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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 2019. 10. 25. 이현래 목사
[로마서 3장 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종교개혁이 일어난 큰 사건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면 한쪽에서 반문이 생긴다. 그러면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것이지 의로워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사람은 영원히 의로울 수 없고,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구원받은 죄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지만 여전히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큰 맹점이다. 그런데 로마서를 읽으면서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여기서 해답이다. 그래서 8장에 가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하여 해결이 되었다. 그런데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면 다음 답이 안 된다. 그래서 웨슬레 측에서는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그 다음부터는 충실히 성결의 생활을 밟아가야 성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결교회가 나오게 되었다. 중생, 성결, 신유, 성화라고 하는 네 가지 복음을 가지고 성결교회가 생기게 되고, 감리교회는 점진적인 성결을 주장하는 파가 된 것이다. 나도 옛날에는 믿음으로 무조건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을 처음 받았기 때문에 아주 좋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조건을 묻는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인간에게 조건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니까 가벼워진 것 같다. 그런데 나중에 의문이 남는 것이 언제 가서 의로워지는가? 의로운 하나님과 상대해서 살려면 의롭다 여겨만 가지고는 못 산다. 길가에서 거지생활을 하는 여자를 불쌍한 마음으로 데려다가 잘 인정 해주고 그렇게 살면 좋지만 옛 습관을 전혀 버리지 않고 거지생활을 계속 하면 같이 살기 어렵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다음의 해결이 없으면 좀 난처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바르트인가 누가 말했는데, 그것이 좀 모순이 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벧전1:16)라고 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합을 하려면 서로 같이 거룩해야 된다.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2:19)고 한다. 그러면 아담이 볼 때, 이름을 다 지었다는 것인데, 갑자기 거기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2:21,22)라고 하며 하와를 지었다는 말이 갑자기 나온다. 그 사이에 ‘그러나 모든 이름을 다 지었는데 배필이 없으므로’를 넣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 하나를 빼서 하와를 지었다. 그랬는데 하와를 보고 하는 말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2:23)고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한 생명이라야 연합이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다른 생명과는 연합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선악과를 먹고 추방된 이유는 다른 생명을 먹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다. 생명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큰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런데 뭔가가 해결이 안 되니까 무조건 의롭다고 하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말세를 생각하게 되고, 또 천당을 생각하게 되고, 뭔가 답이 있을 곳이 필요하게 된 것 같다. 로마서를 더 읽으면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말이 나온다. 내가 개와 함께 죽었다고 해서 하나가 되겠는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은 동지가 되었다거나 동일시가 됐다거나 하나가 될 수 있는 뭐가 되었다는 말이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으니까. 그것이 결국 구속이다. 만약 구속이 없다면 그냥 의롭다함을 받아서만은 안 되는 문제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인정을 해주더라도 내가 안 되는데 어찌하겠는가? 아무리 인정해 주더라도 내 양심이 그분 앞에 갈 수 없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카톨릭이 행위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냥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니까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성경을 읽을 때 로마서 전반부를 읽으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무슨 행함이 있을 때, 의롭다 함을 받았는가? 아직 행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의롭다하지 않았는가?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도 자세히 보면 의롭다함을 받고 난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는가? 그것이 아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섞여 있다. 이스마엘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계획과 생각이 섞여 있는 것이 이스마엘이다. 그래서 두 민족이 갈라지게 된다. 이란 형제가 우리 교회에 왔었다. 지금 부산에 살고 있다. 