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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진주 스리랑카(Sri Lanka)
4. 경이(驚異)의 성채(城砦) - 시기리야(Sigiriya)의 미녀들
담불라에서 버스로 1시간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시기리야와 1시간 40분 정도의 폴론나루와는 하루에 모두 볼 수 있다고 하지만 내 체력을 감안하여, 하루에 여유 있게 한곳씩만 보기로 하고 먼저 시기리야로 향했다. 세계적인 유적지(인류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밀림 속의 도로가 엉망이고 관광객을 태우고 가는 버스도 형편없이 낡아서 스리랑카의 경제 사정을 말해주는 듯 안타깝다. 수 km 밖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원통 모양의 붉고 둥근 바위산(높이 180m)에 조성된 시기리야 성채(城砦)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높이 180m의 시기리야 성채 / 가파른 바위계단 / 사자발 문 앞에서
AD 5세기, 궁녀소생의 서출(庶出) 왕자였던 카샤파 1세는 아버지가 이복동생인 적자(嫡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아버지인 국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정적(政敵)들에 의한 암살의 두려움에 이 바위산 꼭대기에 궁전을 짓고 이 위에서 18년간 재임하였다고 한다. 수직의 바위벽을 쪼아 만든 계단과 좁은 바위벽 통로를 올라야만 하는 이 요새는 당시 어떻게 오르내렸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지금은 철로 만든 원통형 계단과 지그재그식 계단이 있어 오르기가 수월하지만, 현기증이 난다. 오르다 보면 당시 바위벽에 쪼아 만든 계단흔적이 보이는데 아찔한 수직에 가까운 바위벽을 어떻게 기어올랐을까, 위로부터 밧줄이라도 내려서 잡고 올라갔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원통형 나선 계단을 7~80m쯤 오르면 바위벽을 파내어 만든 높이 2m, 길이 10m정도의 작은 통로가 보이는데 이곳 벽면에 그 유명한 시기리야의 미녀들(Lady of Sigiriya)이 기다리고 있다. 풍만한 여인들을 그린 이 프레스코 채색화는 원래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훼손되고 지금은 18명의 여인 그림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현란한 색채로 당시의 복식(服飾)과 장신구 등을 보여주고 있다.
시기리야의 미녀들(프레스코화)
가슴을 드러낸 반라의 이 프레스코화는 지금도 그 아름다운 색채와 관능미로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또 바깥쪽으로 열린 반대편 가슴높이의 벽면에는 당시의 글씨들이 흐릿하게 보이는데 여인들 그림이나 이 글씨들은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어 만질 수도, 카메라로 찍을 때 플래시를 사용할 수도 없다.
이곳을 지나 비스듬히 옆으로 돌아 올라가면 바위산 중턱쯤으로 제법 넓고 평평한 공간이 나타나고 나무들도 자라고 있어서 쉴 수 있다. 이곳에서 고개를 젖히고 쳐다보면 다시 까마득히 철제 계단을 지그재그로 올라 정상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왕은 이곳에 다시 바위산을 오르는 돌계단을 파고 그 입구에 입을 벌린 어마어마하게 큰 사자를 설치해 놓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머리와 몸통은 없어지고 발(獅子足)만 남아있다. 예전에는 사자의 두 발 사이를 지나 사자 몸통 속을 통과하여야 위로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자는 불교를 수호하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상징성이 있다고 하는데 카샤파 1세는 이곳에 사자를 세워 지키게 함으로써 암살의 두려움을 털어내고자 했던 모양이다. 사자발 문 앞에서 바라보면 계단은 마치 사자 목줄기를 따라 사자 머리의 위로 오르는 형상이다.
바위산을 둘러싼 해자(垓字) / 정상의 물의 정원 / 정상의 성곽 유적
산의 정상은 평평하고 제법 넓은데 당시의 왕궁건물은 남아있지 않고 주춧돌들과 축대만 보인다.
