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성경본문 : 벧전 5:8
11) 우는 사자 -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대적 마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밤에 혼자 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진 적이 있으실 겁니다. 낮에는 아무렇지 않던 걱정이 밤이 되면 갑자기 커집니다. 별일 아니던 말 한마디가 자꾸 곱씹어지고, 잘 다니던 길도 늦은 밤엔 괜히 신경이 쓰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압니다. 방심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요.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다만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훨씬 더 실제적인 존재라는 것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지금 편안한 서재에 앉아 신학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지에 흩어져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벧전 1:1). 사회에서 밀려나고, 믿음 때문에 손해 보고, 언제 더 큰 고난이 닥칠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이 말씀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바로 앞 절인 5:7에서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라고 해놓고 바로 이어서 “그런데 마귀가 너희를 노리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얼핏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면서 왜 갑자기 사자 이야기가 나올까요.
사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여전히 유혹받고,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해서 정신줄을 놓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맡겼기 때문에, 그 믿음 위에서 더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자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
베드로는 여기서 두 개의 명령을 아주 짧고 강하게 붙여 씁니다. “근신하라” 그리고 “깨어라.” 헬라어로는 νήψατε(네읍사테), γρηγορήσατε(그레고레사테)입니다.
νήφω(네포)는 원래 “술에 취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문자적인 음주 문제만이 아니라,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은 맑은 정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베드로는 바로 앞 4:7에서도 같은 단어를 씁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화려한 유혹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무감각함입니다.
그리고 γρηγορέω(그레고레오)는 “깨어서 지켜보다, 경계하다”는 뜻입니다. 근신이 내면의 상태라면, 깨어 있음은 바깥을 향한 경계입니다. 두 단어가 나란히 명령형으로 붙어 있다는 것은, 이것이 한가한 권면이 아니라 매우 긴박한 경고라는 뜻입니다. “정신 차려라. 그리고 계속 눈을 뜨고 있어라.”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할까요. 이유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여기서 “대적”이라는 단어, ἀντίδικος(안티디코스)는 원래 법정에서 나와 맞서 있는 상대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막연한 어둠의 기운 같은 것이 아니라, 나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귀” διάβολος(디아볼로스)는 “비방하는 자, 참소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마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사람을 고발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욥기에서도, 스가랴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존재를 “우는 사자” λέων ὠρυόμενος(레온 오뤼오메노스)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우는”은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 아니라 포효한다는 뜻입니다. 사자가 먹잇감 앞에서 내지르는 그 소리입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περιπατεῖ(페리파테이)는 현재형입니다. 한 번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욥기 1장에서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겹쳐집니다. “찾나니” ζητῶν(제툰) 역시 계속되는 탐색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 καταπιεῖν(카타피에인) “삼키다”는 그냥 좀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집어삼킨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귀는 무작위로 아무나 건드리는 존재가 아니라, 정확히 우리를 겨냥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완전히 무너뜨릴 기회를 찾아 돌아다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그리는 영적 현실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극적인 장면을 떠올립니다. 큰 유혹, 큰 죄, 큰 사건.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무너지는 자리는 대부분 그렇게 극적이지 않습니다.
바빠서 기도를 놓친 한 주가 두 주가 되고, 그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무감각함. 교회에서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지쳐서 형식만 남아버린 신앙. 힘든 일이 계속되니까 “하나님이 나를 정말 돌보시나”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그걸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덮어버리는 것. 저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자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것보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히 두루 다니고 있는 그 시간이 사실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근신하지도, 깨어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이 본문을 “그러니까 너는 더 열심히 정신 차리고, 더 열심히 깨어 있어라”는 말로만 듣고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신앙이 “내가 얼마나 잘 깨어 있느냐”에 달린 자기 노력의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여기서 반드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마귀가 사자처럼 무섭게 그려진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맞먹는 존재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이 팽팽하게 맞서 싸운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이원론이라고 부르는데,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욥기 1장과 2장을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몸에 손끝 하나 댈 수 없습니다. 마귀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철저히 매여 있는 존재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5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2:14도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려”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우는 사자”는 위엄 있는 왕의 포효가 아니라, 이미 목줄이 채워진 짐승의 마지막 발악에 가깝습니다. 힘이 없어서 조용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적으로 패배했기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사자 앞에서 어떻게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절, 9절이 답을 줍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특별한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다. 그냥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평범함이 오히려 복음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지할 믿음의 대상이 바로 사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분, 요한계시록 5:5이 말하는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5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은 인류 최초의 타락 직후에 이미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요. 우는 사자가 지금 두루 다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참된 사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머리를 이미 밟으셨습니다. 우리가 근신하고 깨어 있을 수 있는 힘도 결국 여기서 나옵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력이 아니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그 믿음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사자를 이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기신 분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5:10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지금 우리가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온전하게 붙드십니다. 근신과 깨어 있음은 그 은혜를 얻어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그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살아내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오늘 하루 중 마음이 스르르 풀리며 방심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한 가지만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짧게라도 “주님, 제가 놓치고 있었습니다” 하고 아뢰어 보십시오.
최근 몇 주 사이 별일 아닌 것처럼 슬쩍 건너뛰고 있던 신앙의 습관이 있다면 — 말씀 읽기든, 기도든, 예배 준비든 — 이번 주에는 딱 하나만 다시 붙잡아 보십시오. 완벽하게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요즘 나를 가장 자주 흔드는 자리가 어디인지 조금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관계일 수도, 재정일 수도, 마음의 불안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를 위해 함께 기도해 줄 한 사람에게 이번 달 안에 털어놓아 보십시오. 우는 사자는 혼자 있는 자리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함께 깨어 있을 때, 그 자리는 더 이상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게 됩니다.
결론
우는 사자는 실제로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보다 먼저, 그리고 그 사자보다 훨씬 크게, 이미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참된 사자가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근신하고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싸워 이기신 그분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밤을 지새우는 자리에서, 오늘 우리는 다른 이름 하나를 붙잡고 잠들 수 있습니다.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는 밤에도, 이미 이기신 참 사자가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