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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촌 항일운동 중심지 기념탑만 터 지켜
초라한 마지막 거처, 들풀같은 삶 느껴져
러시아 노블레스의 삶 대신 조국 선택
의병 조직·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 선출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때 후원자 역
1920년 ‘4월 참변’ 때 일제 총에 최후
![]() 신한촌 기념비. 가운데 석조물은 한국, 왼쪽은 북한, 오른쪽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동포를 상징한다. |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잃었던 빛을 되찾았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룬 것이었다. 이를 위해 목숨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은 무수히 많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최재형(1860~1920) 선생도 그중 한 분이다.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등불이었던 최재형 선생의 삶을 현지 취재를 통해 되돌아본 국방저널 8월호의 기획 르포를 요약, 소개한다. 기사 전문은 국방저널 e북에서 만날 수 있다.
![]() 고려인 문화센터 전시실에 전시된 최재형 선생의 사진. |
2시간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까지 걸린 시간이다. 현지에 도착해 가이드를 만난 후 처음 찾은 곳은 하바롭스카야에 위치한 신한촌 터였다. 신한촌은 가장 번성했던 한인 거주지였으며 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 등 주요 독립단체들이 모여 있던 항일운동의 중심지라는 설명을 들으며 이동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평범한 주택가였다. 그러다 나타난 것이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탑. 한구석에 자리 잡은 기념탑만이 그곳이 신한촌 터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1999년 해외 한민족연구소가 설치한 이 기념탑은 지금 고려인 리베체 슬라브 씨가 관리하고 있다.
기념탑은 총 3개의 석조물로 이뤄져 있다. 가운데 가장 긴 석조물은 한국을, 좌측 석조물은 북한을, 우측 석조물은 고려인을 비롯한 해외민족을 상징한다고 한다. 세 개의 석조물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석조물은 2개만 있었을까? 신한촌 기념탑을 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괜히 무거워졌다.
![]()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가옥.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20㎞ 떨어진 우수리스크에는 현재 2만여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까지 거주하셨던 가옥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러시아인이 거주하던 이 고택은 다행히 2014년 정부에서 사들여서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한 상태라고 한다.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의 집이라고 하기엔 낡고 초라한 집 앞에서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가난을 피해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왔지만 극심한 가난, 형수와의 갈등으로 11살의 나이에 가출하고 말았다. 그런데 러시아 선장 부부의 양아들이 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익힌 것은 물론 배를 타고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인적 기반을 쌓아갔다. 완벽한 러시아어와 다양한 경험, 러시아 인사들과의 친분, 뛰어난 사업수완까지 가진 선생은 막대한 재산과 러시아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자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며 한인들의 교육과 생활개선 등을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선생을 한인들은 ‘최 페치카(난로)’라 불렀다. 그들에게 선생의 존재는 따뜻한 난로 그 자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연해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민족 언론인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조선 강제합병 이후 권업회를 조직한 것은 물론 최초의 해외 임시정부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으로도 선출됐다. 선생은 안중근 장군과도 특별한 인연을 맺었는데,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실질적 후원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선생의 최후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1920년 일본군이 연해주 한인을 학살한 ‘4월 참변’의 희생자가 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선생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집으로 들이닥쳤다. 뒷문으로 피신하라는 막내딸의 강권에도 선생은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나갔고 며칠 뒤 일제에 의해 총살당했다.
![]()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최재형 선생과 부인의 위패. |
![]() 최재형 선생의 순국을 알리는 동아일보의 기사. |
선생은 얼마든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살 수 있었지만, 쉬운 길을 두고 독립운동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고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다. 선생의 고택을 한참 바라보며 서 있다 보니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 선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며 왠지 모를 울컥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선생의 순국 95년 만인 지난해, 선생과 부인 최 엘례나 씨의 위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됐다.
선생의 생가와 5분 거리인 전로한족중앙회(우리나라 최초의 임시 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의 전신) 건물을 둘러본 뒤 정부가 지원하고 기업과 한인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고려인 문화센터로 이동했다. 우수리스크를 떠나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서 이동한 곳은 크라스키노. 이곳에서는 안중근 장군의 흔적인 ‘단지동맹비’가 있었다. 오른손 약지를 자른 장군의 손도장이 새겨진 석상과 12명의 단지동맹회 인사들이 흘린 핏방울을 형상화한 기념석, 장군이 죽기 전 남긴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의미하는 15개 돌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광활한 벌판에 우뚝 선 단지동맹비는 당시 독립투사들의 비장함과 결연한 의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연해주를 무대로도 독립운동활동을 펼친 신채호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척박한 땅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조국 독립에 앞장섰던 연해주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글·사진=유윤경 국방FM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