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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돌담길..의령 오은五隱마을 오운마을은 지리적 영향으로 현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반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담쟁이덩굴과 어우러지는 옛 담장마을,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며 다정다감한 느낌마저 든다.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옛 담장 등록문화재는 경남에서 5곳이나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산청, 거창, 고성 옛 담장마을은 이미 탐사했지만, 의령 옛 담장 문화재는 차일피일 달을 넘겨 여태까지 탐사해 본 적이 없다. 가을 초입, 계절과 딱 어우러지는 시골 풍경이 가슴 속 아련히 새겨지는 때이기도 하다. 이번엔 의령 낙서면에 소재한 오운마을을 탐사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의령·군북IC를 지나 정암루가 있는 의령읍으로 방향을 틀었다. 드디어 1시간 20여 분 만에 65㎞쯤 되는 낙서면 전화리 오운마을에 당도했다. 오운마을은 낙동강을 낀 호리병 형태의 마을로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낙동강 물로 벼농사를 짓고 있다.의령 낙서면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제35대, 742~765)때 의상현에 속했던 지역이었으며, 강양군(지금의 합천군)의 속현이었다. 낙동강의 서쪽지역이라서 낙서란 지명을 썼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1389~1392) 때 의령현에 편입된 이후 전혀 변동이 없었다. 이 마을에 먼저 입향하기는 강씨와 전씨였고 그 뒤 벽진이씨가 들어와서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오운마을은 의령 낙서면 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위치해 있다. 낙동강 남쪽자락 오지마을 오운의 풍경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을의 방향은 동남향으로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그리고 있다. 산세에 어우러져 밖에선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 요새지형이다. 마을 초입 오운마을 표지석, 정아하게 자리 잡은 전통가옥들, 옛 담장과 전통한옥이 어울려지는 마을, 안당산 느티나무가 옛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마을 이름을 오은마을, 운곡마을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지명 정비 때 오운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 날아온 까마귀 두 마리를 보았는데, 까마귀가 다시 날아가는 것을 보지 못해 까마귀가 숨어들었다고 하여 오은(烏隱)이라고 불렀다. 또 낙동강이 흐르고 동네 뒤에 대덕산이 막아 서 있어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지형이라 구름실, 굼실, 운곡(雲谷)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다섯 골짜기에 구름이 지나가 오운(五雲)이라고 했다. 또 까마귀 집에 해당되는 터로 다섯 성받이로 이씨, 전씨, 최씨, 김씨, 박씨가 구름처럼 번창할 지운지세라서 오운으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칠천석이나 하는 부자형제, 칠형제의 이름 항렬자가 구름 운(雲)자라 두 이복형제를 뺀 채 다섯 형제 이름자를 따서 동네이름으로 삼았다는 내력도 있다. 칠우정 뒤편 약새미로 몸이 마비되는 마목병 환자를 낫게 한다는 약물샘터이다.시집 올 때, 신반장에 갈 때 넘어 다닌 골짜기가 있으며, 까막곡, 가라곡, 빈둥메, 부무골, 동산미 등 구술로 전해지는 지명이 남아 있다. 오운마을은 낙동강 남쪽 자락에 자리해 전체적으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마을지대가 동구 밖 낮은 지대로 예전에는 비가 많이 오면 낙동강 물이 자주 범람하여 물굼티로 불렀지만, 현재는 댐이 설치되어 물난리가 없으며 기름진 옥답으로 변했다. 마을 뒷산 가락골이라는 골짜기에는 약새미라고 불리는 약물 샘이 있다. 몸이 마비되는 마목 병을 낫게 하는 약물이 사시사철 솟아오른다. 