내가 이삭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아느냐고 하니까 안다고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이삭의 족보로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이스마엘의 족보만 알고 있다. 이삭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전혀 모른다고 한다. 성경도 둘이 된 셈이다. 그쪽에서는 아브라함-이스마엘, 이쪽에서는 아브라함-이삭 이렇게 된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롬9:7)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삭이 내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부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마엘도 낳고 이삭도 낳았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끝나면 헷갈리게 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속에 아주 중요한 구절이 들어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고 한다. 그냥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으면 그 구속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위치가 원위치로 돌아왔는데 거기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되니까 완벽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성경 말씀을 자세히 읽다보면 너무 신기한 것이 많다. 어떻게 이런 말이 여기에 딱 들어있을까? 만일 이 말이 없으면 그냥 무조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가 된다. 그러면 종교개혁 당시에는 그것이 이슈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데, 조금 더 나오면 당장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홀리네스(Holiness)같은 것이 생기게 된다. 더 점진적으로 나가서 생활을 해야만 그렇게 된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선교사 한 분이 왔다. 우리 교단이 원래는 성결교 출신 목사들이 세운 교단이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가르치고 주도하시던 목사님들은 옛날 분들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외국에 유학한 사람들 외에는 영어를 모르고 일본어를 아니까 거의 일본어 책으로 보았다. 우찌무라나 구로사끼나 이런 분들은 이미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성결교와 다르다. 그 사람들은 바르트도 참작하여 성경 강해를 들으면 굉장히 좋고 변증하는 것이니까 걸리는 것도 없고 너무 좋다. 그 선교사는 미국에 있는 ‘Church of God’은 홀리네스(Holiness) 계통이다. 이름이 같으니까 연합을 하게 된 것인데, 내용은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강의시간에 그 사람이 웨슬레가 쓴 이라는 책으로 강해를 했다. 내가 그때는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는 것이지 무슨 사람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가 싶어서 한 시간 동안 그 선교사와 토론을 했다.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성결의 생활을 해서 의롭게 되는가? 사람은 영원히 죄인이고 단지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지 의로워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의로워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한 시간 동안을 반박했다. 그 사람은 계통이 홀리네스(Holiness) 계통이다. 신학교는 유니온 신학교를 나왔는데, 속해 있는 교단은 홀리네스(Holiness) 계통이라서 그 내용으로 강의를 하러 왔던 것이다. 그때는 그랬는데 나중에 그것이 애매하다. 무조건 믿음만 있으면 의롭다 여긴다는 것은 의로워진 것은 아니다. 의로운 하나님과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과 어떻게 완전한 연합이 되겠는가? 생명이 일치해야 연합이 되는데, 생명이 일치하지 않으면 연합이 될 수 없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로마서 6장에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으로 해답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쪽이 희미해지면 그냥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하고 다른 것이 없어져버린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딱 못 박아 놓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결국 이 죄는 원죄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구속이 없이는 의롭다 여길 수 없다는 말이다. 구속이 전제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동산으로 복귀하는 문제는 구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그 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더라도 믿음으로는 수속은 되지만 그렇다고 그 동산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구속이 그렇게 중요하다. 사실은 내가 그 구속 때문에 뛰어내리지 못한 예수를 얘기 했는데, 의외로 말이 많다. 그러면 너무 예수님을 폄하시킨 것이 아니냐는 사람도 있고 말이 많다. 좋으라고 말을 한 것인데, 알아듣기 쉽게 말하느라 한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고 해서는 두루뭉술해서 아무것도 안 된다. 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구속을 받았다고 다 알고 있는데 무엇을 받았는가? 오늘날 교회를 볼 때, 구속이 실종된 것 같다. 구속은 실종되어 버리고 없고, 다른 것만 잔뜩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것이구나. 여기서 결점이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으니까 너무 좋았다. 이렇게 쉬울 수가 있는가? 그분이다 완성해 놓았는데, 우리가 참여만 하면 되는 것이구나. 