그리고 탁 트인 사방으로는 푸른 밀림이 뒤덮인 넓은 벌판과 악어가 우글거린다는 호수(늪지)들이 한눈에 펼쳐져 보이며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 시기리야 성채의 또 하나의 신비는 ‘물의 정원(Water Garden)’이다. 꼭대기 왕궁터의 조금 낮은 곳에 정교하게 조성된 물의 정원이 있는데 넓이는 대략 사방 10m 정도의 야외 풀장 모양으로 맑고 푸른 물이 그득하여 관광객들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 바위산 꼭대기에 샘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빗물이 고였다면 썩거나 더러울 텐데 나도 손을 씻어 봤지만 비교적 깨끗하고 시원했다. 이 물의 정원에서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이 서너 군데 남아 있었는데 바위벽을 쪼아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설계된 계단이 아기자기하고 놀라웠다. 인도 아잔타 석굴사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성된 이 성채는 고대 세계 8대 경이(驚異:8th Wonder of the Ancient World) 중 하나로 꼽히며 유럽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 중 첫 번째로 꼽은 곳이라고 한다.
5. 고대도시 폴론나루와(Polonaruwa)와 갈 비하라야(Gal Viharaya) 사원
불탑 다고바(Dagoba) / 폴론나루와 왕궁유적 / 폴론나루와 전경
다시 담불라로 돌아와 하룻밤 자고, 다음날 버스로 1시간 40분을 달려 폴론나루와에 도착하였다.
시골 완행버스(버스비 68루피)는 털털거리고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데 차창으로 이따금 논도 보이고 야자와 바나나밭도 보이지만 거의 밀림지역이다. 날씨가 너무 더워 차타기도 너무 힘들고, 달리면 뜨거운 바람, 서면 온통 땀으로 흠뻑 젖는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야(Parakrama Samudraya) 호수 옆에 조성된 폴론나루와(Polonaruwa)는 신시가지(New Town)를 중심으로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고 구시가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상당히 넓은 밀림지역인데 온통 유적으로, 유명한 갈 비하라야 사원은 그 가장 안쪽 바위산에 조성되어 있다.
세계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폴론나루와 유적과 갈 비하라야 사원은 박물관 입장료를 포함하여 5.550루피(50달러)로 상당히 비싼 편이다. 숙소를 정하고 제일 먼저 세 바퀴짜리 툭툭이를 200루피에 대절하여 제일 안쪽의 비하라야 사원으로 향하였다. 툭툭이 기사는 기다릴 테니 사원을 보고나서 툭툭이를 타고 가면서 왕궁유적을 보라며 흥정을 하잔다. 사원을 보고나서 걸어 나오며 유적을 보겠다니 혀를 차며 멀기도 하고 더워서 도저히 못할 거라고 조르는 것을 쫓아 보냈다.
갈 비하라야 사원은 허술한 정문을 지나면 비교적 잘 정비된 공원이 나타난다. 넓고 잘 손질된 잔디밭과 나무들, 작고 아담한 호수사이로 조성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유적이 나타나는데 사원건물은 없고 자그마한 바위 언덕에 조성된 엄청난 불교유적과 마주하게 된다. AD 12세기, 외적의 침입으로 싱할라 왕국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이곳 폴론나루와로 옮기게 되는데 그때 이 갈 비하라야사원도 건축되었다고 한다.
바위산을 쪼아 조성한 5m 높이의 명상하는 부처좌상(坐像), 연꽃 위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제자 아난타의 7m 입상(立像), 오른팔로 머리를 괴고 누워있는 길이 14m의 부처님 열반상(涅槃像)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또 부처님 좌상과 아난타 입상 사이에는 자그마한 석굴을 조성하고 다시 조금 작은 부처님 좌상을 모셔서 창살로 막아놓고 있었는데 좌상 뒷면의 조각이 특이하고 아름답다.
