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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이근호목사와 더불어 15년동안 지근에서 함께 생활해 왔던 P목사님이 권정희님을 통해서 보내온 "이근호 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라는 글입니다. 2000년도에 쓴 글입니다. 귀한 옥고를 보내 주신 P목사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양무리마을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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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의 신학을 반성하며
이 글은 “구원에 있어서 시간의 연관성의 문제”라는 글을 읽으면서 적게 되었다. 어떤 의도에서인지 모르지만 그에게 배우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의 신학에 대한 질의를 해 달라는 강한 요구가 있어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에서 지금까지 의아하게 생각해 오던 바가 위의 글에서 집약되어 나타나 있기에 요구를 받고는 글로 써서 대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과 대화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의 철학적인 지식에 본인은 따라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본인은 반드시 철학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계시가 아니며 또 철학으로 믿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여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 속에 들어 있는 죄를 일일이 밝혀서 오늘 우리 인간들의 죄인 됨을 밝혀내면 오늘 신자들이 죄인됨을 수긍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이 통째로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일이 그 죄인됨을 분석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은 죄를 분석하기 위하여 반드시 철학을 분석하고 연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본인의 지적인 면을 생각해 볼 때 그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철학에 담겨 있는 논리를 알면 인간의 논리를 대적할 수 있겠지만 본인은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계시만으로 족하지 굳이 인간의 논리를 알고 반박하는 것이 신앙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은 계시만으로 족하다. 여력이 있다면 보조적인 측면에서 접해 볼 대상이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성경을 다 알고 여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신자 속에서도 어떤 모습이 죄며 또 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력이 있어서 철학과 다른 주변 학문을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공부하여 주를 위하여 유익하게 쓰여지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죄성을 반드시 지적해 줌으로 주를 바라보게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철학의 도식으로 성경을 접근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1. 이목사가 위 글을 쓴 의도를 큰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목사가 철학 및 물리학자들의 시간론을 먼저 논한 것은 오랫동안 철칙으로 여겨져 오던 기계론적인 절대적 시간관이 특수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깨어져버렸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된다.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준하여 진리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문학에서만은 여전히 기계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인간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적인 요소인 허구를 사용하여 인간은 구원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구원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신학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내어버린 기계론적인 시간을 신학에서 도입하여 신학적인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결과로 나타난 신학 이론이 “이미”와 “아직”이라는 도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구속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목사가 보기에 이 도식은 주님 중심의 구원을 역사중심의 구원 즉 시간에 예속된 구원으로 변질시켜버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지만 주님은 하늘에서 와서 역사를 심판하러 나타난 분이기 때문에 그는 시간에 매이지 않는 분인데 구속사는 이러한 주님을 시간에 예속된 분으로 만들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구속사는 시간적인 틀을 가지고 하늘의 계시를 담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목사는 주님 중심의 구원을 제시하고자 이 글을 쓴 것으로 이해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도식을 초월하는 주님을 중심해서 구원을 말해야 하겠다는 ‘충정’에서 이 글을 쓴 것 같다.
본인도 구속사의 잘 못을 인정한다. 구속사라고 할 때 주님의 초월성을 시간의 도식에 예속시켜버리는 위험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쿨만이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 중심으로 옮기려는 의도로 그러한 도식을 만들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에 의해 제시된 도식은 충분히 그럴 위험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을 오도하게 할 위험이 있다.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시각은 시간을 초월해버린다고 할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의 시각은 사건중첩적이다. 앞의 사건이 뒤에 올 사건을 내포하면서 예시하고 있고 뒤에 올 사건이 앞의 사건을 받아서 하나의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시간을 개입시켜 말하려는 의도는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언제 그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를 밝히지는 않는다. 종이 한 장에 그림을 그리듯이 함께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말은 한 날이요 그 날의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들로 그리고 있다. 이런 시각은 신약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신약에 있을 사건들을 한 날의 사건들로서 말씀하셨다(마24장). 그래서 재림에 대한 날짜까지도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던 가보다. 이렇기 때문에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시간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확실성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기 때문에 기다림이 있고,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재림과 부활의 때를 바라보고 있으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항상 현재의 사건으로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 중심은 아니라도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중에도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성취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고 또 완성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거룩한 세계를 이루시고 또 통치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렸다. 이런 기다림은 미래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시간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시간상의 순서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상의 순서를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완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님을 통하여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로 인하여서 완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완성이 될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8:23-24)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목사는 이것을 너무나 무시하고 있다. 성경이 종속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있는 시간을 억지로 배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성이 신자의 현재의 완성이 된 것처럼, 사람의 죄의 몸이 실제로 죽고 부활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억지로 논리에 맞추려는 극단적인 주장이다.
