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크리에이터
공간 크리에이터를 들어갔다. 원래는 목공을 하고 싶었지만 2학기에는 산아샘도 안 계시고 그 뒤에도 안 하신다 길래 얼른 들어왔다. 학교 벽 공간을 벽화로 채운다고 들었지만 첫 번째 프로젝트 수업은 체험학습이었다. 뮤지엄산이라는 안도 타다오가 건축한 미술관에 다녀왔다. 공간도 아주 넓었을 뿐더러 작품도 다양하고 처음 방문 한 곳이라 한참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공간 설명을 제끼고 충희샘과 민경이와 하릴없이 돌아다니며 작품을 구경했다. 건물이 하도 넓어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하고 길을 잃고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거대한 공간을 다녀왔더니 다음 주에 찾아간 모나무르라는 미술관은 조금 시시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미술작품을 때려 넣으니 계속 답답하다는 기분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비가 조금씩 내리는 흐린 날씨와 어우러지는 물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아서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작품을 구경해도 흘러가지 않는 시간에 근처 백화점에 들러 남은 시간을 때운 뒤 두 번째 프로젝트 체험학습을 마쳤다.
그 뒤로 세종국립도서관이나 청주현대미술관 등 여러 공간을 체험한 뒤에 우리는 학교 공간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디자인 자체는 그렇게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들을 여러 군데 배치해보면서 상상 속의 벽화 디자인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 강당 복도와 교무실 앞 벽을 흰 페인트로 모조리 덮어가기 시작했다. 이전에 자리하던 연두색 벽은 없어지고 하얗기만 한 벽이 새로 생겨났다. 그리고 드디어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벽화작업에 돌입했다. 윤슬언니가 그린 밑그림을 색으로 칠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리실 앞 벽면에 뚱이와 징징이를 그렸다. 처음에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 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와서 기분이 뿌듯해졌다. 이후로는 반대 벽에 바다의 바탕색인 파랑으로 캐릭터들의 주위를 채우고 하얀 페인트로 그라데이션을 시도했는데 결과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스펀지로 계속 두들겨주면서 어색한 부분이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프로젝트 집중기간에서의 마지막 벽화작업을 끝내버리고 말았다. 제각기 신체의 한 부분에 물감을 발라 빈 공간에 하나 둘씩 찍어 우리의 흔적도 결과에 남겼다. 활동분기 때 2022년 공크팀의 결과물을 보면서 그 사람들은 되게 뿌듯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도 이제 그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공간 크리에이터라는 프로젝트는 짧은 기간에 생각보다 많은 감정과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 있는 것 같다. 간디학교에 들어오기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협동심’과 ‘소속감’이라는 단어들을 바디커퍼션이나 공간 크리에이터를 통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고,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더 넓혀가고 있다. 이곳에서는 스스로라는 단어를 볼 수 있고, 함께라는 단어를 몸소 느끼고 만들며 생활할 수 있다. 그런 곳을 이 프로젝트 하나로 색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공크 팀에서 큰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붓과 물감만 있어도 하얗고 칙칙하던 벽을 화사하게 바꿀 수 있고, 그 결과만으로 내가 살아가는 어느 하루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 벽화를 그린 공간 크리에이터 팀의 일원이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포착한 순간들을 꺼내 볼 때보다 우리가 이 공간을 그려나가며 흘려간 모든 시간과 감정들이 텅 비어 있던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지 않을까 싶다. 정말 신기하다. 그림 하나를 그리면서 성장했던 작은 성취감 하나가 스쳐 지나가며 보이는 벽화 하나에 흰 종이에 갑자기 떨어진 검은 물감처럼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작은 것들은 언젠가 큰 것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가 보다.
이번 공간 크리에이터 인원이 저번 공간 크리에이터 인원보다 적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완벽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한... 것 같다. 먼저 윤슬언니는 뛰어난 예술성을 발휘해 아예 한쪽 벽면을 다 만들어버렸고, 민경이는 밑그림을 그리고 우리가 칠한 그림들에게 생기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승호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꾸준히 그림과 채색을 했고, 준우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도움을 주었다. 휘동이는 교무실 앞 벽면을 책임지고 디자인과 그림을 그렸으며, 예람이도 문과 문 사이 작은 공간을 크리에이트 해주었다. 서준이는 처음에는 많이 놀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림도 그리고 뒷정리와 걸레질도 하는 등 크게 성장한 것 같다. 나는 뭐, 여기저기 그림 그리고 채색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열심히 벽화를 함께 그렸다. 이번 벽화의 주된 배경인 푸른 바닷속을 표현하기 위해 죽어라고 때려댔던 그라데이션 벽도 이제 정이 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아샘과 기은샘이 대안학교 선생님의 멋진 그림실력을 뽑아 주면서 그렇게, 2023 공간 크리에이터 팀의 결과물 벽화 그리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이번에 첫 프로젝트를 잘 소화한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아직 발표라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동안의 과제들을 잘 수행한 것 같으니 힘들었든 힘들지 않았든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후회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 기준에 달하는 활동들을 완벽히 해냈다는 말이 되기에. 개미처럼 알차게 프로젝트 수업을 한 것 같다. 에세이라는 쉼표를 그었으니 이제는 마침표인 발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건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고, 여기서 그만 첫 번째 프로젝트 에세이를 마친다.
첫댓글 태리의 글을 읽으니 쌤 마음이 엄청 뿌듯하고 행복해진다.
탐방부터 열심히 모든 순간을 태리시선으로 찍어준 사진들도 고맙고
못한다 못한다 하면서도 꿋꿋이 손을 움직여 시도해보던 그 마음도 소중하게 느껴졌어
태리가 있어서 든든했고 또 재미있었다. 애 많이 썼어 태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