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일>
위선은 비뚤어진 자기애
믿음은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대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중에는 종교적 위선으로 예수님의 질타를 받는 이들이 있었으니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삶에는 위선이 있었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참되게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참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자신을 더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오늘 이 위선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떤 누구도 위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는 없다. 살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 위선이 아니었던가? 문제는 위선에서 빨리 알아차리고 되돌아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 위선이 자신에게 어떤 표징인지 지혜롭게 통찰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위선을 통해서 더욱 용기 있는 삶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비열하고 저열한 삶으로 굴절되는 사람이다.
위선은 일종의 거짓된 행동인데, 이는 거짓말과 같은 방어기제다. 궁색한 처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술책이기도 하고, 허세와 허영의 일종으로 빈약하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꽤 그럴싸한 모습인 양 꾸미기 위한 술책이다. 위선은 충만하지 못한 자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러면 왜 이들은 충만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사람의 내적 충만은 흉내를 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척한다고, 영성이 깊은 척한다고,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는 척한다고 영적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깨달아야 하고, 말씀을 통하여 건네오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하고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알아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무엇이고 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을 통해 우리의 내면은 충족되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 5-7)
진정한 사람은 참된 진리를 찾아 혹독한 여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열의는 식지 않는다. 거리에서 장터에서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작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에게나 스승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누구에게든 스승이라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 어떤 누구에게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섬긴다. 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세상으로부터 박해와 탄압을 받는다.
세상의 스승과 달리 우리의 스승은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가르치신다. 누가 이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까? 아무나 이 가르침대로 살 수 없고, 흉내 낸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어설프게 흉내 냈다가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참된 진리에 두며 살아가는 사람,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하느님의 뜻에 두며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진리와 참됨에서 기쁨을 누리고 보람과 환희를 느끼는 사람에게만 내적 충만이 가능한 법이다. 거짓으로 충만할 수 없는 법, 참됨과 진리만이 우리를 충만케 할 것임을 모두 잘 아는 바가 아닌가? 그러니 세상의 누구를 ‘스승님’이라 부를까? 세상의 누구를 ‘아버지’라 부를까?
인간의 위선은 비뚤어진 무의식적 자기애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일이 아닌가? 아픈 병자는 누구나 쉽게 알아차리고 연민을 느끼지만, 위선자는 연민보다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되니 한층 더 안타까운 일이다. 믿음은 진정 하느님의 초대임이 틀림없다.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진리, 우리 영혼이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하느님의 초대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