이렇기 때문에 그의 논지에는 불신자가 아니면 실제로 완전한 영을 가진 사람밖에 없다. 몸의 부활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죽을 몸 때문에 긴장하며 씨름하는 신자는 없다. 그에게는 씨름하는 자는 주님의 완성의 영을 받지 못한 자이다. 완전한 영을 받지 못했으니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잡으려고 씨름하고 있는 자다. 자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목사에게는 죽을 몸 안에 있는 성도의 긴장이 없다. 때문에 “사랑하라, 사모하라, 기도하라, 섬기라, 성령을 추구하라, 죄와 싸우라” 등의 권면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핍박은 있어도 고통을 느끼는 성도의 아픔은 없다. 그가 말하는 성도는 핍박이 있어도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핍박은 있어도 고난은 없다. 고난이란 당하는 자가 고통스러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탄식도 없다. 자기의 죄성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탄식하는 자는 아직도 그가 의미하는 신자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이목사가 구속사를 말하는 사람 즉 자기가 보기에 논리적인 미숙을 가진 사람이나 세상에서 허덕이는 신자를 불신자와 같은 맥락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목사가 보기에는 시간의 개입을 인정하고 아직을 이야기하고 있는 자는 아직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다. 즉 예수의 완성을 받지 못하고 인간의 결단과 구원 의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보이는 것이다. 예수의 완성에 참여하고 있다면 아직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인데, 아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구원의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밖에 분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목사는 논리적인 우상숭배자다. 자기 논리를 절대화시키고 신격화시키고 있다. 자기 논리에 맞지 않는 자는 다 정죄하는 논리 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하나님도 자기의 논리 속에 있어야 올바로 일하시는 하나님처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과 문학의 “허구를 믿는 것”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성령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만약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성령이 임하여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와 문학의 허구를 믿는 자를 함부로 동일시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목사는 이러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외형적인 체계가 비슷하다고 해서 신앙과 불신앙을 동일 범주에서 논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세례와 이방인의 세례나 불교의 수계를 논리 형식의 유사성 때문에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신자의 죄성 위에는 하나님의 의가 덮혀져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목사는 계속해서 씨름하는 자나 약한 자 또는 구속사를 말하는 자는 불완전하다고 해서 불신자의 범주에서 취급하고 있다. 인간 속의 특징이 육을 발판으로 삼는데 여기서 나온 신학도 결국 육의 자기 해석이라고 하면서 그 신학으로 구원 불가하다고 한다. 그런 신학은 계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만 보면 맞는 말이지만 이목사의 논지에서 보면 완전하지 못한 자는 불신자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신학에 국한 시켜 볼 때 이목사에게 논리적인 완전함은 곧 예수의 완전을 받은 것이요 그런 자는 구원적 타당성을 가진 자다. 반면 논리적으로 불완전한 자는 구원에도 타당하지 않다. 신앙에 있었어도 자신의 죄의 몸 때문에 신음하는 자는 주님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목사는 일종의 완전주의자처럼 보인다. 무서운 말이지만 이 목사의 논리는 곧 구원의 길이다.