안당산에 수령 500년 가까이 되는 노거수 참나무, 수백 그루 잣나무 숲속, 붉은 색을 띤 둥치와 푸른 솔잎이 어울리는 홍송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안당산과 바깥당산에 수령 약 5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 참나무 등 노거수들이 마을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당산나무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또한 마을 안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잣나무가 수백 그루 자라고 있으며, 그 가운데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홍송 2그루가 있다. 배산임수 입지 형태의 지리적 영향 때문인지 이곳은 현대적 손길이 닿지 않는 반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마을 분위기 또한 따뜻하고 넉넉하다. 마을 표지석 아래에 등록문화재 지정 표지가 돋보인다. 500년 되는 아래당산 느티나무의 위엄스런 모습이다.오운마을에는 아직까지 기억으로 남아 구술로 전승되는 설화와 세시풍속이 있다. 마을을 위해 엉덩이를 돌린 거북바위 전설이 내려온다. 물굼티로 하루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가난했던 오운마을이었지만, 건넛마을 부림은 쌀농사도 풍작이어서 잘 살았다고 한다. 가락골 꼭대기 거북바위 엉덩이가 향했던 부림은 거북이가 똥을 싸서 마을이 풍요롭지만, 입이 향한 오운은 식량이 부족하다는 풍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마을 장정 20명이 올라가서 거북바위 엉덩이를 오운으로 돌렸다. 그 후 마을에 댐이 들어서면서 홍수 피해가 없이 마을이 번성하고 큰 인물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 오운마을에는 동제가 열린다. 삼탕과 떡, 과자 등을 준비해 제를 올리는 당산제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정월 초사흗날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를 빌던 민간신앙이다. 과거에는 생기복덕으로 제를 지낼 사람을 선정하여, 5일간 정신한 후 정월 초사흗날 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동제 비용으로 만원씩 거두어 돌아가면서 12월 31일 새벽 1시에 제를 지내게 되었다. 또한 5일간 정신하던 풍속도 하루로 줄었고 바깥당산에만 제를 지낸다. 세월의 정취를 느끼는 오은마을 옛 담장, 2007년 등록문화재 제365호로 지정되었다.옛 담장과 백년 고택, 그 세월의 정취를 따라 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오운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을 둘러보니 이제는 보기 어려워진 정겨운 옛 담장을 만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돌담이나 토석담들을 흔하게 볼 수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지고 단지 몇 곳에서만 남아있다. 이들 담장이 늘어선 좁은 골목길은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더 그리워진 골목길이다. 마을에 보존되고 있는 토석담과 돌담은 1000m나 된다. 담장 위에 기와를 얹은 모습이 정경의 원근감과 입체감을 더욱 느끼게 한다.오운마을 옛 담장은 토석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 외에 돌담과 탱자나무 울타리가 함께 구성되어 있다. 한옥과 오래된 큰 나무와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토석담은 높이 1.5~2m, 높이 40~60cm 정도인데, 길이 20~40cm 방형의 막돌과 진흙을 전통적인 축조방식에 따라 쌓았다. 돌담은 주로 막돌을 높이 1.5m 안팎으로 쌓았는데, 골목과 접하지 않은 옆집과의 경계에 담이나 축대를 만들 때 많이 사용하였다. 마을 입구 한옥에 둘러친 탱자나무 울타리가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조성되어 있다. 벽진이씨 통정공파 후손인 이민수 전 지방법원장의 둘러싸여진 옛 담장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는 듯하다. 돌담과 토석담이 쌓여있는 그 위에 담장 덮개로 기와들이 늘어선 모습은 다른 돌담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상을 하고 있다. 마을 토석담과 돌담이 1000m나 되고 탱자나무 울타리가 200m 정도이다. 2007년 11월, 등록문화재 제365호로 지정된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옛 담장이다. 그림 같은 꽃들과 노거수가 더욱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옥 골격과 서까래가 100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헌책 고가는 돌담 위 둘레 200m나 되는 탱자나무 울타리의 운치를 더욱 보여준다.