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이달의 훈화
연중 제15주간 - 연중 제19주간
김영수 헨리코 신부
김영수 헨리코 신부는 1992년 사제서품을 받고 영국에서 영성심리상담, 영적 지도를 전공했다. 전주교구 사목국장과 총대리를 역임하고, 천호성지와 치명자산 성지에서 순교영성현양을 위한 사목활동을 했다. 현재 치명자산 성지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봉사하며 영성심리 강의, 피정동반, 영성상담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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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7월15-21일)
‘행운’과 ‘행복’
길가에 무성하게 피어있는 토끼풀 속에 우연히 발견한 네 잎 토끼풀은 행운의 상징인 것처럼 고이 간직하지만 흔한 세 잎 토끼풀은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세 잎 토끼풀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위에 널려 있는 ‘행복’ 대신 우연한 변종인 ‘행운’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타이르는 듯한 꽃말인 듯합니다.
네 잎 달린 행운을 찾기 위해 지나쳐 버린 세 잎의 토끼풀, 우리는 어디 있을지도 모를 행운을 찾기 위해 내 삶 속에 가득 피어 있는 행복을 지나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삶은 행복이 가득한 풀밭입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곳에 돋아나는 푸른 잎들이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 삶은 행복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져야할 인생의 무게가 삶을 짓누르고, 견뎌 내야할 삶의 애환들 앞에서 고뇌하고, 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가기 위해 애쓰는 삶의 현장에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삶이라는 행복의 동산에서 행복을 찾기보다 길거리에, TV 광고에, 신문과 잡지를 가득채운 ‘대박’이라는 현란한 구호 속에 드리워진 행운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행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세 잎 토끼풀의 꽃말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행복하기는 아주 쉽단다. 가진 걸 사랑하면 돼…….’ 가진 것을 사랑하는 자리에 행복은 피어납니다. 결국 행복은 소리 내어 뽐내지 않을 뿐 늘 우리 곁에 피어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도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이 가득 피어난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며 사랑을 꽃피우는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운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가득 피어 있는 행복이 밟힐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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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7월22-28일)
뻐꾸기 이야기
우리 집에는 오래된 뻐꾸기시계가 하나있습니다. 매시간 창문을 열고 나와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뻐꾸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뻐꾸기는 아주 특이한 탁란의 습성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 새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속임수의 명수입니다. 어미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낳아놓은 알에서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다른 새의 알과 새끼를 바깥으로 떨어뜨리고 둥지를 독차지합니다. 양부모 새들은 일단 뻐꾸기 알이 자신의 둥지에서 부화한 뒤에는 자기 새끼인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뻐꾸기 새끼들을 먹입니다. 알에서 부화한 뻐꾸기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며 양부모 새보다 몇 배나 몸집이 커지는데도 양부모 새는 뻐꾸기 새끼를 먹이느라 뼈가 빠진답니다.
그리고 뻐꾸기가 날아갈 때쯤이면 어미 뻐꾸기는 둥지 주위를 돌며 “뻐꾹, 뻐꾹”하고 울어대며 다 자란 자기 새끼를 데리고 갈 준비를 한답니다. 녹음이 짙어지면 이 산 저 산에서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는 어미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서 다 자란 새끼를 부르는 소리랍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후 아름다운 뻐꾸기 울음소리는 얌체들의 합창소리로 들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는 일이 어렵기로소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열매만 따먹겠다는 얌체 같은 새 같으니…!’
그런데 어느 날 기도를 바치는데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뻐꾸기처럼 살고 있는 저를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린 결과로 얻어지는 결실들보다는 보다 편하고 쉽게 내가 바라는 것들을 차지하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얌체 같은 저의 삶을 꾸짖는 소리였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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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간(7월29일-8월 4일)
인생의 관광객, 신앙의 순례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틀레헴에는 주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 입구에는 순례자들에게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관광객의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오신 분은 순례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이곳에 오신 분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관광은 육신의 만족을 위해 떠나는 여정입니다. 멋진 경치를 구경하고, 재미난 것을 즐기고, 맛난 것으로 배를 채우며 잠시 만족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때뿐이고 되돌아오는 길은 피곤하기만 합니다. 순례는 영혼의 갈망을 향해 떠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을 찾아서 나선 순례의 여정에서 하느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길은 생기가 넘치고 희망이 되살아납니다.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은 그 길에서 사람이 찾아야 할 참된 것을 찾게 되고, 인생이 도달해야 할 참된 행복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관광객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하면 재미날까, 무엇을 하면 나에게 이득이 될까…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지요. 인생을 관광객처럼 살면 사는 보람이 없습니다. 순간의 만족 뒤에는 권태와 우울한 마음이 밀려와 삶은 덧없고, 마음은 점점 허허로워지게 되지요.
인생을 순례자들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내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룩한 지향으로 순간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의 순례자들입니다.
신앙인은 인생의 순례자들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해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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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간(8월6-11일)
교회는 죄인들의 집
얼마 전에 영세한지 1년도 안되어서 신앙생활을 쉬는 교우를 만났습니다. 쉬는 이유를 묻자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성당 나가면 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성당도 마찬가지더군요. 있는 사람들이 잘난 체하고, 신자들은 신부님 수녀님 잘못만 이야기하고, 신자들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헐뜯는 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니구나 싶어서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교회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천사들의 집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죄인들의 집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부족한 죄인들이 모인 곳이니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곳이겠지요.”
이 후에 그 신자의 소식을 들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분이 교회가 천사들의 집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면 교회로 돌아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다른 죄인들을 그만두고 우선 그분 자신이 천사가 되어야 할 테니까요.
교회가 천사들의 모임이라면 서로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없고 만사가 다 완전하게 잘 돌아가는 천국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죄인인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하느님 앞에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모인 죄인들의 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철저히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직을 시작하시면서 예수회 신부님과 나눈 이야기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교황님의 이름),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 하느님께서 눈여겨 보아주시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눈여겨 보아주시는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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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성모승천대축일(8월12-18일)
사랑하올 어머니
마음이 힘들어 막막할 때 호주머니 속에 묵주를 쥐고 부르는 이름, 사랑하올 어머니, 성모 마리아!
사람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쓸쓸하고, 사람 때문에 보아야만 하는 나의 한계를 대면하며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 단순하고도 절박한 기도 안에서 다시 살아낼 힘을 얻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우리의 어머니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여전히 버겁고 힘든 일이지만 여기까지나마 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허약함을 가장 잘 아시는 어머니 앞에 나의 실패와 실망, 의혹의 절규를 쏟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미완인체로 흔들리며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가장 미더운 표지가 되어 주시는 구세주의 모친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올 어머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으니 당신을 통하여 세상의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당신의 기도를 배우며 우리도 당신의 손을 잡고 주님의 길을 따라갑니다.
사랑하올 어머니, 우리의 주님이신 당신의 아드님에게 젖을 먹이고 걸음마를 가르쳐주셨으며 기도와 말씀으로 고이 길러 주셨듯이 우리를 인도하고 길러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많은 세상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며 소명의 길을 가실 때 믿음과 겸손과 순명으로 그분 곁을 끝까지 지켜주셨듯이 이 여정이 끝나는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실 어머니를 만날 날을 그리며 오늘도 나는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