시지도 주고 상자도 올려놓으니까, 뛰어 나가지 못하고 안전하게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타를 쳐주니까 그 날 밤에 또 토끼의 마음이 풀려 잘 클 것 같았습니다.
마음을 푹 놓고 그 다음날 제가 출근하면서 토끼를 햇볕이 잘 들고, 공기가 잘 통하는 창문가에 두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죽어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토끼가 왜 죽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8년 전부터, 성경을 공부한 후에 제가 성경에 대한 의문이 생겨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의 생활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토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 같은데, 토끼가 죽었던 것입니다. 토끼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토끼의 죽음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니까 창문 곁으로 우리집 고양이가 지나가면서 ‘야옹’합니다. 토끼 냄새가 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요즘 야옹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네가 구원받을 줄 아느냐? 착해야 구원받지, 네가 뭐 착한 일 한 것 있느냐? 너는 아직도 내 손안에 있어.”입니다. 그 말이 바로 야옹인 것입니다. 그러니 상자 안에서 토끼가 불안해졌습니다. 고양이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불안해져 안식이 없어지고, 또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노력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담이 높아 뛰어 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자기 자신을 도피시키려고 정신없이 발버둥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저는 교회 안을 보고 있으면 죽은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들은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저는 토끼를 살릴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그 분들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를 흘리게 하셨으니, 하나님 보시기에는 당신께서 분명히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복권 당첨이 된 사람이 텔레비젼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고서 전부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듯이, 우리가 분명히 당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을 때 영적인 능력이 솟구쳐 오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말씀을 깨달으면 정말 기쁘고 엔돌핀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손을 탁 대니까, 피가 돌고 불이 번쩍이는 것이 아닙니다. 불이 번쩍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내용없이 불이 번쩍거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 말씀으로 하면 독주에 취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야지 독주에 안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독주가 범람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말씀을 믿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당장 이 설교를 분명히 해도 여러분은 믿기 힘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저보다 모자라는 사람이라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 제가 여러분보다 조금 더 구하는 것이 많은 건지 모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도 하늘 보좌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설교를 하게 해주시고, 설교를 하면서 제 자신의 마음이 더 굳어집니다. 성경에서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는 입장일수록 참으로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부부 사이에 서로 사랑을 주는 입장이 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면, 서로 서로 속에서 한이 맺힙니다. 그럴 때, 사랑을 하면 서로 서로 치유가 됩니다. 한이 맺혀서 종교를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을 하는 것은 그 한을 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사랑을 줄 능력이 없는데, 그 사랑을 줄 능력을 구하는 의미에서 신앙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받아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구하기만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줄 때 그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제 짤막한 이야기 하나 하고 말씀을 끝내겠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여성 잡지를 한번 읽기 시작하면 시간이 많이 갑니다. 잡지를 읽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김지미씨가 무당이 되었다.’ 이러한 것을 알아서 무엇합니까? 저는 김지미씨사 무당이 되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을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서는 무언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분이 욥기 같은 설교를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귀신만 있고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생각하면 무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가 귀신의 세력과 하나님의 세력으로 분리된 사실을 깨달으면 무당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분은 계시지 않고, 귀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주당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우리 집사람이 여성 잡지를 좋아합니다. 제가 볼 때는 좀 답답합니다. 제가 그렇다고 잡지나 신문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르시는 뉴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운전할 때 라디오도 틀어놓고, 뉴스도 다 듣습니다. 우리가 산 속에 산다고 현실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동사태에 관해 잘 알고, 일가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여성 잡지를 보고 있으면, 성경 좀 보라는 말이 자꾸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몇 번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한번은 누가 우편으로 여성 잡지를 보내왔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참 좋아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날 밤은 일찌감치 목욕하고, 잠자리에 들겠다고 말하더니, 아홉시가 되니까 잠자리에 들겠다고 그르질 않겠습니까. 저는 공부할 것이 있어서 밖에 나가려는데, 그 사람이 목욕하고 침대에 들어가 잡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한 열시 쯤 돼서 방에 들어가 보니까, 그 책을 보고 있는데 그 사람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제가 딱 보는 순간 좀 우습기도 하고, 좀 한심하기도 했습니다. 저런 데 저렇게 정력을 쏟다니, 아깝기도 하고, 그 정력으로 성경 공부나 하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집사람에게 “눈 나온다, 눈 나온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하는 순간에 성령님께서 오시더니 ‘멈추어라, 멈추어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성경 볼 때나 눈 좀 나오지.’하는 말을 참고, 우리 침실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샤워를 하려고 옷도 벗고, 변기에 앉아서 저 혼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멈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속에서 ‘성경 볼 때나 눈 좀 나오지.’하는 말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잠잠하게 해부십시오.”
기도를 했더니, 제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있는데 우리 집사람이 목욕탕 안으로, 아무 말 없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손톱깎이를 찾아서 앉아 있는 저의 발톱을 검사하더니, 별로 길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발톱을 똑 똑 깎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발가벗은 남자 앞에서 발톱을 깍아줄수 있는 여자가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말고 그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 아까 말을 중단하기를 참 잘했다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기도 잘 한거야.’ 하시면서 이러한 면에 더 기도를 하도록 만드시는 분이지, 억지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집사람에게도 가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우리 집사람이 조용히 발톱을 깍으면서
“여보, 당신 ‘눈 나온다 눈 나온다’ 할 때 ‘성경 볼 때나 눈 나오지’ 하고 싶었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 집사람이 “당신 기도했지? 여보, 사실 성경 볼 때 더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하고 말하길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쳐다보면서,
“여보, 참 고마워. 당신이 스스로 참은 것은 아니겠지만, 당신 기도하고 참은 것 고마워. 여보, 우리 하나님 참 잘 믿었지.”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부 싸움이 터질 뻔했는데, 한쪽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새로운 안식과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믿는다고 바깥 세상에 나가서 큰 일을 하려고 하시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사이에 손을 잡으시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기도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은 것에 감동을 받는 것보다 여러분이 기도하셨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엄청난 엔돌핀이 나올 줄로 제가 믿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고양이의 야옹 소리에 다시 뛰는 토끼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로 인하여, 값없이 무조건 구원해 주신 은혜를 믿을 수 있도록 구하시고, 바라시고, 믿으시면서 기뻐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두 기도하시겠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지극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우리의 선한 행실보다는 아버님의 그 긍휼로 인하여, 또 아버님께서 자손 대대로 아버님의 자비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시니 우리가 이 마음속에 안식을 느낍니다. 아버지, 우리가 또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못하고 우리가 숨었을 때 다시 찾아 구원해 주시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주셔서, 이 세상에 아직 우리 육신이 있을지라도 아버님이 보실 때 더 확실한 사실을 우리가 믿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구할 때 응답하여 주시고, 그 응답 받음으로 인하여, 참으로 엔돌핀이 나오고, 혈압이 낮아지고, 혈당량이 떨어지는, 이러한 결과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우리와 함께 하여 주기고, 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우리 각자의 마음에 계셔 주시옵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