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오동균(키프리안) 신부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에 앞서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하는 질문도 하십니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그와의 관계를 말해보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석가모니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공자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는 불경에 나와있는 석가모니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그가 살면서 보여주시고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 즉 불교의 교리에서 석가모니를 말하는 대답을 하면 됩니다. 객관적인 대답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대답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석가모니와 상관없이 스스로가 묻고 깨달아야 하는 하나의 화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예수와 나와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관계라는 말은 ‘인생에서 예수라는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나의 존재가 지향하는 방향이 무엇인지가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하느님은 존재하는가?’와 같이 존재론적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당신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분은 나에게 ㅇㅇ이시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이러한 식입니다. 나의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ㅇㅇ이다.라고 믿는다’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믿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관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Χριστός)이십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당신은 나의 구세주(메시아)이십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메시아는 고난을 받고 죽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 이 말에 베드로가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호통을 치신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하느님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규정이 들어가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사람들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인데 여전히 자기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입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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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이야기
세계성공회가 공유하는 100가지 교회법 원칙
김호욱(디도) 신부
6부. 교회의 의식(전례)들
원칙 66: 성체성사 – 본질과 거행 (1)
1. 성체성사, 감사성찬례 또는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이며, 예배의 중심 행위이자 교회 전체의 행위이며, 각 교회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정당하게 집전되어야 한다.
2. 견진받은 모든 사람은 성체성사를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3. 성체성사는 교회 건물이나 기타 예배를 위한 장소에서 집전되어야 한다. 다만, 병자나 집에만 머물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한 영성체는 예외로 하며, 다른 경우에는 주교의 허가를 얻어 행해야 한다.
4.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인된 예식서를 사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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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이야기
"빛 그리고 그림자"
조정근(프란시스) 신부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 자신을 보려면 거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가장 잘 알게 하는 거울은 타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가 6:41)
사람들은 늘 남들의 단점을 자주 지적합니다. 누구는 바보 같다는 둥, 또는 누구는 교만하다는 둥. 그런데 남에게서 보이는 모든 것이 내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사돈 남말 하네’란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바보같이 보인다면 내 안에도 바보 같은 속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교만하게 본다면 내 안에도 교만한 속성이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누구든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그 끔찍한 사람들처럼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안에는 빛의 속성도 있지만 어두움의 속성도 있습니다. 남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면 검지만 남을 향하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볼 때 자꾸 좋지 않은 티가 보인다면 실상은 내안에 있는 더 큰 들보를 깨달으라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내 안의 들보가 없다면 남의 좋은 점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 안의 그림자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남을 비난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께서는 나를 깨우치게 하시려고 다양한 사람들을 보내셔서 내 안의 다양한 어두움들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 마음바탕이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의 이러한 어두움을 치유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내 안에도 저런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령께 맡기고 치유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사람이 걷는 내면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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