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나이보다 젊다는 것은 시인이 보여주는 최상급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동안의 정석
김영란
절대 동안 명품 동안 미친 동안 사이에서
젊어져라 젊어져라 세월에 지지 마라
세월이 비껴간 자리, 주문을 외는 동안
검은 머리 파뿌리에 훈장 같은 주름이며
들어도 못 들은 척 어두워지는 귀하며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침침한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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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은 비교급에 휘둘리며 살고 상류층, 특권층, 권력층은 최상급의 그물에 걸려 산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ABC 방송 인터뷰에서 good의 최상급을 best가 아니고 goodest라는 단어를 말해 조롱을 받고 있다. 소위 상류사회의 일원들은 늪에 빠져도 best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하지만 대다수 서민은 누구누구보다 더 잘나거나 못나거나의 better, 즉 비교급의 공식에 갇히는데 신분, 지위, 소득, 명예, 건강까지 저울질하는 데 익숙하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는 금언을 떠받들게 해서 반강제적으로 아니면 역설적으로 종종 우리의 규격을 보편타당이라는 억지 기준점을 정해놓는다. 그중 하나가 동안이니 노안이니 하는 외적 미학을 위한 선별 행위이다. 시인이 나열한 ‘절대’, ‘명품’, ‘미친’은 사실 최상급의 대역이며 숫자로 매길 수도 없고 줄자로 잴 수도 없고 현미경을 들이댈 수도 없는 기준점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시인은 동안이 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며 ‘세월이 비껴간 자리’를 얼굴이나 팔다리에서 찾고 있는지 모를 일이며 그또한 시인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주문을 외는 동안’의 ‘동안’이라는 동음이의어를 의도적으로 썼다면 시인의 시가 실로 ‘동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이 든다고 그것에 어울리게(?) 시어를 선택하거나 고전적 시구를 선택하지 않고 젊고 활달하고 재치 있고 유연하고 유머러스한 작품을 구상하고 쓴다면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보다 스무 살, 서른 살 더 젊은 동시童詩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노시老詩를 쓴다고 말하는 시인은 없을 것이고 나이에 비해 젊은 얼굴도 좋지만, 젊은 시가 난무하면 좋겠다.
‘훈장 같은 주름’과 ‘어두워지는 귀’와 ‘침침한 눈동자’와 같은 육체적 노화의 DNA가 휘두르는 절대 권력은 어쩔 수 없지만 ‘검은 머리’가 대표하던 청춘과 ‘들었던’ 함성과 ‘보았던’ 진실을 모아서 노시老詩가 아닌 동시童詩를, 동시조童時調를 써 볼 일이다.
글이 나이보다 젊다는 것은 시인이 보여주는 최상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