이헌책 고가의 담장 위 탱자나무는 올해 들어 한 번도 전정하지 않아 볼썽사납고 돌담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응당 부끄러울 따름이다. 일 년에 두 번쯤 2m 높이 정도로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속적으로 조성한다면 그 미적 아름다음과 균형미는 빼어난 마을정경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축조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 담장도 눈에 들어온다. 옛 담장의 정취를 느끼기엔 너무나 골목길이 빨리 끝나버려 아쉽기만 하다. 돌로 쌓은 기단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함께 구성되어 있어 자연의 조화를 불러일으키지만, 울타리 손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경상남도에 소재하고 있는 옛 담장 등록문화재는 산청 단성면 남사마을, 산청 신등면 단계마을, 거창 황산마을, 고성 학동마을, 그리고 의령 오운마을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물론 모두 탐사해 본 적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향촌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잘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모두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들인데, 다름 아닌 담장이 그 역할의 중심에 있다. 이렇듯 문화재로 지정된 곳 외에, 마을에 새집이 들어서도 이웃에 이어진 옛 담장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마을의 초기 구성원리가 잘 남아 있고 동네의 민심도 여전한 것을 볼 수 있다. 더불어 담장과 함께 옛집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좋은 연구자료이기도 하다. 토석담은 막돌과 진흙을 전통적인 축조 방식에 따라 쌓아 골목과 옆집과의 경계를 두었다.이렇듯 담장은 한옥마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담장의 역할이 경계를 삼기 위함이고, 장식을 통한 행인에 대한 배려이며, 높이를 통한 권세의 과시 등 여러 가지다. 그 중 가장 큰 역할은 동선을 유도하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된다. 바람을 막기 위해 담장을 축조한 경우도 많았지만, 특히 담장은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요긴한 장치이기도 하였다. 또한 담장 쌓는 재료와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토담, 돌담, 판장, 목책, 그리고 바자울이나 탱자나무 등을 심어 만들기도 한다. 막돌로 쌓을 경우에는 돌과 돌 사이에 강회 등을 발라 빗물이 스미지 않고 정갈하게 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편리한 구조의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는 오늘날 시골에서 토석담을 본다는 건 귀한 일이다. 그래서 옛 담장문화재를 보존하고 주변 환경도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면 관광자원으로 한 몫을 할 거라 여겨진다. 지방법원장을 지낸 이민수 종가의 옛 담장과 대문채 정경이 전통한옥 형태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오운마을에서는 벽진이씨 일가와 관련된 역사문화자료가 많다. 100년 된 기와집 역시 그 중 하나이다. 마을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 벽진이씨 일가는 약 100년 전 기와집을 함께 지어 올렸다고 한다. 이민수 종가의 본채와 그 뒤편 곡선미를 자랑하는 옛 담장이 멋스런 자태를 보여준다. 이우일 고가와 이태오 고가도 옛 자취를 그대로 간직한다. 그 후 6·25 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은 몇 채 되지 않는다. 이민수, 이종철, 이우일, 이광수, 이태오, 이헌책 씨 등의 고가가 그것이다. 지금은 생활상 편리를 위하여 곳곳에 개조와 보수 흔적이 있지만, 골격과 서까래는 1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벽진이씨 참의공 부자손 삼대 묘소가 낙서면 대덕산에 자리하고 있다. 그 자손들이 운곡리에 모여 살고 마을 곁에 역사 어린 운곡재가 있다.먼저 벽진이씨 운봉공파 15대손 이선두 후손, 17대손 이동성 후손과 함께 오운마을 초입 평지에 있는 운곡재를 찾았다. 운곡재는 벽진이씨 운봉공파의 재실이다. 