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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5
창세기 35:16-29
야곱의 아들 열둘
“마하나님”(32:2)을 통해 “브니엘”(32:30)에서 야곱은 죽고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세겜에서 “엘엘로헤이스라엘”(33:20)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디나 사건을 통해 벧엘에서 “엘벧엘”(35:7), 즉 ‘벧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야곱을 벧엘로 몰고가심으로 자기 언약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벧엘의 하나님이란 야곱이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심으로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벧엘의 이스라엘’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다. 하나님의 집이 된 이스라엘이다. 이제 열두 아들로 채워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신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16-17절). “길을 떠나”라는 말의 ‘나사’는 ‘(말뚝을) 뽑아내다, 출발하다, 떠나다, 여행하다’라는 뜻이고, “에브랏”의 ‘에프라트’는 ‘열매를 맺음’이다(대상 2:19에서는 “에브랏”, 대상 4:4에서는 “에브라다”로 번역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벧엘이 목표였다면 이제 벧엘에서 살도록 해 주셔야 하는데 또 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벧엘을 떠난 것이지만 언약적 의미에서는 벧엘이 되어 출발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야곱 한 개인이 아니라 야곱과 함께 그 가족이 성전으로 지어진 후 언약으로 출발한다는 뜻이다. “벧엘”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는 “에브랏”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옛이름이다(19절). 이런 점에서 언약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는 것이 온전한 열매 맺음이다.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16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해산”도 히브리어로는 ‘얄라드’이고 “고생하여”라는 말도 ‘얄라드’이다. 즉 ‘아들을 낳다, 해산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이다. “심히”라는 말은 ‘카샤’인데 ‘어렵다, 완고하다, 맹렬하다, 곤란하다, (목이) 곧다’라는 뜻인데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강함을 나타낸다(신 10:16에서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난산”(17절)이라고 번역된 말도 ‘카샤 얄라드’이다. 즉 라헬이 아들 낳는 일을 완강하게 거부함으로 사람들이 언약의 아들을 낳는 일을 싫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이것은 라헬이 원했던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일이다.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30:23-24)
언약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육에서 벗어나는 일은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환난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말씀의 은혜를 입히시는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18절). “혼”이란 ‘네페쉬’로 ‘호흡하는 존재, 욕망, 욕심, 동물, 생명력’이라는 뜻이다. 호흡하는 목숨은 이제 버리는 상태가 되었다.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베노니”는 ‘벤’(아들)과 ‘아웬’(고통, 슬픔, 거짓, 사악, 헛됨)이고, “베냐민”은 ‘빈야민’으로 ‘오른손의 아들, 남쪽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베노니와 베냐민은 한 사람의 두 이름이다. 진짜 언약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두 이름의 의미를 담고 오신다는 것이다. 여자의 슬픔, 고통 가운데서 죽음으로 완성되는 구원이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시 17:7, 20:6, 98:1 등).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5-17)
라헬이 요셉을 낳고 또 다른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분명 그녀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라헬은 위로받기를 거절했다. 왜 그런가? 레아처럼 더 많은 아들을 낳아야 위로가 된다는 것인가?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의 상황을 가리킨다.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며(수 18:25)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 가깝고 또한 벧엘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가 있었다(삼상 10:2). 라헬은 바로 이 라마에서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 40:1-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헬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로서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식이 없어 슬퍼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로 죽은 사실을 이스라엘의 포로 된 상황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다고 마태는 선언한다(마 2:18). 헤롯의 유아들 학살 사건과 관련시킨 것이다. 즉 이 두 사건의 초점은 라헬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의 애곡이라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때에는 이방 왕의 속박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어머니들의 애곡이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또 다른 이방인 에돔 사람 헤롯 왕에 의해 살해된 베들레헴의 아이들로 인한 어머니들의 애곡이었다. 그러므로 언약적으로 라헬의 애곡은 말씀의 씨가 없어서 참 생명을 낳지 못하는 여자들의 아픔을 대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라헬이 비록 요셉이라는 아들을 얻었고 거기 더하여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목숨을 가진 자로 이는 자기 목숨이 영생이 아니라는 고백을 담은 애곡이다. 그러나 이러한 애곡은 베노니가 아닌 베냐민으로 말미암아 그치게 될 것이다. 이제 아들들이 열둘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언약의 아들 야곱 안에서 이스라엘로 완성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언약의 완성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19-21절). 라헬은 열조의 묘 막벨라 굴에 장사되지 못했다. 막벨라 굴에는 오히려 레아가 묻힌다(49:30-31). 라헬이 길에서 죽어 버려짐으로 레아가 막벨라 굴에 묻히게 되었다는 것은 레아는 라헬 덕분에 야곱의 아내가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이라는 죽음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떡을 나누어주는 베들레헴이라는 떡집이 되는 것이다.
“묘에 비를 세웠더니”라는 말에서 “묘”의 ‘케부라’는 ‘바위를 뚫거나 돌이나 벽돌로 지은 무덤’이고, “비”는 ‘맛체바’로 ‘기둥’이라는 뜻이다. 라헬이 비록 막벨라 굴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상태가 되었다. “이스라엘 다시 길을 떠나”라고 다시 길을 떠났다고 언급한다. 16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도 ‘나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출발하게 하신 것임을 나타낸다. “장막을 쳤더라”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22절).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사건으로 인해 후에 야곱은 예언의 축복을 할 때에 르우벤이 장자권 축복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내었다(49:31-33). 아마도 르우벤은 이러한 이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섣불리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했던 듯하다. 즉 장자권을 이어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는 야곱이 과거에 장자권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르우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을 문자로 열심히 지키는 것을 비유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언급한다는 것은 디나가 강간을 당한 그 사건과 같은 차원에서 언약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역대상에 의하면 장자가 둘이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대상 5:1)
르우벤은 육의 장자이고 요셉은 영의 장자이다. 둘 다 야곱의 아들이지만 요셉은 육의 아들이 아닌 영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요셉은 합환채(‘두다이’ : 언약적 사랑)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야곱 집안의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이스라엘의 장자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재산권을 계승하는 자가 장자가 아니라 언약을 계승하는 자가 장자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이스라엘로 하나님은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르우벤의 음행으로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라는 완성을 향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 열둘이란 숫자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완성되었음을 상징한다. 육의 사람이 장자권을 잃고 영의 사람이 제대로 장자권을 가지고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야곱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아들들을 다시 명확하게 언급함으로 단순히 육의 아들이 아닌 언약의 아들로 열두 지파를 이루실 것이다.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23-26절).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27-29절). 라헬을 잃은 슬픔과 지울 수 없는 치욕의 기억을 지닌 채 야곱은 마침내 이삭이 있던 “기럇아르바의 마므레”에 이르렀다. “기럇아르바”는 “헤브론”의 옛 이름이다. 이렇게 옛 이름을 언급한 것은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루스가 벧엘이 되었으며, 야곱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된 것에 대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끌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는가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삭이 “백팔십 세”로 죽었다는 것은 ‘100’과 ‘80’은 ‘7’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일하심 위에 이루어진 안식, 여분으로 주어진 은혜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태 속에서 두 국민, 두 민족이 싸우며 나누이는 것으로 시작된 여덟 번째 톨레도트는(25:19)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어 열두 아들을 거느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으로 돌아옴으로 끝맺는다. 이삭의 사망은 사실상 뒤에 전개될 요셉이 총리가 되기 1년 전의 일이나 이제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기에 이삭의 톨레도트를 마무리 짓고 나서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는 의미이다(202411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