너무 쉬운 일이다. 그래서 말했더니 너무 쉬울 줄 알았더니 너무 어려운 사람이 또 있다. 그래서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원위치로 돌아갈 곳이 없으면 문제는 영원히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그 원죄에 대해 알아보니까 원죄 자체가 희미하다. 카톨릭에서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것이라고 써 놓았다. 이것은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러면 근원이 없는데 거룩함과 의로움은 무엇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또 사람의 생각대로 거룩하고 의로운 행위를 하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어떤 결과로 거룩함과 의로움이 상실된 줄 알아야 그것이 해결될 텐데, 원인은 모르고 결과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결과라는 것이 사람이 보는 거룩함이고 의로움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해결이 안 되고 있구나. 그러면 개신교는 무엇인가? 관계 관점의 입장에서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불순종이 문제라고 한다. 그러면 왜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는가? 인류의 대표자가 어떻게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 같으면 사람이 회개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려고 하고 하나님 뜻대로 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 안 되는가? 자기 속에 죄가 거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뭔가 생명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노력을 하는데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뭔지에 대해서는 말을 자세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 본성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미 벌써 자기는 6장에 까지 와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라고 말을 했는데 7장에 와서 갑자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4)고 탄식한다. 그런데 8장에 가면 갑자기 다시 말을 바꿔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한다. 갑자기 구름 낀 하늘이 청명한 하늘이 된다. 예전에 그 말씀을 읽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우울한 자리에서 나는 나대로 그렇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이 바꿔져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그래서 너무 기분 좋게 읽은 성경 구절이다. 그런데 왜 그 속에 있는 그것이 해결이 안됐는가? 바울이 말한 그것은 분명히 본성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데, 해결되는 것은 결국 구속이다. 그러려면 결국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의가 세상에 왔나니(롬5:12, 롬5:19참고)하는 말씀에 따라 보면, 결국 원죄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왔고 전가됐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고 하는데, 그 전가라는 말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떻게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로 전가될 수 있는가? 율법에도 아비의 죄가 자식에게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3대 4대 수천 대에 이른다는 말도 있지만 법률상으로 봐도 아비의 죄가 아들에게 간다는 말은 좀 모순된다. 여기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도 무조건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안 될 것 같다. 먼저 구속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지 무조건 하고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종교개혁 때나 할 말이지 지금 와서 할 말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는 이 구절에 명백하게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속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구속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환원이 되어 있다. 근원으로 돌아가 있다. 그 안에서 ‘In Christ’하는 것이 결국 ‘구속자 되신 예수 안에’라는 뜻이다. 그냥 ‘In Christ’라고 하니까 우리가 믿으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은 좋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안 된다. 내가 그리스도를 모시려고 해도 안 되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된다. 늘 점검해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분을 늘 모시고 살 수 있는가? 그것도 안 된다. 자세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된 것이다. 내가 모실수도 없다. 내가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In Christ’가 없어져 버린다. ‘In Christ’가 없어지면 다른 것은 다 소용이 없어진다. 모든 축복은 동산 안에 있었던 것이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 안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인간에게 주신 모든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데 어떻게 사람이 축복 안에 들어가겠는가? 계급장 하나에 따라서 들어있는 혜택이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별 하나와 별 두 개의 차이가 엄청나게 많다고 한다. 