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년~1943년)
묘관음사에 있는 행화비, 비문의 내용으로 이 분을 알 수 있다.
“운봉은 1889년 12월 7일 경상북도 안동 후남동 정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일하 화상(一荷和尙)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5세 되던 해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때 법명이 성수(性粹)이다.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으로 불문에 든 운봉은 강백(講伯) 회응(晦應)의 문하에서 교법을 배우고, 23세 되던 해 범어사 만하 화상(萬下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25세에 상주 원적사의 석교 율사(石橋律師)로부터 계율을 배웠다. 금강산·오대산·묘향산 등의 거찰에서 정진하였다. 3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한 편의 게송을 읊었다.
문 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레 차가운 기운이 뼈 속에 사무치자/ 가슴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자취가 없네. 서릿발 날리는 달 밝은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다음/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다 공하도다.
운봉은 부산 선암사의 승려 혜월을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로써 임제종[조계종]의 법등(法燈)이 운봉에게 계승된 것이다. 이후 운봉은 통도사·범어사 등에서 조실을 맡아 후학을 가르쳤다. 계미년[1943] 월내포 묘관음사로 옮겼다. 병색이 깊어지자 제자 향곡에게 자신이 입적할 날을 미리 알리고 후사를 부촉(咐囑)하였다. 2월 그믐날 입적게(入寂偈)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운봉의 나이 58세, 법랍 45세였다.”
석가 달마퇴삼천(釋迦達磨退三千) 후학 성철(性徹) 삼가 쓰다.
법자질(法資秩) 회암 조심(晦岩祖心), 향곡 혜림(香谷蕙林), 구옹 지우(瞿翁智宇), 구암 고현(龜岩古玄), 우하 도원(雨下道源), 진해 각현(震海覺玄), 낙산 병율(落山炳律)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 가지고 옴
향곡 혜림(香谷蕙林, 1912년~1978년)
묘관음사에 있는 행화비, 비문의 내용으로 이 분을 알 수 있다.
“향곡은 1912년 1월 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아버지 김원묵(金元黙)과 어머니 김적정행(金寂精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탁(震鐸)이며, 16세에 둘째 형을 따라 천성산 내원사에서 입산하였다. 18세에 조성월(趙性月)을 은사로 모시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1930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 선사(雲峰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944년 임제 정맥의 적전(嫡傳)이 되었고, 향곡(香谷)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에 크게 깨우치고 아래의 오도송을 읊었다.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모두가 무슨 물건이었더냐/ 이를 좇아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 구비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후 묘관음사를 중건하고 선방을 열자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묘관음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1978년 12월 15일 해운정사에서 열반게를 짓고, 12월 18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50세였다.”
*부산역사문화대전에서 가지고 옴
16세 때 둘째형을 따라 천성산 내원사(內院寺)로 입산. 1929년 성월선사(性月禪師)를 은사로 삼아 득도.
1931년 범어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 내원사 조실(祖室)이던 운봉선사(雲峰禪師)를 10년 간 시봉.
운봉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음. 법맥이 경허(鏡虛)-혜월(慧月)-운봉-향곡으로 이어짐.
“서쪽에서 온 불법, 흔적 없는 참 진리는 전할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나니, 받고 전할 것 없는 이치를 떠나버리면 해와 달은 같이 가지를 않는 것이니라(西來無文印 無傳亦無受 若離無傳受 烏兎不同行).”
1947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수행할 때,
한 도반이 “‘죽은 사람을 죽여 다하면, 지금 바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 다하면, 지금 바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듣고 바로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가 21일 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홀연히 자기의 양쪽 손을 발견하자마자, 활연대오(豁然大悟)하고 오도송을 지었다.
“홀연히 두 손을 보고 전체가 드러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헛꽃일세, 천경과 만론들은 이 무슨 물건인가. 이를 좇아 부처와 조사가 목숨을 잃었구나(忽見兩手全體活 三世佛祖眼中花 千經萬話是何物 從此佛祖總喪身).”
묘관음사(妙觀音寺)를 창건, 선원(禪院)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침.
조계산 선암사, 경주 불국사,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 및 선학원장(禪學院長)을 역임하였다.
<스스로에게 하나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어 면전에 출입하고 있다. 부처를 절대자로 생각하지 말 것과 부처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부처 또한 스스로를 얽어매는 쇠사슬에 불과하다.>
1967년 하안거(夏安居) 후 진제선사(眞際禪師)를 법제자로 삼음.
1978년 12월 15일 해운정사(海雲精舍)에서 열반게(涅槃偈)를 지었고, 12월 18일 나이 66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다음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간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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