3. 이목사는 주님의 완성과 교회의 완성을 동시화하고 있다. 교회는 완성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개입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시간의 개입이 없을 때 주님의 완성은 곧 교회의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인정해야 한다면 교회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에 완전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주님께서 미래에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교회의 완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완전을 말할 때 주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현재의 교회가 완전하다고 할 때는 혼돈을 불러일으킨 소지가 크다. 주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교회가 완전하게 될 것은 미래에 있을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지 때문에 이목사의 논지는 역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제거하려고 하므로 주님이 일하시는 역사 속의 교회를 논리적으로 주님에게서 떼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이상 역사를 벗어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타나지 않는 교회도 없다. 하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서 사건의 선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선후가 있기 때문에 시간의 선후가 있게 된다. 이 두 사건을 연결하면 시간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사건들을 서로 연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즉 선후 사건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사건들을 굳이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 저기서 산발적으로 우연히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선후가 항상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건들은 연속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시간이 등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을 생각할 때 이 자연스런 일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안에 있는 교회 역시 시간을 따라서 주께서 이루어가고 계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요 창조하시므로 시간을 있게 하신 분이지만 그렇다고 그 분이 역사를 무시하고 시간을 무시해버리시는 분은 아니다. 오히려 그 분은 역사를 인정하고 있다. 왜냐 하면 성경이 역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기 의지 속에서 선후 사건들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현재가 있고 미래를 바라봄이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역사 속에 있는 교회에 주시는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그의 논리 속에서도 살아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목사는 시간을 제거시키려고 하므로 역사 속에 있는 교회에 주시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그의 논리 속에서 제거시키고 있다.
이목사가 말하는 언약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언약은 예수밖에 없는 언약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이기는 하지만 이 대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것은 언약 속에 말해지고 있는 내용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언약이다. 이 언약 속에는 한 씨로 인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백성을 예고하고 있다. 이 백성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백성이다. 따라서 시간을 자연스레 인정하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교회도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주님에 대한 말씀은 교회에 대한 말씀이 된다. 이렇게 하면 신구약의 모든 말씀이 주님에 대한 말씀이자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목사는 이렇게 당연한 것을 마치 언약이 예수로만 끝나는 것인 양 강조하면서 교회를 말하는 자를 예수만을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람 곧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인양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를 말한다고 해서 예수의 이루심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완성을 거부하는 것 또한 아니다. 역사 속에 있는 몸된 교회를 말하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4. 이목사가 신자를 보는 시각이 성경이 신자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목사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한다(요3:6).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인간과 예수를 아는 인간을 대비시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육이 예수를 알므로 영의 사람이 된다. 이것을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했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이신 주님을 덧입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도라고 했고 의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목사에게는 성도가 예수 안에 있는 의인이 아니다. 여전히 죄인이요 심지어 마귀다. 변화되지 않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마귀다. 그에게 신자는 죽기까지 죄인이다. 죄인의 본성에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즉 성령이 그 속에 침투하여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죄인이다. 이목사는 신자를 이렇게 본다. 이목사는 죄인의 본성이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죄성이 변화되지 않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이다. 그래서 신자가 하는 기도도 구제도 선행도 모두가 죄이다. 이런 시각을 일반화시킨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를 동일한 죄인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자는 죽을 몸 속에서 사는 자일지언정 불신자와 동일한 죄인은 아니다. 신자의 죄성이 여전히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성 위에 주님의 의가 덮여져 있으며, 더구나 성령이 새 마음을 주셨고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살게 하셨기 때문에 그는 불신자 때와는 다른 인간이다. 죄성이 있을지라도 또한 성령의 새 사람이 사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사는 것이 있다. 이 사람을 성령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 밖에 있는 자와 동일시 할 수 없는 자이다. 