대령과 별 하나와 너무 다르다고 한다. 그 안에 들어있는 권리가 그 만큼 차이가 있다고 한다. 별 하나를 달 때 이미 그 많은 권리를 가지고 나왔다. 자기가 맘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별 판 하나 달고 자동차가 나가면 그 별 판 밑에 있는 사람은 다 장군이 있든지 없든지 무조건 경례를 해야 한다. 그래서 폐단이 많다고 해서 장군이 타지 않을 때는 운전사만 갈수 있으니까 번호판을 가리고 간다. 사람을 창조할 때, 이미 모든 축복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그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아무 축복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노력해야 된다. 내 노력만큼 부자가 될 수 있고, 내 노력만큼 의로워질 수 있고, 모든 것이 내 노력에 달려 있다. 그러면 차라리 불교가 더 진실하다. 불교는 말끝마다 마음을 다스리고 정진하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도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은 것을 받으라는 것이 은혜다. 다 준비했으니까 이것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 은혜인데, 받으라는 것은 없고 매일 하라는 것만 있으면 도로 율법이다. 불교 방송을 들으면 차라리 들을 만하다. 자기가 노력한 데로 되는 것이니까 상식적이다. 설교를 들으면 이것이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인지 은혜를 입어야 되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복음을 전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가 누리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만들어가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분이 만들어 놓은 것을 받는 그것이 복음이다. 사역자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뭘 하라고 하기 위해 사역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런 복을 준비해 놓았습니다.’라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복음이다. 내가 그 복을 누리지 못하면 사실은 은혜를 전파할 수가 없다. 나도 열심히 노력을 해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구속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분 자신이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것만 보여주면 그 사람이 그것을 안 먹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음식을 다 차려 놓았는데 먹으라고 하면 먹어야지 그래도 안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잔치 집에 가는데 잔치 집에서 음식을 다 차려놓고 먹으라고 하면 되는데, 와서 무엇을 하라고 하면 잔치가 되겠는가? 은혜라는 말이 그냥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 해놓은 것을 우리가 버리고 갔으니까 하나님이 해 놓으신 것을 여기 있으니까 와서 찾아먹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것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 준비된 것이 있다. 쫒아 다니지 마라. 애쓰지 마라는 것이다. 찬송가에도 ‘힘쓰고 애씀이 없을지라도~’ 그런 노래도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전하는 사람에게도 굉장히 행복한 것이다. 자기가 먼저 봤으니 더 행복하다. 잔치 집을 지금 자기가 먼저 보았다. 자기는 한탕 먹고 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너무 좋은 것을 지금 먹고 와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 자체가 행복이다. 알고 보면 율법을 전하면 하는 사람이 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려면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려면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잘못하면 자기도 걸릴 수 있다. 그러면 다음에 뭐라 하겠는가? 어떤 분들이 그런 분들이 있다. 신유의 은사를 가지신 분들이 병원에 안 가고 죽는 분들이 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가 병원에 갈 필요가 없고,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고 했다. 죽을 사람이 살아나기도 했다. 그런데 자기가 막상 병이 들면 병원에 어떻게 가겠는가? 못 간다. 설사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갔다하면 거짓말쟁이가 된다. 여러분들이 보면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 토론토에 있는 교회에 병 고치는 목사가 있었다. 교포사회에서 3000명이 모이면 굉장히 큰 교회이다. 뒤 늦게 목사가 되었고, 병 고치는 은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간암에 걸렸다. 병원에 아무리 가라고 해도 병원을 갈 수가 없다. 병원에 가지 말고 하나님 은혜로 나으라고 했는데 이제 자가기 병원에 가면 무슨 꼴인가? 못 간다. 그래서 결국 죽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믿고 있다가 그 사람이 죽어버렸으니까 교인들이 우왕좌왕 해서 뭐를 잃어버린 것이다. 율법을 전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불안한 일이다.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이들도 그런 것은 다 안다. 조금 큰 애가 자기보다 작은 아이들에게 이래야한다 저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 아주 가관이다. 우리 교회에 그런 애들이 있었는데 둘이 다 약간 모자란다. 조금 나은 애가 모자라는 애를 닦달하는 것을 보면 되게 닦달한다. 왜 이러냐고 이러면 안 된다고 고치는 것을 보면 무섭게 뭐라 한다. 자기도 그런데 남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습다. 율법 선생은 자기가 스스로 자가에게 대해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함부로 할 일이 못된다. 