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증거인멸
신성한 매실 758
그때 여자가 나섰다.
“잠시만요. 이분들은 우리 지역 경찰서에서 나온 분들입니다. 여러분께 몇 가지 조사할 게 있다고 하니 협조해주길 바랍니다. ”
권 팀장은 몽타주 대조를 멈추고 청년들에게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곤 여자에게 대략 30여 분의 시간을 청년들과만 있겠다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 말은 수사에 방해되니 여자는 빠져달라는 소리였다.
그러자 여자는 흔쾌히 승낙하고 수행원과 함께 강당을 나갔다.
권 팀장은 청년들과 면담 전에 박수무당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때? 여기에 범인들처럼 보이는 자가 있나?”
권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
속으로 제발 청년 중에 범인이 있었으면, 하는 애타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박수무당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확실해? 그래도 한 번 더 자세히 봐봐. 당신이 잘 못 볼 수도 있잖아.”
“아무리 봐도 제가 본 그자들은 여기에는 없습니다.”
박수무당의 대답에 권 팀장은 힘이 쭉 빠졌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이 청년들을 면담할 필요가 없었다.
권 팀장은 김유리를 시켜 나머지 청년들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곤 박수무당을 데리고 강당을 나왔다.
밖엔 아직도 많은 양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권 팀장은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그의 옆에서 박수무당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당신, 설마 내게 거짓말한 건 아니지? 분명히 이 마을 사람들이 솔봉에 사람의 시신을 묻었고, 그 시신을 묻은 자 즉 범인이 이 마을로 들어간 건 확실하지?”
“그럼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런데 아까는 왜 확실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그 여자 앞에 죽은 뭐처럼 찍소리 못하고 있었어? 둘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
권 팀장이 다그치자 박수무당은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건 박수무당이 차마 밝힐 수 없는 자신의 또 다른 범죄행각 때문이었다.
여자와 관련된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해 늦여름 무렵이었다.
점집 바위 안에서 기도하던 박수무당은 피로를 풀 겸 솔봉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솔봉에는 작은 계곡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목욕이나 할까, 하고 찾은 것이다.
그런데 그 계곡에는 여자가 이미 목욕하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음욕이 생겨 목욕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옷을 들고 기다렸다.
이윽고 여자가 옷 있는 곳으로 올 때 그는 여자를 덮쳤다.
그런데 웬걸, 그는 순식간에 여자의 발차기에 뒤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여자가 예사 사람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 그는 그날, 몇 시간 동안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빈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요한 공동체 마을 사무국장 민서라였다.
“그, 그저 지리산에 왔다 갔다, 하며 얼, 얼굴 정도 아는 사이일 뿐입니다.”
권 팀장은 박수무당이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것으로 짐작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보다 마을을 수색 중인 조 형사 일행이 어떤 성과가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권 팀장을 즉각 조 형사에게 무전을 날렸다.
“어때? 뭐 좀 발견했어?”
“지금 집마다 수색 중입니다. 그런데 팀장님! 여긴 말 그대로 노인들뿐, 젊은이는 도통 보이지 않습니다. 어떡할까요? 지금 대원들이 춥고 배고프다고 난리입니다.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개소리야! 안돼. 집뿐만 아니라 축사, 창고 등을 다 뒤져서라도 오늘 그놈들을 꼭 잡아야 해. 기다려. 내가 그리 갈 테니.”
조 형사의 말대로 오후가 되자 눈은 더 내리고 날은 몹시 추웠다.
그런데도 권 팀장은 놈들을 꼭 잡고 말겠다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권 팀장은 낭패를 맛보았다.
조 형사와 합류하여 그때부터 두어 시간을 샅샅이 마을을 수색했다.
그런데도 아까 강당에서 봤던 청년 외에 젊은이들을 아예 볼 수가 없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저물 수 있어 늦어도 삼십 분 내에 하산해야만 했다.
권 팀장은 무엇인가 결심하였다.
“모두 하산하도록 해. 단, 나와 여기 박수무당은 여기 남는다. ”
권 팀장의 표정이 워낙 비장하여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남아서 뭘 하시게요? 행여 솔봉에 올라가시려고?”
