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교 시인과 교류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쏫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있었다
하루 종일 빈 집엔
석류가 입을 딱 벌리고
그 옆엔 황소가
누런 하품을 토하고 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온갖 산들이
무다 고개를 돌리면
바람은 어느새 골목으로 왔다가
오색 테이프를 몰고갔다
1974년 6월 1일 창원사. 발행,
위의 시는 말 그대로 가을 운동회를 표현한 시다. 이 시는 시집 <보리필 무렵>에 실려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6.70년 때만해도 마을마다 가을이면 운동회를 열었다. 운동회는 마을의 가을 잔치였다. 또한 학교잔치라 해도 잦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학교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뛰고 즐기는 이 마당을 잔치장이라 했다. 이 운동회를 위해 집집마다 새 음식도 하고 과일도 준비했다. 마을 아낙들은 운동 날 입을 새옷도 미리 준비한다. 얼마나 기다리던 잔칫날인가.
언젠가 문학모임에서 시낭송을 하면서 이성교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마을엔 인화(人花) 가 핀다.>의 말에서 당시 문교부 편수관이 이 단어를 다른 것으로 고치면 안 되느냐. 라고 제의해 왔는데 이성교 선생은 끝까지 고집을 부려 고수했다는 말을 했다. 이 가을 운동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교과서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가을 운동회도 없고 도시엔 운동장이 없는 곳도 많다. 이것은 교육부가 개선해야 할 일이다. 이젠 추억의 가을 운동회라 불러야 할 것이다.
같은 고향인 나는 이성교 선생을 만날 기회가 한번도 없었다. 1979년 경으로 생각된다. 탄광이 몰락하자 태백을 떠나 서울 변두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고향 선배로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는 찾아갔다. 미아리고개 아래 성신여대 앞거리인데 아파트는 없고 기와집이 있는 골목에서 주소를 찾고 있는 때 웬 신시청년이 돌아보며 누구를 찾느냐고 묻기에 이성교 교수님을 찾는다고 물었다. 그 신사가 이성교 교수였다. 나는 빈손으로 갈수가 없어 과일 얼마와 겨란 2판을 사들고 가지 않았나 싶다. 이성교 교수와의 만남이 이게 처음이었다. 너무 반 가워해 주었다. 선생은 성신여자대학이 가까운 앞에 있어 자책이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부터 여러 문학모임에 같이 모이게 되었고 시낭송도 자주 권유 받았다. 특히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를 여행할 때는 고창을 찾아 많이 갔었다. 버스에 탄 일행들은 특히 내가 낭송하는 <자화상>을 좋아했다. 나는 특히 미당 선생의 마당에 핀 흰 해당화가 이채로웠다. 늘 나를 위해 어느 문학모임에서도 추켜 주시던 생각이 잊혀 지지 않는다. 이게 고향의 인맥이 아닌가한다. 그리고 어느 모임에서도 시낭송에 초대했고 시낭송이면 뭔가 자신이 있었다.
언젠간 이성교 선생의 생가를 꼭 가보고 싶었다. 아내가 돌아간 후 관광버스를 타고 제천 영월을 지나 태백에 이르렀다. 태백에서 하루 묵었다, 태백에는 포항까지 가는 직행버스가 있었다. 이 버스가 통리를 거쳐 골짜기를 지나 호산에 머문다, 이 험한 길은 울진 삼척 공비토벌로 군에서 포장도로로 만들었다. 이승복 사살 때 포장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길을 거쳐 호산에 도착했다. 호산에서 10분 머문다. 나는 초행이라 택시기시께 월천리를 물었다. 월천리에
이르니 집에 벽을 하지 않은 집이 있었다. 흙벽마저 하지 않은 집이 있었다. 그게 이성교 선생 생가였다.
앞문에 감나무가 있는데 단감나무라 한다. 뒤에 돌아가니 그것도 단감나무인데 엄청컸다.
모처럼 가는 길이니 음료수와 과자를 조금 돌고 갔는데 집에는 후모와 사촌이 살았는데 장애자였다. 내 눈에 뜨이는 것은 바다 모래섬의 <솔섬>이었다. 이 솔섬은 영국의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17)가 이곳을 지나다 사진을 찍어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대한한공이 광고시진으로 사용해 마이클 케냐와 분쟁을 일으킨 <솔섬>이 이곳 월천리에 있다. 고향마다 명물이 다 있다고 보인다.
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을 이성교 선생께 해 죄송한 말을 해야겠다. 삼척에는 공업학교만 있어 결국 강릉의 상고를 다니게 되었는데 버스를 타고 삼척을 지날 때마다. 변을 방했다는 것이다. 삼척이나 북평 고교의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갔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때문인지 늘 삼척을 지날 때 또 그런 변을 당할까 겁이 났다고 했다. 그때는 젊은 형기의 학생들이 외지 학생들을 만나면 구타를 하길 잘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이성교 선생을 만나면 강원도에 대해 많은 말을 재 주었다고 했다. 선생은 늘 이성교 선생을 만나면 <자네는 강원도의 정서가 좋아. 그것을 계속 이끌고 끝가지 가면 한국의 대가가 될 것이야.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성교의 시 속에는 강원도 동해바다의 어부들의 가난한 정서가 촘촘히 노래로 기록되어 있다. 갈령재를 넘으면 울진 땅이다. 웡천리로부터 이어지는 강원의 어촌은 속초를 거쳐 고성에 이르기까지 그 어부들의 삶이 동해안 사람들의 삶이다. 어촌마다 말씨가 다르고 풍속이 다르며 먹는 식성이 또한 다르다. 이 서로 같거나 다른 것들을 시로 조립하고 노래한 것이 이성교의 강원도의 정서며 사랑이다. 생활과 몸은 서울 타지에 있지만 시인의 정신과 마음은 언제나 강원도에 있었다.
월천리
월천리(月川里)
정 일 남
달빛비친 가곡천이 오늘도 흐르네
너무 맑아 손으로 받아먹어도 좋계네
물이 맑으면 마음도 맑은 세상
가곡천은 그런 물이었다
세상사는 사람들 누가 모르랴
한번 지나면 사진에 담아가는 곳
원덕읍 월천리 344평
국유림 200평(잡종지)
월천지 소나무
여기 어부네들 500년을 지켰다네
갈령재가 어디던가
저기 고개 넘으면
경상도 땅 울진이라 했지
바다고기 잡아
연명하고 살면 되는 겐데
생각하면 월천리가 제 몫을 했네
한양 선비가 월천에서 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