내가 언제 잘못할지 모르는데 그것을 뭐라고 해놓으면 언제 가서 내가 걸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설교를 못하겠더라. 내가 좋은 것만 이야기 해야지 설교를 못하겠다. 나도 걸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정말 공짜이다. 내가 손을 댔는가? 내가 못을 박아봤는가?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런데 거기서 참 사람이 나타났다. 저것이 참 사람이구나. 한때는 예수님을 보고 신인지 인간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가? 그것이 한 두 번이었겠는가? 물과 포도주를 만들 때, 저가 누구기에 포도주를 만들었는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되지 않겠는가? 모든 행보가 다 그랬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온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려봐라,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꼭 미워한 사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너무 사랑한 사람들이 더 많이 애를 썼다. 제자들을 생각해보라. 그 자리에서 자기들의 인생이 망하느냐, 흥하느냐가 달려있다. 얼마나 마음이 조였겠는가? 뛰어내릴 수 있을까 없을까? 뛰어내리면 대박 나는 것인데, 만일에 못 뛰어내리면 자기들은 무엇인가? 완전 인생 망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뛰어내리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제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으니까 다 가벼렸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를 잘 못 봤던 것이다. 속에 감춰졌던 예수를 못 봤던 것이다. 그런 이적이 다 떠나가도 남아있는 그 사람을 못 봤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참 사람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신학적으로 복잡하다. 그러면 인성밖에 없다는 말인가? 양성이 있다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양성이 있다는 것도 내 생각은 양성을 같이 갖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신성은 어디 가고 없고 인성만 못 박혔는가? 너무 모순된 문제이다.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는 꼭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니까, 참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니까, 그전에 신이었든지 아니었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다. 나를 구속하는 자리에서는 사람이어야 한다. 요한1서 5장 마지막에 보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고 한다. 그가 참 하나님이면 여호와는 가짜라는 말인가? 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에 대한 칭호니까 우리를 구속함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구속 주, 구속의 하나님,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직위에 대한 칭호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그가 누구인가? 예수보고 한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이 아주 신기한 구절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 끝에 갑자기 그래 놓았다. 옛날에 보면서 이상하다. 왜 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우상에서 멀리 하라는 말을 여기다 붙여놓았는가 했는데 “참 하나님이시오.”라는 그 말이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요 했으니까 그것 말고는 다 허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한다. 나는 누가 물으면 이렇게 말하겠다. 예수는 우리를 구속함에 있어서 우리의 하나님이다. 나에게 구속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함에 있어서 하나님이다. 모세가 내가 애굽에 어떻게 갑니까? 바로에게 어떻게 갑니까? 하니까 내가 너를 신으로 세우겠다고 한다. 모세는 사실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속의 하나님이다. 모세가 내려오지 않으니까 금방 금송아지를 섬겼다. 참 하나님을 못 만나면 누구든지 다 우상을 섬기게 마련이다. 사람은 참 하나님이 없으면 우상을 금방 만든다. 구속은 절대적인 은혜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도와준 일이 없는 절대적인 은혜이다. 그것을 보고 내가 저기서 떨어졌구나. 저 사람이 안 되려고 저런 사람이 안 되려고 우리가 떨어졌구나. 이것을 발견하면 내 원위치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그것을 알고 나면 설사 좀 실수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빠져 들어갈 수가 없다. 내 본체가 무엇인줄 알았는데 하겠는가? 로마서 7장은 그런 이야기이다. 알았으니까 안하려고 하는데 속에 뭐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정리 될 일인데 아직 정리가 덜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가 구속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 180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옛 아담처럼 하나님 같이 되려는 생각을 못한다. 그런데 원래 있던 근성이 남아 있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 근성이 또 나올 수도 있다. 바울이 괴로워했던 것이 그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했다. 구속 안에는 정죄가 없다. 죄를 용서하고 말 것이 없다. 구속 그 자체가 용서이고, 구속 자체가 원위치로 돌아왔는데 재판 할 일이 뭐가 있는가? 세상에서도 사람이 죽어버리니까 죄가 있어도 아무것도 안 물어본다. 원인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추궁할 데가 없다. 