참의공 이천민과 아들 통정대부 이결, 그리고 손자 훈도를 지낸 이중광공을 모시는 종중재실로 1856년에 건립되었다. 70년 후 1927년에 중창되었다.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변형된 개소가 있지만 전통건축 법식을 비교적 잘 따르고 있다. 입지성이 좋아 역사적, 관광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도 문화재자료 제5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곡재 기문 편액과 운재 문서책, 동약(洞約)에 참여하는 인원의 명부인 동안은 사족들에 의한 향촌지배기구로 구실하였다.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주춧돌로 사용한 덤벙주초가 보인다.재실의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기단은 자연석 기단으로 되어있다. 초석은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놓는 덤벙주초이며, 그 위로 원주가 지붕을 받치고 있다. 재실 내부는 좌측으로부터 방, 방, 대청, 방으로 되어있으며, 좌측의 방은 배면으로 확장하여 이용하고 있다. 창호의 형태는 띠살창과 교살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청의 배면은 판문이 달려 있어 툇마루로의 이동이 가능하게 하였다. 가구 구조는 3량가로 되어있으며, 민도리 양식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되어있다. 의령의 숨은 군자, 침랑 주칠은 가난으로 배움을 쫓지 못한 지난날을 개탄, 칠우계의 돈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도록 명한다. 그의 일곱 아들이 칠우정을 세웠다.곧 벽진이씨 운봉공의 후손 통정공파 이동성 후손과 함께 오운마을 뒷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칠우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칠우정은 운봉공파 14대손 이운수가 형제 6명과 함께 1914년 건립한 정사이다.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의장수법과 구조가 20세기 초의 지방부호의 건축 양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도 문화재자료 제5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칠우정기 편액, 칠우정 대문채, 칠우정 앞 200년 되는 회화나무가 역사를 말해준다.칠우정은 운곡재와 함께 오래된 재실이다. 대문채 정면으로 칠우정이 배치되는데,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층급기단으로 자연석을 2단으로 배열하였고, 초석은 정면과 배면이 다르게 놓여 있다. 전면에는 원형으로 가공한 초석이 놓여 있고, 배면은 자연석 주초로 되어 있다. 원형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우측의 귀기둥을 2단의 기단에 놓지 않고, 1단에 놓았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측면과 배면으로 쪽마루가 있다. 창호의 형식은 2짝 세 살문이다. 가구 구조는 5량가이며, 건축 양식은 민도리 양식으로 되어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내림막새를 쓰지 않고, 아귀토로 마감하였다. 의동정은 건축학적으로 평범한 주거형태지만 건물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인공적인 정원 조성의 흔적 등 근대 부농 계층의 건축 형태가 남아있다.이어서 이동성 후손과 함께 마을 뒤편 개울가에 위치해 있는 의동정으로 방향을 틀었다. 의동정은 역시 오운마을에 있는 벽진이씨 문중의 정자이다. 동원 이운모(1865~1937)가 일제강점기에 세웠으며, 강학소로 사용되었다. 동원선생은 운봉공파 14대손이며, 통정공의 아들 칠형제 중의 다섯 번째이다. 이 재실은 이태오의 증조부인 동원선생이 단독으로 지었다. 지어진 지 약 80년 된 재실로, 벽진이씨 선조의 신위를 모셔 놓고 있다. 의동정 현판은 대학자 노상직이 썼으며, 선생의 필체가 담긴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의동정기 편액, 대학자 노상직이 쓴 의동정 현판과 시판, 의동정 대문채인 의사문, 지금까지 보존해오고 있는 가묘는 반가 문중임을 말해주고 있다.의동정은 오운마을 뒤편의 작은 계곡 우측에 남향하여 위치해 있다. 대지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형상이며 배치는 높은 곳에서부터 사당, 정자, 대문채를 두었다. 의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마루와 온돌방 1칸,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 1칸, 마루와 온돌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포양식은 장여수장집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세 개인 3량가이다. 