신자는 주의 의를 입고 있고 주의 생명을 받아 새로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를 불신자와 같은 범주에 놓고 죄인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주님을 알게 된 것만큼 큰 변화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그야말로 질적인 변화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어둠 속에 새로운 빛이 들어와서 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이것을 성령이 거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성령에 의해서 사는 것을 죄라고 하지 않고 선한 행실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자의 삶 곧 생명 현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만을 새 삶인 줄 알고 추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목사의 논리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인이라는 전제 때문에 다시 죄인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전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돌아감으로 성령으로 사는 생명을 부정해버린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행하게 하시는 것을 죄인이라는 전제로 인해서 부정해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 속에서 일할 수 없는 분으로 만들어버린다. 마치 하나님은 허공에 대고 일하는 분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거하시지 못하는 것으로 만든다. 일종의 변증법적인 논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끊임없이 이 논리 속에서 맴돌고 있다. 본인이 보기에는 이것은 철학적인 도식에서 온 것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이런 논리가 이목사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하고 주님의 중심을 그렇게 철저하게 말하다가도 신자에게 와서는 신자를 주님 중심으로 보지 않고 죄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 있는 자면 주님의 신분이 신자의 신분인데 이것을 거부하고 주님이 주신 신분이 아닌 죄인에 초점을 맞춘다. 죄인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에는 주님이 주신 의로운 신분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신자는 한 낱 죄인일 뿐이다. 그리고 죄인임을 알자 다시 주님을 바라본다. 그래서 주님의 피를 덧입는다. 그래서 그의 논리는 “죄인은 안된다”, “하나님은 하신다”이다. “죄인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신다꽩 논리가 성립되기 힘든다는 것을 이목사는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Not A(죄인) but B(하나님)”을 줄기차게 주장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주님이 신자 속에 내주하시는 내주개념은 없고 접촉개념 내지는 반복개념만 있는 것 같다. 신자 속에서 사시면서 일하시는 주님이라기 보다는 심판과 용서를 반복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반복의 계속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내주개념을 가진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의 개념은 접촉을 반복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반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의 논리상 모순이거나 곤경 회피용으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항상 신자를 불신자와 동일한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Not A but B"는 신자에게는 “A in B”는 물론 “B on and in A”로 바꾸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발생론적인 교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주께서 교회를 발생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제의 교회가 오늘의 교회가 아니라 말씀을 듣는 그 순간 교회가 되며 신자가 된다는 것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과 마귀로 있다가 말씀을 듣는 그 순간 교회가 되며 신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죄인이라는 실존에 초점이 있지 구원하신 주님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죄인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신자는 복음을 받는 순간 통째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자이지 순간순간 일깨우기 때문에 새삼 죄인 됨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일깨워서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반복에 의해서 신앙이 유지된다는 것이지 주님의 내주가 전혀 아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지 않는 동안은 인간은 죄인일뿐이다.
이것은 분명히 실존주의적인 도식을 가지고 성경을 도식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주님의 내주가 없다. 주님의 말씀이 없는 동안은 신자는 악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아니요 신자도 아니다.
5. 그렇다면 이런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자로 하나님은 만드실까? 모든 것을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지만 이목사의 논지를 따르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하실까? 왜냐하면 죄인을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면 가능하게 하는 형태가 있을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죄성을 죽이고 재창조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이목사가 인정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죄인을 죽이고 재창조하는 것은 재림 때의 사건이므로 필연적으로 시간이 도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도입되면 시간이 도입되는 현재는 이목사가 말하는 신자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하고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로 판별되어 계시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의 완성된 영을 받았으니 신자는 곧 예수와 같다고 추론할 수 있다. 시간이 제외되기 때문에 이런 추론이 가능할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신자는 예수만 즐거워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곧 예수의 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수의 영과 신자의 자아 구분이 궁극적으로 없다. 구분한다면 신자는 양적으로 예수의 영을 나누어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아버지를 기뻐하신 것처럼 신자도 하나님과 예수를 기뻐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 연약과 죄악으로 인해 교훈하고 권면하며 애타하던 서신서들의 많은 가르침이 없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 가르침의 많은 면은 이런 것 때문에 애쓰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에 대하여 일일이 다 열거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한다면 성경을 통째로 인용해야 할 판이니까!