그냥 검찰에 갔다가 좀 당하고 나면 자살해버린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끌려 다니면서 계속해서 더러운 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냥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살아봤자 욕밖에 더 있냐하고 죽어버리니까 다시는 검찰에 오라는 말도 없고 가라는 말도 없다. 구속 안에 있는 사람에게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원인무효가 되었으니 정죄함이 없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할 수도 있고, 새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부활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하여간에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출발이 근원이 애매해서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원죄라는 것에 대해 별 말이 없다. 그래서 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피로 말미암아서 죄 사함을 받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구속을 피로 인한 구속이라고 써 놓았다. 성경의 역사는 피 흘림의 역사라고 써 놓았다. 그런데 피를 흘린다는 의미는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보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 죄를 말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라는 이 말이 아니다. 율법으로 인한 죄, 범죄, 율법에 대한 범죄, 일상에서의 범죄, 이런 전부를 포함해서 피로 씻는다고 되어 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말은 원죄를 씻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가 일상으로 범한 모든 죄를 다 씻는다는 말이다. 성전에 들어가서 일하는 제사장은 먼저 피로써 자기를 정결케 해야 한다.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도 다 피로 정결케 해야 한다. 베드로가 피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찾아보니까 다 원죄가 아니고 자범죄이다. 자범죄도 죽으면 끝난다. 죽어버린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구속은 원죄에 관한 문제이다. 자범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원죄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면 자범죄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원죄로 인해서 파생된 것이 결국은 자범죄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같이 밥을 먹었지만 똥은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처리하려고 돌아다니면 끝도 갓도 없다. 언제 이 지구상에 사람이 깨끗하게 백지처럼 될 날이 언제 오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그것 때문에 와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시어머니와 싸운다고 그것 때문에 죽겠는가? 친구와 싸운다고 그것 때문에 죽겠는가? 예수가 죽으신 이유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성경구절은 우리에게 참 중요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지금 모든 세계의 교회가 새로워져야 된다고 하는데, 새로워지려면 구속이 분명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속이 흐리멍텅하고 애매한데 어떻게 새로워지겠는가? 끝에 나온 것을 가지고 이러지 저러니 하는데 그것으로는 안 된다. 병의 근원을 알아야 병이 쉽게 낫지 근원을 모르고 증상만 가지고 치료하면 언제 낫겠는가? 옛날에 문둥병은 천병(천질)이라고 해서 못 고치는 병이라고 했다. 별 약을 다 쓰고 아무리 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얼마나 안 되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했다. 대구에 오면 신동이라고 문둥이 촌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무서워서 거기를 함부로 못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닭을 키우는 데가 되었는데 약이 나오니까 금방 없어졌다. 원인균을 발견해서 균을 없애니까 다 없어졌다. 해골 물을 마시느니 어린 아이를 잡아먹으면 낫는다느니 별 소리가 다 있었다. 안되니까 별 이야기가 다 있었다. 그런데 균이 있어서 그런 것을 가지고 그것을 몰랐다. 그 균을 발견하고 나니까 해결이 되었다. 지금은 다른 병보다 치료하기가 쉽다. 결핵보다 쉽다. 원인을 알면 너무 너무 쉬운 일이고, 원인을 모르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인간의 자자분한 범죄들을 언제 다 해결하겠는가? 병나면 열도 나고, 병나면 짜증도 나는 것이지 병이 없는데 공연히 열이 나겠는가? 병이 없는데 공연히 짜증이 나겠는가? 근본적인 병은 하나님과 사람이 갈라져버린 것이다. 같이 살도록 지어놓았는데 갈라져버렸다. 같이 살려고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과부 문제가 생기고, 아내가 죽어버리면 홀아비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원래 있었는가? 없었다. 한쪽이 없어져 버리니까 없었던 것이 생겼다. 짝이 없어져 버리니까 하나님도 하나님 문제가 생기고, 사람도 사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짝이 없는데서 일어난 문제이다. 예를 들면 과부의 히스테리는 남편이 없으면 히스테리가 없을 것이다.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남편이 없으니까 당연히 생긴 것이다. 자연히 짝이 없으니까 생긴 것이다. 그것이 죄를 진 것인가? 원인을 제거하자. 우리가 원인을 알아서 원인을 제거하는 약을 먹어야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원인을 제거하는 약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생명의 양식만 주는 사람이 되고, 살리는 약만 주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고,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된다. 행복하면 저절로 일이 된다. 