특히 요즘 보기 드문 사당이 남아있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평면은 통칸 마루방이며 공포양식은 접시받침으로 이루어진 단익공의 집 형태인 소로수장집이다. 정면은 이사문(二思門)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우측 편에 대문을 두었으며 공포양식은 소로수장집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 규와 전병항 선생의 서실인 회갈당이다. 80년 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곧이어 담양전씨 28세손 전순석 후손과 함께 경모재와 회갈당(懷葛堂)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경모재는 벽진이씨 보다 오운에 먼저 터를 잡은 담양전씨의 재실로 1963년에 건축되었다. 의령에 처음 뿌리를 내린 운암공 전훈을 비롯한 전씨의 선조를 추모하는 곳이다. 몇 년 전에 보수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깔끔하게 꾸몄지만 바깥 문짝 조성에서 하이샤시 재료를 이용, 보수한 까닭에 재실 고유의 먹과 운치를 제대로 풍기지 않는 느낌마저 든다. 회갈당 현판, 경모재 동회문부, 55년 전에 세운 담양전씨의 재실인 경모재, 그 기둥에는 주련이 아련히 걸려있다.회갈당은 규와 전병항 선생(1879~1950)의 서실로 1935년에 건축되었다. 선생이 자신의 서실을 회갈당이라고 명명하였다. 여러 편액이 처마기둥 아래에 쭉 늘어서 있다. 액자로 된 편액이기보다는 원목을 그대로 잘라 그 위에 각자하거나 필사하여 더 고풍스런 느낌이다. 규와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담양이다. 부친은 전대수이며, 모친은 김녕김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불과 약관의 나이에 <통사> 및 사서(四書)를 모두 섭렵했으며,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규와 선생은 눌재 김공과 약재 안종화 선생과 교유하였으며, 이 두 분은 회갈당의 기문을 쓰기도 했다. 성리학에 관한 많은 도설(圖說)을 남겼으며, 문집으로 <규와문집> 4권이 전한다. 배산임수의 지리적 형태와 고가와 옛 담장을 갖추면서 반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 분위기 역시 정감 넘치고 넉넉한 풍치를 자랑한다.오운마을은 전통적인 생활자원이 풍부하다. 마을에서 구할 수 없는 먹거리나 생필품을 사러 가는 신반 5일장과 수구레 국밥과 창녕우시장으로 유명한 창녕 5일장은 주민들에겐 유일한 생활 수단이다. 마을 2㎞를 지나는 낙동강 자전거도로며, 마을 언덕 위에 옛 형태를 잘 보존한 담배건조실 등은 유일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낙동강의 기름진 토양에서 집단 재배되고 있는 옥수수, 밭에서 까서 바로 먹어도 단맛이 나는 양파, 신선도와 당도가 높고 과질이 아삭아삭한 단감 등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옥수수, 양파를 수확한 후 벼농사를 짓는 2모작 농사법은 오운의 농업적 특성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벽진이씨 참의공파 세거지 표지석과 함께 운곡재의 평화로운 모습, 고즈넉한 마을 정경과 복판엔 마을체험장이 보인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꿈마을, 오운마을이다.이러한 풍부한 자원을 활용한 오운마을은 미래 꿈마을을 조성하기 위해 여러 전략을 짜고 있지 않은가! 노거수와 골짜기 추억, 특히 마을길을 개발하고 있는 자연경관이 특이한 마을이 아니던가! 낙동강 관광자원과 함께한 자전거길 조성, 마을 옛길과 사연을 담은 등산길, 의령 주변 관광자원과의 연계 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옛 담장과 거북바위 등산코스 등의 역사전통문화 자원이 풍부하기만 하다. 또한 수확기 농산물 직거래 판매, 영농 및 수확 체험으로 안성맞춤인 특색 있는 밥상과 전통 간식거리 엿·유과 만들기 체험 등의 생활기술자원이 타 마을과는 차별화되고 있다. 바로 옛 담장을 비롯한 전통적인 역사문화마을에서 거듭나 풍부한 자원과 함께 현대로의 탈바꿈을 하고 있는 미래 향한 꿈마을, 의령 오운마을이 아니던가! 창공을 향해 기지개 켜며 비상을 기약하는 향토문화 오운마을, 한 번쯤 짬을 내어 탐방해 보는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지……. 의령군에서 문화재가 몰려있는 마을인 만큼 옛 담장 따라 걸으면서 천천히 옛 흔적을 음미하기에 안성맞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