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
황 옥 근
나는 그를 미워했다
사라호 태풍이
백마강 모래폭풍이 몰아 닥쳤을 때
나를 부둥켜안고 달려 나갔던
그의 그림자가 싫었다
작은 가슴은 늘 그랬다
친구들과 수박 서리하던 때
원두막에 돌아앉아서
먼 하늘을 우러러 보시던
그의 모습이 두려웠다
구두레 나루터 뱃사공이
술 취해 잠든 사이
배를 노 저어 반대편 나루에
던져놓고 친구들과 구슬 치던
그날의 매 맞음이 서러워 미웠다
오늘은 그 사공이 보고 싶다
언제나 흥얼대며 시조를 읊던 뱃사공
그날의 그 소리가 왜 그리운 것일까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둔탁한 손마디의 느낌이
지금은 가슴속에 따뜻함으로 깃든다
지게에 나무 단을 한 짐 지고
땀 흘려 냄새나는 옷깃에서
구슬땀을 훔쳐내는 그의 행동은
간혹은 싫은 느낌으로 자리 잡아
그의 그림자가 되기 싫었다
그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미워했던 힘센 그이가
백발이 되어 나의 가슴에 왔을 때
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이가 나의 아버지 이었던가
꿈이었을까
그림자를 밟기 싫어서
멀리 돌고 돌아서 왔는데
돌아보니 내가 섰던 그길
어느 사이 백발이 된 그림자
나를 그리며 가셨던 그길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하고
홀로 먼 여행길에 올라서서
얼마나 한을 안고 가셨을까
너무나도 피곤에 지친 삶
칠남매의 뒷바라지에
땀 냄새로 일생을 걸었던 아버지.
DMZ의 봄
아직은
봄이 멀었나보다
얼어붙은 나뭇가지 사이
찬 바람만 불어와
긴 시간의 여행
찢겨진 세월의 아픔
긴 터널을 걷다보면
희미하게 보이는 작은 불빛들
가슴 설레는 수많은 밤
추위에 담요 한 장 없는
기나긴 밤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이별로 기억을 잊힌 날
살아온 날을 넘기며
봄을 기다리는 숫자를
가슴에 묻어 놓는다
수많은 영혼
봄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한을 남긴 채
저 들판에 누웠다
살아있는 자의
눈물이 메말라 가고
기다림에 지쳐
체념으로 바뀐 긴 세월
눈보라가 멈추면
훈풍이 불어오겠지 하는
나뭇가지 가지 사이로
사랑의 노랫소리도 멈추고
적막의 어둠이 내려온다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속에서 작은 별빛의
미로의 길을 찾아 길 떠난다
저 멀리 한 세기의 끝
우리의 봄날은 긴
터널을 가고 있음에
봄날은 아직 멀었나보다.
DMZ의 가을
나는 발걸음을 멈춘 채
눈물이 흘러 내렸다
철의 삼각지 철원
그대가 잠든 그곳에서
화산석 돌무더기 쌓아놓은
참호의 작은 구덩이
이름 모를 그대가 잠들었다네
돌이끼 가득 찬 곳
개머리판 없는 총구를 떨군 채
형태만 남은 모습에
왜 이리 가슴이 메어질까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둠에서 빛나고
달빛이 고요한 그날 밤
두려움이 얼굴을 타고 내리던
가슴 조이던 시간들
하나의 섬광이
젊은 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풀잎처럼 꺾여져
고통의 시간들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문득 동심의 세계에서 뛰어 놀던
어린 날의 시간들과
어머니를 그리는 시간위에
하얀 불빛 사이로
천사들이 나를 이끈다
뒹구는 철모 위에
낙엽이 한 잎 떨어지고.
황옥근
《한강문학》(2023) 시부문 신인상 수상, <녹색원> 대표, 진도군 소상공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