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무예를 익히던 훈련원(訓鍊院) (1)
현재 훈련원공원(을지로 5가 40-3번지)과 을지로 6가 국립의료원 자리에는 조선시대 무인들의 과거시험 장소로서 무예를 익히고, 병서(兵書)와 전진(戰陣)의 강습을 맡았던 훈련원(訓練院)이 있었다.
1917년 6월까지도 ‘훈련원’이라고 쓴 현판이 기와집에 달려 있었는데 이곳에 초등학교를 신축하면서 기와집은 간호부양성소의 건물로 고쳐졌다.
조선 건국 초에는 훈련관(訓練館)이라고 했으나 세조 12년(1466)에 훈련원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훈련원은 현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자리에 있다가 세조 때 을지로 5가의 훈련원공원과 을지로 6가 국립의료원 자리로 옮겼다. 임진왜란 후에 창설된 훈련도감은 현 종묘 옆의 세운스퀘어에 자리하고, 하도감과 염초청이 전일의 훈련원 자리에 들어섰다.
훈련원은 중요한 업무의 하나인 무과(武科)시험을 주관하는데 서울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70명과 각 도에서 뽑힌 120명을 합한 190명을 병조(兵曹)와 함께 복시(覆試)를 보아 28명을 선발하고, 최종적으로 전시(殿試)를 보아 등수를 정하였다.
훈련원은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서 시험을 보다가 낙마하여 다리를 다쳤으나 곧 옆의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다리를 묶은 후 다시 말에 올라 달렸다는 일화가 깃든 곳이다.
『한경지략』에 보면 훈련원은 조선 개국 초에 처음 설치하고, 무과시험과 무예에 관한 재주, 즉 무재(武才)를 연습하는 일을 맡았다고 하였다. 훈련원 곁에는 연자루(燕子樓)가 있는데, 돌로 만든 기둥이 굉장히 높았다고 전한다. 무과시험을 볼 때마다 훈련원이 1소(所)가 되므로 관원이 이 다락에 올라가 화살을 배부하면 무과를 보러 온 사람들이 다락 밑에 둘러서서 화살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훈련원 곁의 텃밭에 배추를 심으면 아주 잘 자라서 ‘훈련원 배추’로 유명하였다. 훈련원 주변의 넓은 공터에는 채소농사를 많이 지었으므로, 동대문 밖에 큰 채소시장이 서게 되었다.
또한 훈련원 내에는 복정, 또는 통정(桶井)이 있었다. 이 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겨울에는 덥고 여름에는 차다. 가물거나 장마가 들거나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 서울에서는 제일 좋은 샘물이다. 이 샘물을 처음 발견할 때에 큰 버드나무 뿌리 밑에 수맥이 있어서 그 뿌리를 깎아내고 우물을 만들었다. 마치 밑 없는 나무통을 묻은 것 같으므로 이름을 통정(桶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통만은 여태껏 우물 밑에서 썩지 않고 있으니 이 역시 기이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훈련원 부근에는 군인들이 많이 살았다. 조선시대 군인들은 요즘과는 달리 복무기간이 길어서 양인(良人) 남자는 대개 16 세부터 60 세까지 군역(軍役)의 의무를 담당하였다.
군인들은 일정한 월급이 없었고, 군대에서 사용하는 복장이나 무기도 스스로 마련하는 등 군복무는 괴로운 의무로 간주되었다.
훈련원은 조선 말 1907년에 한일신협약의 체결에 따라 일본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군대해산이 이루어져 이해 8월 1일 오전 11시,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1,812 명의 한국군을 비무장으로 훈련원에 집합하게 하였다.
이 당시 일본군 기병·보병·공병은 해산식장 주변을 경계하였다. 해산식에는 일본 군부 협판참장(協辦參將) 이하 일본군 고위층이 참석하여 해산식을 하면서 해산 취지를 알리고, 퇴직금을 지급한 뒤 오후 3시에 해산시켰다.
그러자 군대해산에 분개한 시위대대 제1대대 박승환(朴昇煥) 대대장이 자결하자 이를 전해들은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서소문동의 시위대 무기고를 파괴하고, 남대문 부근에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첫댓글 살아있는 역사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임 선생님, 늘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