5m 높이의 부처님 좌상 뒷면의 바위도 광배와 비슷한 조각으로 둘러져 있어 신비롭다. 이곳 안내인의 설명으로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은 발이 포개진 모양을 보고 열반상(死亡)인지 주무시거나 쉬고 있는 모습인지 판별한다고 한다. 아무튼 신발을 벗고(성스러운 곳이므로) 뜨거운 마당을 걸어 들어가 가까이에서 살펴 본 유적의 구석구석 모습은 감탄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명상 중인 부처님 / 와불상(臥佛像) / 불제자 아난타 입상(立像)
맨 안쪽의 갈 비하라야 사원과 연이어져있는 폴론나루와 고대신성도시(Sacred City) 유적은 대부분 석조로 된 궁궐이나 불교사원 건물 유적들로 목조부분은 흔적도 없고 석조건물 일부와 기둥과 벽, 그 초석 등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정비되어 있었다.
외세의 침입으로 11세기 초 2.000년간 수도였던 북쪽 아누라다푸라를 떠나 이곳 폴론나루와로 천도하였다가 다시 타밀족의 침입을 받자 13세기 더 남쪽의 캔디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곳은 폐허로 변하였다고 한다.
높이 12~30m, 벽두께 3m, 방이 50개에 이르렀다는 거대한 왕궁은 7층 규모였다고 하는데 흩어진 건물잔해와 허물어진 초석들만이 쓸쓸히 밀림 속에 누워있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불교사원,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모셨던 사원건물, 반듯하게 뻗어있는 도로들과 양옆으로 들어섰던 건물들의 초석들만이 당시의 화려했던 도시 면모를 짐작케 한다.
엄청난 유적 숲 속에서 혼자 어슬렁거리다보니 금방 지쳐버렸다. 너무 더운데다 밀림 속 왕궁을 둘러싼 도시유적이 너무나 넓게 펼쳐져 있어 둘러 보다보니 너무 힘들어 툭툭이 기사를 쫓아 보낸 것이 금방 후회가 된다. 안내책자에 나와 있는 주요 건물 유적만도 15개나 된다. 11세기에 건축되었다는 거대한 다고바(Dagoba)의 키리베헤라(Kiri Vehera), 조금 아래쪽의 또 하나의 다고바(둥근탑)인 랑코트베헤라(Rankoth Vehera), 승려들의 숙소였다는 투파라마야와타다게(Thuparamaya Watadage), 입구 부근의 시바 데바라야(Siva Devalaya), 목욕시설이었던 쿠마라 포쿠나(Kumara Pocuna) 등 대부분 둘러보았는데도 나중에 사진을 보니 어느 것이 어느 건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6.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와 세계 최고(最古)의 보리수
폴론나루와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 20분 거리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도착하여 거대한 호수 누와라 웨아(Nuwara Wewa) 옆 아담한 호텔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1박에 1.500루피(3만 7천원)의 호텔은 경관은 좋았지만, 내부시설은 말이 호텔이지 게스트하우스 수준이다.
BC 5세기, 싱할라 왕조가 처음 시작된 아누라다푸라는 AD 8세기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이후 인도 타밀족 등 외세의 침공으로 폴론나루와, 캔디로 계속 수도를 옮기면서 버려져 지금은 폐허로 변하였다. 그러나 매년 수많은 외국 관광객이 찾는 스리랑카의 고대 신성도시(Sacred City) 중 으뜸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 역시 신도시(New Town)과 고대도시(Sacred City)로 나누어지는데 폴론나루와 유적보다는 좁다는 인상이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크다는 아바야기리야 다고바(Abayagiriya Dagoba:원형의 불탑, 3세기)를 비롯하여 많은 다고바와 불교사원(寺院)터, 석조 연못 등 넓고 거대한 스케일의 건물 흔적이 남아 있으며, 독특한 스리랑카 스타일의 스투파(佛塔)인 다고바(Dagoba)가 처음으로 나타나게 된다.
