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5:38~42
본문38,39절의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지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며"
이 말씀은 참 유명하지만 행하기도 어렵고 쉽게 이해도 되지 않는 말씀이다.
구약의 율법에선 '눈에는 눈, 이는 이'로 갚으라며 동해복수법을 제정하셨던 하나님인데, 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신 것일까?
거기다 성부 하나님은 얼마를 손해보게 했으면 얼마를 갚으라는 둥, 계산이 철저하셨는데, 예수님은 이젠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주고,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며 딴 말씀을 하신다.
기독교가 누구말 마따나 호구가 되는 종교라고는 하지만 이건 정말 도가 지나치단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왜 신약시대에 와선 이렇게 높은 수준의 희생과 박애정신을 요구하시는 걸까,
신약시대 사람들이 구약의 사람들 보다 의식이나 도덕수준이 높아서는 아니다.
시대를 믹론하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고 이기적이다. 그때보다 지금이 교육이나 신앙의 힘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른 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댄다는 건, 막장 부부나 깡패들이 한대 맞고 눈이 돌아가 다른 뺨을 코앞까지 들이대며 .."너 나 쳤냐? 그래. 여기도 한대 때려봐라. 자, 쳐봐!쳐봐!"하며 너죽고 나 살자하는 식으로 달려들 때나 나올 수 있는 시추에이션이다.
사실 인간에겐 지금도 구약 율법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말이 더 현실적으로 적합한 계명이다.
이 말은 안믿는 사람들 조차, 합리적이며, 통쾌하고, 한편 멋있게도 느껴져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일 정도다.
그러나 사실, 이 동해복수법은 사람들 생각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라고 정해 주신 법이 아니다.
그 당시엔 이스라엘 초기 국가형성시라, 질서를 세우고 공의에 입각해 죄지은 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해 개인 간의 과잉복수를 막기 위함이었다.
사람심리가 한대를 맞으면 두대를 때리고 싶고 그렇게 두배로 맞으면 거기서 더 배로 때리고자 하는 보복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동해복수법의 원래취지에서 벗어나 복수를 정당하게 생각해 복수가 새로운 복수를 불러 일으키고 그렇게 끝이 없이 서로 해치고 싸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이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보복을 금하는 말씀을 하신것이다.
그런데 금하는 것을 넘어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란 말씀을 하시니, 너무나 따르기 힘든 말씀이라 성도들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물론 자기 친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같은 훌륭한 목사님도 간혹 있지만, 자칫 자기 믿음에 대한 과신으로 실천 했다가는 영화 '밀양'같은 부작용이 생기기 쉽다.
영화 밀양은 주인공이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면회를 갔다가 그 살인자가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자, 주인공이 왜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하나님 당신이 용서를 하냐며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넘어 대적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비기독교이 기독교를 몰이해한 상태로 만든 영화이니 탐탁치 않은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인간은 근본적인 심성으론 이 말씀을 따르는 데는 이처럼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도 로마병사에게 뺨을 맞고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셨다며,이는 악에 대한 무관심과 무저항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법이라 해석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히 무보복, 무저항의 개념과는 틀린 다른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 시대, 유대인들은 오른 손을 주로 사용을 해서 오른 뺨을 친다는 것은 손등으로 쳤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있어 손등으로 치는 건 노예들에게나 하는 최대의 모욕과 멸시의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처럼 예수님은 로마병정들이 모욕하고 침을 뱉고, 때렸어도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단 한마디 저항도 없으셨다.
거기다 채찍으로 맞아 몸이 찢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 손과 발이 못에 박혀 십자가에 달리셨다. 누가 이 고통을 가늠이라도 할수 있을 까.
그래서 오른 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댄다는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해 맞으셨는데, 또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맞는 걸 넘어서 갈갈이 몸이 찢겨 십자가에 매달리신 걸 의미한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또한 40절에서,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이 말씀의 뜻 또한 뺏으려 하는 자에게 다 주란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대로 라면 우린 도둑이나 보이스피싱벙에게도 다 털려 줘야 한다.
이 시대, 유대인에겐 겉옷은 속옷과 달리, 의복의 개념을 넘어 자신의 신분의 상징이며 재산이었다.
또한 일교차가 큰 중동에서 겉옷은 이불로도 쓰여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서 겉옷을 전당잡지 말고 잡더라도 밤에는 돌려주라고 한것이다.
이처럼 겉옷은 가난한 자에겐 생존과도 직결된 중요한 재산이었고, 또한 부자들에겐 자신의 신분과 권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그와는 달리, 속옷은 사람의 수치를 가리고 또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속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는 의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수치를 가려주셨고, 또한 악한 영들로 부터 구해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기에 '너로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란 표현을 하신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예수님은 우리에겐 너무나 과분한, 자신의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까지 주신 것이다.
실제로 로마병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후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졌다.
로마병사는 죄인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우리를 상징한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또한 41절의 "또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이 말씀도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여기서 억지로 가게 한다는 것은 강제징발을 말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런 강제징발에 대해 무척 반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저항하지 말라 하신 것이지만 이 또한,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끌려 가셨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오리에서 더한 십리를 동행한다는 것은, 역시 죄사함을 넘어 구원의 완성자인 예수님이 동행하여 주심을 의미한다.
두배수와 10은 하나님의 완전수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게 하고 끌고 간자는 역시 죄인된 우리이다.
우리에겐 절대적으로 죄의 해결이 필요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가게 했고,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고 거기에 더해, 인간 궁극의 회복인 하나님이신 자신과 합일, 즉 신부로서의 특권까지 주신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육체를 포기하시고, 자신이 벌거벗음으로 우리에게 속옷과 겉옷을 입히시고, 우리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완전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주라는 것이다.
그럼 이 말씀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해서 행할 수 있을 까.
초신자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외롭고 힘들거나 어떠한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나 천국 같은 이야기는 왠지 뜬 구름같이 느껴지고 그 당장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당장의 결핍을 채워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한 것, 즉 주님께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면 그보다 더한 것을 주는 것이다.
결핍을 채워주지 않고 그 이상의 더한 것을 줄수는 없다.
다음 42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말씀도 액면적으론 구제의 의무를 말씀하신것이지만, 이 또한 영적으로 본다면 구원에 대한 자격의 정하심이 없음을 의미한다.
살인자든, 과거에 아무리 악독한 삶을 살았 던자라도 예수님께 손을 벌리는 자들은, 예수님은 다 구원의 자격을 주심을 의미한다.
덧붙여 얘기하면, 나는 우리가족 성도분께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란 이 말씀에 대한 강해설교를 부탁 받았을 때, 처음에는 이 말씀을 단순히 무저항주의로 해석해 설교하려 했다.
나는 사실 싸우기를 싫어해, 차라리 손해보는 편을 택하는 성격인데, 이는 내가 특별히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라 싸울 때 생기는 스트레스를 못견뎌 해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 있어서, 고소하면 이길 싸움도 고소하지 않고 잊어버리려 한다.
그러는 동안 나도 그만큼 데미지를 입기 때문이고, 나중에 그 사람이 다른 곳에서 댓가를 치르거나, 아니면 나중에 진심으로 후회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진정한 복수라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처음엔 그런 무저항, 무보복주의에 대해 촛점을 맞췄는데, 쓰면서 이말씀이 그런 뜻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인류에 대한 자신의 희생 즉, 십자가 사랑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이고, 우리에게도 그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누가 16: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