김유리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권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조 형사는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 그냥 함께 복귀하시고 눈이 완전히 그치면 그때 함께 오시죠? ”
조 형사의 말에도 권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 마을을 찾아온 여자에게 권 팀장은 오늘 하루 이곳에서 묵겠으니 빈방이 있으면 하나만 쓰겠다고 요청했다.
“그러시죠. 방은 많아요.”
이에 할 수 없이 김유리와 조 형사는 의경을 인솔하여 하산했다.
권 팀장과 박수무당은 마을 가운데 허름한 농가로 들어갔다.
마을에서 제공한 밥을 먹은 뒤 권 팀장과 박수무당은 세상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야심한 시각에 솔봉에 오르는 자가 있었다.
그들은 여자의 수행원과 청년들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간단히 아침을 먹은 권 팀장은 박수무당을 재촉하여 마을을 나섰다. 사무실이 있는 본관 쪽을 걸어 나오자 어느새 여자가 나와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 하나와 휴대용 삽 그리고 곡괭이 한 자루가 있었다.
“이건?”
“산에서 먹을 간단한 요깃거리입니다.”
“에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땅을 팔려면 최소한 이것들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여자는 야릇하게 웃었다.
권 팀장은 한편 자신을 배려한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이상한 열패감을 느꼈다.
권 팀장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때 멀리 산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권 팀장은 실눈으로 마을 입구를 쳐다보았다.
“수행원과 어제 본 청년들입니다.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며 운동하죠. ”
여자의 말이 끝나자, 권 팀장은 그녀에게 묵례하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어 마당으로 들어오는 수행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청년들은 말이 없었는데 다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재수 없어!”
박수무당이 입을 삐쭉거렸다.
“누가?”
“아까 그년이나 지금 저놈 둘 다요!”
그의 말에 권 팀장은 웃으면서 그의 허벅지를 발로 찼다.
“그러니까 오늘 솔봉에서 네가 봤다던 사체를 반드시 찾으면 될 것 아니야? 어때 장소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
권 팀장은 이제 노골적으로 박수무당에게 하대하고 있었다.
“그럼요. 기억하다마다요. 오늘 그것만 확인되면 당장 저 연놈들을 연행합시다.”
“시끄러워! 네가 경찰이야? 넌 삽과 곡괭이로 땅만 잘 파면 돼.”
역시 솔봉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가는 내내 눈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눈 쌓인 땅은 발만 디뎌도 푹, 하고 빠질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게 걸어 세 시간 만에 솔봉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박수무당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장소를 찾은 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래? 확실해? 그럼, 시작하자.”
권 팀장 역시 마음이 바빴다.
이곳에 묻힌 게 짐승의 사체가 아닌 사람 사체란 게 확인만 되면 되었다.
그러면 여자의 진술은 거짓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범인은 분명 마을에 있거나 마을에서 숨긴 게 되는 거였다.
둘은 추운 것도 배고픈 것도 잊고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팠다.
그렇게 한참을 팠을까. 과연 하얀 천으로 덮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제발!’
권 팀장은 속으로 제발 이게 사람의 시신이길 바랐다.
그건 박수무당도 마찬가지였다.
“열어봐!”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박수무당이 하나, 둘을 세다 셋, 하며 하얀 천을 벗겼다.
그런데 엉성한 나무로 짠 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돼지 두 마리였다.
헉!
“야! 시신이 몇 구 된다 했지? 얼른 옆에도 파 보자.”
권 팀장은 정신이 나가 미친 듯이 옆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일대의 사체는 모두 짐승들의 사체였다.
권 팀장은 아연실색하여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방향을 바꾸어 미친 듯이 박수무당을 패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내가 너 같은 놈을 믿다니. 야! 이 이놈아. 그냥 죽어버려!”
권 팀장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를 개 패듯이 팼다.
그리곤 차가운 눈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런 권 팀장과 박수무당을 유심히 보는 자들이 있었다.
붉은 수염을 기르고 개량 한복을 입은 자, 그는 전두태였다.
그리고 옆엔 요한 공동체 마을 사무국장, 민서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