주님께 엎드려 성경을 듣는 자는 그런 가르침으로 가득 찬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목사의 탁월함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성경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탁월성과 주님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탁월한 자의 논리를 따르다가는 주님을 짓밟게 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셋째, 변하지 않는 죄성을 가진 죄인을 성령은 심판하고 버리시면서 또 다시 선택하여 붙드시는 일을 반복하심으로써 하신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전기가 점멸을 반복하면서 빛을 내듯이 말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만 즐거워하도록 하는 자로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성령이 전기와 같이 점멸하면서 죄인을 끌고 가는 포대기나 그물을 만들어 끌고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속 빈 강정이요, 훼칠한 무덤이다. 속은 죄성으로 죽었는데 성령의 능력으로 겉만 붙들어서 즐거워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은 죄로 죽은 자인데 성령은 겉에서 그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로 만든다. 믿는 자기 인격이 없는 마네킹이다. 예수의 영은 신자를 겉에서만 붙들고 씨름하다가 죽인 후 재창조하여 비로소 예수의 영으로 그를 채울 것이다. 결국 신자는 자기 인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이 살다가 예수의 영으로 대체되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 때 신자의 몸은 예수의 영의 집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의 영은 일한다. 만약 이런 추론이 이목사에게 합당하다면 이호식이나 노먼 그럽과 다를 바 없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일종의 신비주의 경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육에서 믿고 난 후에 존재의 변화가 없는가? 예수를 모르던 인간이 예수를 알게 되어 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된 것만큼 큰 변화가 어디 있는가?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인가? 이것을 새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새 사람은 옛 사람의 종결이 아니다. 육의 연속이 아니다. 이 새 사람으로서 사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사람이다. 하늘의 영이 들어와서 새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죄인이라는 존재에 폭탄이 터지듯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을 부활생명으로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요5: ,롬6: ). 그리고 이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내주하는 성령을 따라서 새 사람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새로운 자기로 알고 추구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새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힘쓰고 추구하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의 새 생명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의 몸을 미워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도 명령법도 아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사랑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율법이니 명령이니 하고 획일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6. 이목사의 독단적인 논리 때문에 많은 성경구절들이 억지로 곡해되고 있다. 그가 열거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본인은 이목사를 알면서 깨닫고 배운 것이 많다. 그리고 이목사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본인이 이목사에게 특별히 해 준 것은 없지만 마음으로는 내가 그를 대신하여 죽는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하게 생각하였다. 예수님만을 높히는 것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세월이 이목사의 말처럼 15년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제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신자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목사의 가르침에서 이런 문제를 함께 느끼고 질문을 해 올 때는 그를 변호해 왔었다. 그럴 때마다 본인은 한국 교회가 너무나 잘 못 되어 있으니 그것을 안타까와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는 왜 이목사가 동일한 반복만을 계속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어쩌면 그것이 그의 신학적인 전제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글을 접하면서 나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역시 이목사는 성경보다는 철학적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본인의 이러한 우려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사실이더라도 바로 서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이목사는 계시를 전하는 선지자라기 보다 인간의 철학사상을 성경으로 각색시켜서 전하는 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15년 동안의 사랑하는 친구를 이렇게 공박해야 하는 마음이 참으로 괴롭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본인은 사람을 사귀는 재주도 없거니와 또 사귀려고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 중에 첫 번째 친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정리보다는 진리가 앞서야 하며, 또 문제가 작은 문제가 아니라 아주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게 된다. 인간을 비방함이 아닌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는 마음에서 이런 글로써 반성해 본다.