억지로 일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도 다 해보셨겠지만 교회는 일하려고 하다가 대부분 갈라진다. 일 좀 하려고 하면 이견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일을 안 한다. 일을 안 해도 다 된다.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모르지만 나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 40년 동안 누구를 시켜보지 않았다. 그런데 때가 되니까 자기들이 다 한다. 아이들이 밥 먹여 놓으면 걸어가는 것이고, 밥 먹으면 학교 가는 것이다. 애기 때 밥 먹이면서 학교 가라고 아무리 한다고 가겠는가? 그때는 젖만 먹어야 하고, 젖 다 먹으면 죽 먹여야 되고, 밥 먹여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이 은혜이다.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도 은혜를 베풀 때 무슨 근거가 있어야 은혜를 베풀지 근거 없이 은혜를 베풀 수 있겠는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래서 나는 구속 안에서는 의롭지 않다고 할 것도 없고, 죄가 어떻다고 할 것도 없고 그런 것이 없는 지대인 것 같다. 지금 내가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없는 지대이다. 에덴동산 안에 죄가 있었는가? 없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니까 거기는 죄가 없다. 갈라져 놓으니까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도 진노하는 하나님이 되고, 무서운 하나님이 되고, 불꽃같은 하나님이 되게 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 되었다. 불교에서 기독교를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왜 진로를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되어서 왜 화를 내느냐고 한다. 자기들은 도를 통하면 통할수록 화를 안내게 되는데, 너희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느냐고 한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그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자기 혼자 하는 것이니까 자기 혼자 화를 내면 미친놈이다. 둘이 살다가 하나가 없으니까 화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이놈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도망쳐 가버렸으니까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생각 같으면 불로 불벼락을 쳐서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사람이기 때문에 놔두고 있는 것이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도 그것이 사랑이다. 그들은 화를 내지 않아도 사랑이 없다. 화를 내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전혀 돌부처처럼 앉아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불교 방송을 자주 듣는데 들으면 다 똑같다. 그래도 기독교 방송을 듣는 것보다 들을 것이 더 많아서 자꾸 듣는다. 거기는 인간적인 이야기라도 듣는다. 그런데 설교는 잘못 들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은혜를 말하는 것인지 율법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3장에 벌써 이 말이 나왔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고 했다.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냥 무조건 천주교가 미우니까 그냥 공짜로 준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그 근거 안에서 준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구속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혁주의를 부르짖은 사람들은 종교개혁시대를 이야기하는 것 같고, 환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해서 안 되고, 환원하려면 에덴동산으로 환원해야 한다. 초대교회로 환원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일에는 떡을 떼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니 섬뜩하다. 환원운동 한다는 사람들이 주일에 떡을 안 먹으면 일 년 내내 떡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일 년 내내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자매가 처음에 교회에 들어올 때 일 년을 나오기로 약속했다. 일 년을 다녀보고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다고 했다. 웃으면서 잘 나와서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일 년이 된 어느 날 남편이 혼자 왔길래 왜 혼자 오느냐고 했더니 오늘이 약속한 날이라는 것이다. 일 년 동안 나오고 안 나온다. 일 년 동안 나와 주고 안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구나. 결혼해서 남편과 교회 문제가 헷갈리니까 남편이 나가는 교회에 일 년간 나와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아내가 나가는 교회를 나가라고 했던 것이다. 일 년을 나오는 동안 전혀 표가 나지 않아서 우리는 다 잊어버렸다. 그런 약속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렇겠나 싶었다. 그 날짜가 딱 되니까 딱 끊고 안 나온다. 왜? 일 년 동안 예배를 못 드렸다는 것이다. 종교가 잘못하면 무서운 것이다. 억지로 된 종교가 사람을 잡는다. 내가 정말 은혜가 되고 복이 된 것이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전파되어야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한 없이 살아야 되는데, 한 없이 살수도 없다. 여러분이 이어서 한 없이 전파해주기를 하는 바람이다. 은혜만 말해도 끝도 없다. 그런데 뭐하러 답답한 이야기를 하고 있겠는가? 하나님이 해놓으신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이제 새롭게 뭐를 하라고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