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죄인이 알아야 하는 성경의 진리들 중에 거듭남과 구원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어느 정도라고 할수 있을까? 그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정도의 표현으로 부족하고 필수불가결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 가운데 거듭남을 성경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위 구절을 놓고 이단 종파들은 사람이 물 세례를 받아야 거듭남이 이루어진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그 대표 거짓말쟁이가 로마 카톨릭으로서 그들은 심지어 아기들에게까지 물세례(혹은 물침례)를 주면서 그것이 구약의 유대인 할례를 대체한 거듭남의 징표인 양 교인들에게 사기를 쳐 왔다. 개신교의 칼빈주의자들도 그 누룩을 답습해서 유아 세례를 주고 있다. 물론 이 말씀은 그 어떤 물세례와도 무관한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보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동물들과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 나는 새를 풍성히 내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창 1:20-21).
6일 재창조 사역 가운데 하나님께서 조류와 어류를 지으시는 과정에서 이런 묘사가 나오는데 네 발 짐승들과 달리 조류들은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물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새들과 물고기들은 생태와 행동 양식이 비슷한 면이 많이 발견된다. 진화론자들은 사람도 물고기에서 나왔다고 믿는데 물론 그것은 창세기 2장에 의해 전면 부정되며 인간은 물고기에서 진화해 나온 것이 아니라 진흙과 물이 섞인 형태로 지어졌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여기서 사람이 지어진 흙은 매우 고운 붉은 진흙인데 그런 고운 진흙은 심층 해저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영감 가운데 시편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은밀한 가운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가장 낮은 부분들에서 기묘하게 지음을 받았을 때 나의 형체가 주로부터 숨겨지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39:15).
여기서 다윗은 아담의 입장이 되어 창 1-2장의 인간 창조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윗은 "땅의 가장 낮은 부분들"에서 지음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담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바다 진흙을 꺼내셔서 물과 이겨서 인간을 빚어내셨을 때 그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은 물에서 그 육신의 재료가 끄집어내어진 다음 창조되었기에 물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요한복음 3:5로 돌아와서 마저 설명하자면 여기서 "물"은 장로교 목사나 카톨릭 사제, 교황이 교인들 머리에 떨어뜨려 적셔주는 세례수가 아니다. 주님께서 이 구절의 말씀을 하실 때 물뿌림으로 중생한다고 가르치는 카톨릭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두 번째, 요 3:5을 이상하게 잘못 해석하는 방식 중 하나가 이 물을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엡 5:26).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요 3:5의 물을 말씀이라 해석하는 주석가들이 근거 삼는 관주들이 주로 엡 5:26인데 벧전 1:23은 간접 관련 구절이기에 인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으로 죄인을 씻는 작용을 하고 거듭날 때에도 성령과 아울러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주장을 반론하기 위해서는 보다 세심한 본문 해석이 필요하다.
요 3:6을 같이 놓고 비교해 보면 더 분명해지는데 보도록 하자.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이것은 3:5의 "물로 태어나는 것"을 받는 대구법이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은 물론 문자 그대로 3:5의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받고 있다. 3:5에서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태어난다는 말을 함축적으로 "물로 태어남"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혹시 누군가 이 구절을 보다가 물세례나 다른 의미로 오인할까 해서 3:6에서 물의 의미를 육신의 출생으로 다시 정의내리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문학적, 함축적 표현을 즐겨 쓰시곤 했는데 주님의 제자들조차도 간혹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서 주께서는 그럴 때마다 분명한 용어를 써서 오해를 바로잡곤 하셨다. 그런 비근한 사례가 요한복음 자체에 또 있으니 살펴봄직하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고 하시니 그의 제자들이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가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하더라.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을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주께서 잠들어 쉬는 것을 말씀하신 줄로 생각하더라.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도다(요 11:11-14).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그것을 상징적으로 잠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한 제자들이 나사로가 진짜 병이 나아서 단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제서 주님께서는 "내가 잠들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함축적으로 말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 주신 것이다. 이런 식의 해프닝이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것을 볼때 요 3:5의 "물과 성령"의 의미도 조심해서 살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사람은 두 번의 출생을 경험해야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데 그래서 거듭남은 한자로 "중생"이라 한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 3:5).
중생(regeneration)은 육신으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성령으로 또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거듭남은 실제적인 "영적 생일"을 갖고 있는 법이다. 어릴 때 구원받은 많은 크리스찬들은 자신의 영적 생일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으나 성인이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죄인들은 대부분 그 엄청난 날에 대해 모르고 넘어가지 못한다. "거듭남의 날"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받은 크리스찬에게 있어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개념이다. 물론 침례교 전통을 겉핧기로 대충 카피해서 워치만 니 신비주의와 버무려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구원파 같은 경우는 그 구원의 날 개념을 악용한다. 그 날을 모른다면 진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같은 식으로 호도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 "엄마 뱃속에 두 번 들어가야 됩니까?"라고 묻는 바리새인 니코데모에게 두 번의 출생이 있다고 대답하신 것인데 니코데모는 자신을 포함 조상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으므로 자연히 그에게는 거듭남이란 미지의 영역이다.
니코데모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요 3:4).
우리가 구원받을 때 경험하는 그 중생은 첫 번째 출생과 매우 다른 속성을 가졌다. 첫번째 태어날 때 우리는 아홉 달 혹은 열달 동안 자궁 속에 머물러야 하지만 성령으로 태어날 때는 열 달은 커녕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첫 번째 출생을 위해서는 우리의 부모가 부부로 결합해서 씨가 착상되어야 하지만 두 번째 출생에 있어서는 어떤 인간의 뜻도 무용하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2-13).
차이점이 있는 만큼 유사성도 있게 마련인데 첫 번째 출생 직후 갓난아기였던 우리는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되고 유년, 청소년, 청년기를 거쳐 성숙한다. 영적인 출생 이후에도 성장기를 거치게 되는데 육신의 성장은 모유, 이유식, 밥을 먹고 되어지지만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기도와 경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기록되었으니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느니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고전 15:45).
주님께서는 자신이 "마지막 아담"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모되도록 예정되어 이 지상 생애를 살아가는 모든 거듭난 죄인들이 성장 단계를 거쳐서 하늘나라로 가게 하셨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성장도 없을 것이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적절한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영적인 늙은 아이처럼 살다가 하늘나라로 갈 수도 있다.
요새는 "중생"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왜냐면 구원파들이 나타나서 중생을 자꾸 어떤 신비주의적인 또는 "기독교 교육, 학습"(구원파 세미나를 받아야 거듭난다는 식)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일반 제도 교회 교인들은 특히 장로교의 경우 무조건적 선택을 믿고 가르치는 목사 밑에서 배웠을 경우 "거듭남"에 대해 듣기도 힘들다. 그들은 필자 같은 침례교 거리설교자들이 "거듭남"을 말하면 그것을 구원파 교리로 이해해 버린다. 무식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라 안쓰럽게 여기고 제대로 가르쳐주려 애쓰지만 그들은 거듭남, 중생 없이 교인 생활을 하다 지옥에 가는 현재의 자신의 행태를 수많은 주변 교인들을 통해 배웠고 당연시하며 살아갈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