제타바나라마 다고바 / 아바야기리야 다고바(Abayagiriya Dagoba) / 세계 최고(最古)의 보리수(菩提樹)
유골을 매장하는 인도의 화장묘(火葬墓)인 스투파(Stupa)와 ‘성스런 사리를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의 세일론어 다고바(Dagoba)는 모두 불탑(佛塔)으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상층부 모양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딱딱한 사각형의 불탑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또 스리랑카 최초의 사원이었다는 이수루무니야(Isurumuniya) 사원은 호숫가 바위에 새겨진 춤추는 코끼리의 조각으로 유명한데 스리랑카 불교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제일 둘레가 큰 다고바는 아바야기리야(Abayagiriya) 다고바라고 한다.
원통형의 다고바가 너무 커서 궁금하여 현지인들에게 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 속에는 무엇이 모셔져 있나 물어봤더니 안은 비어있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넓은 경내와 함께 가장 오래된 사찰의 불탑인 투파라마야 다고바(Thuparamaya Dagoba), 또 가장 높이 솟았던 제타바나라마(Jetavanarama) 사원의 다고바는 높이가 100m가 넘었다고 하는데 현재 위쪽이 부러져 있었다. 아름답고 거대한 하얀 돔(Dome)으로 유명한 루완벨리세야(Ruwanveliseya) 사원의 다고바도 유명하다. 또 근처에 박물관도 있어 들어갔더니 모두 작은 불상이나 조각들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다.
또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리수(菩提樹)가 있다.
BC 245년,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서 옮겨다 심은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현존 수목 중 가장 오래된 나무라는데 유명세와는 달리 밑둥 부분은 철책으로 가려져 보이지도 않고 가지만 무성한 것이 그렇게 오래된 나무라는 인상이 들지 않는다. 부다가야는 부처님께서 새벽녘 보리수나무 밑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바로 그 보리수에서 가져다 심은 나무라는 것이다. 보리수는 부처님이 그 아래에서 깨달음(Bodhi)을 얻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의외로 한국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포항에서 왔다는 10여 명의 4~50대 아줌마들로 매우 반가웠지만, 몹시 시끄럽다.
<스리랑카 기행을 마치며.... >
♦ 신비(神秘)의 나라 인도로 가는 길
순진무구한 스리랑카 소녀 / 몹시 이국적인 몸짓의 스리랑카 민속무용
스리랑카 소녀는 내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줍은 미소를 띄며 웃는다.
나의 당초 여행계획은 콜롬보에서 시작하여 스리랑카 북쪽 끝 도시인 제프나(Jeffna)에서 인도 쪽으로 삐죽 내민 반도인 만나르(Mannar)에서 배로 인도에 입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곳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인도로 가는 방법은 오로지 수도 콜롬보에서 비행기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콜롬보로 되짚어 와야하는데 썩을 대로 썩은 시골버스를 타고 더위 속을 갈 자신이 없어 열차를 알아보았더니 7시간 정도 걸리고, 2등 칸은 290루피(7.250원)로 3등 칸보다 100루피 정도 비싼데 좀 나을까 싶어 2등 칸 표를 사서 열차에 올랐다. 스리랑카는 대중교통(버스, 기차)은 무척 싸다.
아침 9시 10분 열차가 출발했는데 3등 칸을 건너다보았더니 2등 칸과 똑 같은데 2등 칸은 단지 좌석이 지정되어 있고 3등 칸은 좌석지정이 없다. 그런데 손님이 별로 많지 않으니 2등 칸이나 3등 칸이나 똑같다. 제기럴...
마침 계속 비가 내려서 덥지 않아 다행인데 열차는 흡사 시골 트럭을 탄 느낌으로 엄청 덜컹거리고 역도 아닌 곳에서 무슨 이유인지 수시로 서고, 단선철도라 작은 역에라도 들어서면 다른 열차가 지나가기까지 한도 끝도 없이 기다린다. 열차 안에서 옥수수 한 개 20루피, 커피 한 잔에 30루피를 주고 사서 먹는데 옥수수는 푸석푸석하여 아무 맛도 없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한데 외국인들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모양으로, 보는 사람들마다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며 아이나 어른이나 말을 건다.
