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만의 만남
김 화 연
부모 자식 간에 첫 만남과 첫 인사는 엄마 뱃속에서
“제가 나왔어요.” 하며 응애응애 목청 높여 우는 소리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그 만남과 인사가 채 가시기도 전,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자식을 갈라놓는 날 1950년 6월 25일, 수많은 부부와 부모 자식, 형제자매가 이별을 해야 했던 그 6. 25 전쟁!
6. 25 기념일이 하루 지나고 오늘이 2013년 6월 26일 아침밥을 해먹고 나니 마음부터 조급해진다. 오늘은 대전 현충원에 가서 64년 만에 내 생애 두 번째로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준비를 시작한다. 먼저 용주사 절을 찾아 부처님께 아버지의 위패를 찾게 해 주셔서 고맙고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러 갔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위패를 찾게 해 주셔서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하고 치성을 드렸다.
홍성 보훈 지청에서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대전 현충원에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고마운 마음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관계자 분들께도 부처님의 축복을 기도 드렸다.
그리고 마트에 들려 제물을 마련하여 아버지의 하나 뿐인 사위가 운전을 하여 대전 현충원에 도착을 했다. 현장으로 친구 같은 큰 딸아이가 와 줘서 가뜩이나 심란한데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이래저래 시간이 너무 경과하여 두시 가까이 되니 배가 고플 수 밖에, 나는 주위를 생각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가자고 했다 식당에 가려고 보니 참 내가 너무너무 못된 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수 십 년을 눈을 감고 귀 막고 입 막고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다 막고 계실 텐데 그 한 끼를 못 참고 밥 먹고 가자고 한 내가 딸인가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자신이 너무 미웠다. 제 할 일 다 하고 점심시간 지났다고 식사하고 가자고 했으니 자식은 다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64년 만에 찾은 위패, 김화연의 아버지 김선종. 군번 802128.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헤어져서 유골도 없이 위패만 찾았다. 하염없는 눈물, 보고 싶어도 보이지 않고 미치지도 못하는 얼굴, 내 아버지의 얼굴, 사진 한 장 있기에 그리우면 꺼내 보곤 한다.
아버지는 고목처럼 내 마음에 뿌리 내리고 어느 하늘 아래 누워 계신지, 유골은 못 찾았지만 위패라도 대하고 보니 소리 내어 울고 싶고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싶지만 그럴 수만은 없는 분위기였다. 울음을 참으려니 빗줄기 같은 눈물만 철철 흘러 내렸다. 다시 또 찾아뵙겠다는 마음의 약속을 하며 또 뵈올 때 까지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를 하며 현충원을 나왔다.
그 많은 위패와 수 없는 묘비들, 그 이름 누구 하나 어느 집의 귀한 아들이 아니었겠는가? 그 부모와 자식들은 어떻게 일생을 살았을까? 그리고 그 유골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전투하다 쓰러진 산골짜기에서 나를 찾아 달라고 애원하고 계실까?
나도 유전자 검사 신청을 해놓았으니 곧 아버지 유골을 찾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기다림은 언젠가 이루어 질 것이다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다는 바람을 얹어 아버지의 유골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첫댓글 6.25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수필을 보며 다시 생각해봅니다.
잔잔하게 잘 묘사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도 6.25 전쟁 때 돌아 가셔서 아버지 생후 9개월만에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저희와 비슷한 처지에 계시군요. 그래서 인지 가슴이 찡합니다. 좋은 수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