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을 읽고/윤석호
매주 장을 보러 갑니다. 가는 길이 약 30분쯤 걸립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언제부턴가 아내가 옆에서 시집을 꺼내 읽습니다. 자주 시집이 바뀌는데, 웬일인지 몇 주째 같은 시집입니다. 심지어 가끔 음성이 불안정해지기도 합니다. 나도 시를 쓰고 시집을 냈지만, 내 시집을 안 읽는 것은 그렇다 쳐도 울먹이는 구절이 참 생뚱맞습니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생을 걸고 전력투구를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호불호가 있게 마련이고, 30년 넘게 생을 함께해온 아내와 나는 그 호불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생뚱맞은 구절이 많아지면서 새삼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나?’
소설을 읽는 독자는 기승전결을 거치며 전체를 알 수 있게 되지만, 시는 작은 조각 같아서 이것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전체 그림이 어떠했는지를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1%만 아는 것으로 모르는 99%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시집은 때로 사랑하는 두세 편의 시를 믿고 끝까지 간다는 결의로 읽어야 읽힙니다. 서너 번 시집을 읽고 나면 시집 속 시들이 처했던 상황이 눈에 보이고, 어느 틈에 낱낱의 조각들이 정렬되면서 전체 모자이크가 보이게 됩니다.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찾아, 문을 안에서 잠그고 스스로 갇혀있는, 어떤 사람 옆에 함께 있고 싶어졌습니다.
까맣다는 색깔이지만 꺼멓다는 깊이입니다. 하지만 까만 것들이 무심결에 스쳐 지나가면 어두운 그림자가 흩뿌려지고 그것들이 한데 뭉쳐 일상의 곳곳에 컴컴한 구덩이처럼 매복합니다. 매복을 피하는 방법은 함께 매복하는 것뿐입니다. 넉넉하고 유쾌한 사람이 좀 더 유쾌해지려면 얼마나 큰 비용이 지불되어야 할까 생각하면, 좀 씁쓸하고 어둡다는 것은 작은 것으로도 쉽게 밝아질 수 있는 소박함과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년, 박복한 년” 소리를 들어도 속으로 자신을 향해 ‘그래 이년아 웃어라 웃다 보면 차라리 웃다 보면 잔은 또 그렇게 차오를 테지’ 하며 피식 웃을 수 있게 하는 넉넉함도 함께 숨어 있습니다. 섣부런 극복보다 얼마나 더 가열찬 극복인지. 울컥하는 쾌감인지.
어둠을 벗어 놓고 나가버린 방 주인을 찾아 거리로 나섭니다. * ‘기성회비 조르던 놈 큰 소리로 야단치고 돌려보낸 학교길’을 따라 걷습니다. 무거운 뚝배기가 일품인 삼계탕집을 지나, 찬란한 웨딩드레스가 걸린 쇼윈도우를 지나, 익명의 새들이 남김없이 철거된 종점에 닿았습니다. 한번 도착하면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종점은 끝 모를 소멸점 같습니다. 그 소멸점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바람이 붑니다. 꼭대기는 생의 가장자리처럼 밀리면 끝장날 것 같지만, 아침이면 가장 먼저 해가 뜨고, 해 뜨기도 전에 종점에서 첫차가 텅 빈 속을 훤히 밝히고 사라집니다. 그제야 나는 방이 있던 그곳으로 되돌아온 줄 알게 되었습니다. 기점인대도 굳이 종점이라 불러야 편해지는 것은 마음 한구석 자리 잡은 어둠 때문일 겁니다. 끊임없이 편한 이유를 찾아내고도 낯선 한 두 가지 때문에 생이 불편해지는 순간을 글 속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사소해서 가벼운 것들은 불편을 이유로 버려도 되는데, 무게로 축 늘어진 것들은 왜 버릴 수 없나, 다 같은 무게의 문제인데.
차는 벌써 마트 주차장에 도착해 있습니다. 내가 세세한 문장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아내는 벌써 시집을 서너 번 읽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는 맥락도 없이 울먹일 수는 없습니다.
쉽게 열었던 박소란의 [심장에 가까운 말] 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이제 좀 편한 마음으로 시집을 닫습니다.
* 노래 “까치길”(작사/작곡 안혜경)의 가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