<그네들과의 대화 패턴>
★ 어느 나라에서 왔냐? 중국? 일본? ☆ 한국에서 왔다.
★ 북한이냐 남한이냐? ☆ 남한이다.
★ 무슨 일 하냐? ☆ 교원으로 퇴직하고 여행 중이다.
★ 대학이냐? 영어선생 했냐? ☆ 초등학교 교원이었다. <약간 실망한 모습>
★ 며칠 됐냐? 어디어디 관광했냐? ☆ ○일 됐다. ○○ 봤다.
★ 스리랑카의 인상이 어떠냐? ☆ 무척 마음에 좋다.
보통은 이 정도로 끝나는데 조금 글줄깨나 읽은 사람을 만나면 골치가 아프다.
★ 연금은 얼마나 받나? ☆ 월 3천 불 정도다. <매우 놀람>
★ 너는 부자구나? ☆ 아니다 중류쯤으로 생각한다.
일본과 비슷하다고들 한다.<매우 놀람>
★ 한국의 교육제도는 어떤가? ☆ 이러이러하다.<애고 귀찮아라...>
★ 남북통일은 가능한가? ☆ 잘 모르겠다. 원하지 않고 현 상태를 원하는 사람도 많다.
★ 왜 통일되는 것이 좋지 않은가? ☆ 통일 비용이 만만찮을 것이다. ... 등
암튼, 골치가 아프다. 나는 통일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하면 더욱 놀라며 왜 관심이 없냐고 또 따진다.
인도에서도 대충 비슷했는데 경제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남의 나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편하게 여행하고 싶은데.....
7시간 30분 만에 콜롬보에 도착했는데 여행사를 통하여 비행기 표를 알아본 결과, 다음날 콜롬보에서 인도 남동부 대도시 첸나이까지 가장 저렴한 항공사(King Fisher/물총새) 티켓으로 항공료가 미화 116달러였다.
♦ 여행 에피소드
<광견병(狂犬病) 공포>
스리랑카에서의 사흘째, 중부 고대도시 캔디에서 있었던 일.....
불치사 건너편 캔디호수 옆, 산비탈의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창밖을 내다보니 조금 아래쪽에 아담한 사원(절)이 보이는데 마당 한편에 있는 다고바(Dagoba:불탑)가 제법 크고 웅장해 보인다. 다고바를 자세히 보고 카메라에 담을 요량으로 내려가서 절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쩍 마른 개 한 마리가 컹컹거리며 나를 맞는다.
무시하고 불탑 쪽으로 다가가는데 개가 내달으며 이를 드러내기에 뒷걸음으로 쫓는 시늉을 하다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서서 가는데 느닷없이 뒤에서 달려들어 내 종아리를 콱 물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소리를 꽥 질렀더니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자가 방에 앉은 채 무심한 얼굴로 내다보고만 있다.
탑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고 도로 쫓겨나오며 종아리를 살펴봤더니 잇자국이 선명하고 피가 흐른다.
그래도 방안의 여자는 일어설 생각도 않고 태평이다.
호텔로 돌아와 물로 대충 씻어 내는데 종업원이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광견병 예방 주사를 맞아 두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한다. 광견병은 일명 공수병(恐水病)이라고도 하는데 병균이 몸에 퍼지면 물이 무서워진다던가....
그리고 치사율이 높은 무서운 병.... 스리랑카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개에게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혔을 리는 없을 터, 걱정되기는 하는데 병원을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고 또 치료비가 얼마나 들지 걱정도 되고 하여 그냥 포기하고 운에 맡기기로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캔디를 내려다봤더니 무서운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아름답게만 보여 안심하였다. 공수병(恐水病)에 안걸린 것이 틀림없겠지?? (^^) 그리고 걷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제기럴... 나쁜 犬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