참으로 마음이 답답하다. 이런 지적을 받고 그가 또 어떤 논리로 자기 논리를 변호할지, 아니면 자기의 신학적인 기초에 대하여 반성해 볼 지를 아직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다. 하지만 본인이 이상에서 지적한 것은 그가 어떤 변명과 변호를 하는 한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다. 본인이 분석한대로 이목사가 철학적인 도식 즉 신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으로 보지 않고 죄인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기 반성과 돌이킴이 없는 한 그의 신학과 설교와 가르침은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견해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친구로서의 그에 대하여 장송곡을 부를 것이다.
2000년 8월 22일
P.K.H

첫댓글 십자가마을은 (현재의 삶이 없는 이미 천국에 있는) 마을입니다.인간이 예수 믿는 순간 벌써 천국에 있다는 논리입니다.그래서 현실에서 씨름하는 다른 성도들을 그런 시각의 기준으로 정죄하고 저주하나봅니다. 그 원인이 시간의 제거에 있다는 파악이 아주 설득력 있습니다.
정말 이 글을 읽고, 다시 한 번 저의 생각, 곧, 이근호목사의 십자가신학은 불교의 유식철학의 기독교적 변형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체험을 일종의 "니르바나"의 체험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 합니다. 십자가를 논해도, 결국은 불교적 논리구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셈이지요. 현대의 신과학운
동을 관찰해 보면, 기독교복음을 그들의 소위 "과학적 발견"으로 비판하면서, 심정적으로는 "동양철학" 특별히 "불교철학"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왜 이근호목사의 신학이 상대성이론의 세계관적 관점에서 기존신학의 틀을 부수려고 하는 지 이해됩니다. 기존신학을 뉴톤적 패러다임에 매여있다고 하는 그 진단 자체
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근호 목사의 신학은 묵시적인 면만 보았지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역사성에 대해서는 무시합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묵시적으로만 접근을 합니다. 신학적으로 완벽한것 같은데 정작 자신의 삶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 삶의 현장이 없으니까 항상 죄인 타령만 하네요.
P목사님께서 이 목사님 신학의 한계를 정확하게 보신것 같네요.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은 반드시 있답니다. 약속을 받았지만 이스마엘을 낳는 아브람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낳기까지 과정이 있듯이 말입니다. 우리 역시 그런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지요. 평면적인 신학이 아니라 입체적인 삶이지요.
아르케님 좋은 지적이시네요.묵시(하나님의 사랑), 역사(묵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확대 시키면 응답없는 사랑만 있는 셈이지요. 그럴 경우 성경의 등장인간은 하나님이 쓴 픽션의 소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지요.성경은 픽션이 아니고 넌픽션인 것 같은데요.
이 글은 "달구벌기독학술연구회"(회장 이광호 목사) 에서 발간하는 학술논문집 "진리와 학문의 세계" 2000년 가을호 (통권 3호)에 실려 있습니다.
....... -¿-. 어려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최근엔 철학적 구조론에 성경말씀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것 저것 여러사람의 철학과 신학에서 짜집기해서 자신의 것이라고 내어놓는데 결국은 이근호 목사 자신의 존재 증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네요, 복음은 사람에게 소유될 수 없지요. 복음의 삶이 없으니 철학으로 신상품을 론칭하려고 애쓰는 모습만 보입니다. 공교하게 지어낸 말에 가두어져있는 추종자들이 안타깝습니다.
이근호 신학에 매인 사람들이 공허함과 공포에 사로잡혀 늘 그들만의 차별화된 새로운 브랜드를 찾아 헤메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라는 차별화된 브랜드를 통해서 자신들의 끊없는 공허와 욕구분출을 정당화시키는 모습을 봅니다. 막사는 죄인됨에 매여 주님의 피의 공로마저 똥으로 돌리는 저들은 성령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내야만 하는 성도를 자신원수로 여기며 살다가 주님마저 원수취급을 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가슴이 아픈 현상입니다.
인간의 철저한 타락과 저주받은 현실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근호씨의 강의와 설교는 성령안에서 성도와 예수님의 사랑관계로 말미암는 열매들을 부인하거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도 미혹받은 자들을 떠나 예수님만을 따라가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