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변증전도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Stephan
유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같아 보이는 20가지 사례
신앙적인 삶에서 큰 진보를 보였는데도 그가 다만 유사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
1. 지식의 큰 진보를 보일 수도 있음
2. 큰 은사를 받을 수도 있음
3. 수준 높은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음
4. 죄를 미워하고 대적할 수도 있음
5. 은혜를 사모할 수도 있음
6. 말씀을 두려워할 수도 있음
7. 말씀을 기뻐할 수도 있음
8. 교회의 일원으로 의식에 참여할 수도 있음
9.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도 있음
10.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
11. 종교적인 일에 매우 열심일 수도 있음
12. 기도를 많이, 열심히 할 수도 있음
13. 그리스도로 인해 손해를 입을 수도 있음
14.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음
15. 성령을 받을 수도 있음
16. 믿음을 가질 수도 있음
17.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할 수도 있음
18.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도 있음
19. 성화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
20. 그리스도인의 외적 의무를 다할 수도 있음
그릇된 확신이 무익한 5가지 이유
1. 거짓된 확신으로 행한 모든 것은 수고를 전혀 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무익하다.
2. 하나님께 대하여는 믿음이 없으므로 미움을 받고, 세상에 대하여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므로 미움을 받게 될 터이니 난처한 일이다.
3.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 고난을 견딜 수 없을 터이니 난처한 일이다.
4. 천국의 소망을 간직하였지만 결국 항구를 앞두고 침몰하는 것과 같아 그 소망이 헛되니 난처한 일이다.
5. 자신의 상태를 오해해서 참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은혜가 없으면서도 은혜를 받은 체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모두 살피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니 이는 신성모독이기도 하다.
그릇된 확신에 이르게 된 4가지 이유
1. 양심의 초청
양심은 신의 존재를 시인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양심은 은혜의 수단으로부터 많은 진보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분발된 양심은 사람을 매우 신앙적으로 만들어 복음의 의무를 행하는 데까지 이끌 수 있다. 또한 자연적인 양심은 은혜로 성화되지는 않지만 종종 죄를 괴로워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양심의 작용에 불과하여 구원에 이를 정도로 작용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2. 말씀의 능력
말씀은 모든 이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죄인들의 양심에 작용하여 죄인들을 갱신시키지는 않지만 개혁시키기는 한다. 말씀은 양심으로 하여금 죄를 분별하게 하고, 양심을 제어하며, 죄인들에게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할 수도 있고 신앙을 고백하고 일시적으로 죄악의 길에서 돌아설 수도 있다.
3. 명예심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명성을 얻고 박수갈채를 얻기 위해 신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경우다.
4. 구원의 욕망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 신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구원받기 위해서라면 많은 것을 행할 정도로 구원을 열망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자신이 영원히 보존되기를 바라는 본능에서 나온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독자여, 그대 혹시 유사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늦기 전에 자신을 살피십시오!
독자들이여,
저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 미리 변명하여 작품의 평가 단계를 올리는 것이 관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바램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든지, 또는 자신을 위한 것이든지, 또는 양자 모두를 위한 것이든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곳까지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통은 결점 이상으로 옷을 입혀 세평에 턱없이 좋은 인상을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 기드온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저의 재능은 가장 작습니다.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
그러므로 이 책자가 공중 앞에 출판된 것은 저의 선택의 결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제가 세상에 빚을 지고 있다든지, 또는 어느 정도 터득한 어떤 다른 요인에 바탕을 두어 아마도 수용하기에 더욱 적합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질 것만을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위하여 심어 추수 때에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에서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슬픈 일 중 하나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고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지만 진정 슬픈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저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잠자고 있는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을 깨우는 것과 위선자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약한 신자들이 이것을 읽고 낙심할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은혜를 간직하고도 죄 가운데 떨어져 어디까지 낮아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어렵고, 죄인들은 거기까지 흉내 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위선자가 은혜가 없이도 신앙에 있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기가 어렵고, 신자들은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많이 나아갔더라도 유사 그리스도인에 불과한 사람이 있는 반면, 이보다 좀 부족하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방에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된 신앙 고백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하나의 특성만을 보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전체를 다 읽고 나서 판단하십시오.
왜냐하면 저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기”를 원치 않고, 자녀를 경계하기 위해 개 회초리를 사용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이 책이 주로 ‘경건의 모양’을 꾸미는 데만 바쁘고, ‘경건의 능력’에는 낯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람들의 손에 떨어질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이 책이 이르는 곳마다 각성의 말씀으로, 특별히 이 세대에 충만한 방탕한 신앙고백자들을 깨우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마음은 죄의 소굴이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가끔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적절한 때에 세례를 받고 자신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상태를 안전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육적이며 변화되지 않았고, 그들의 행실은 더럽고 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싼 값에 살 수 있다면 우리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
그렇다면 사도는 어찌하여 다음과 같은 필요없는 명령으로 당혹하게 하였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그러므로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구원받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보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적용하여 좀 짧게 줄여 보았습니다. 다섯 개의 조항으로 기억할 수 있게 했습니다.
첫째, 외적으로 행한 일을 은혜로 생각하여 경건의 모양에 안주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사마리아에서 기근으로 비둘기 똥이 비싼 값에 팔렸던 것같이 생명 없는 형식주의도 이 세상에서 매우 높은 수준까지 도달하여 있습니다.
아, 그러나 경건의 고백은 영원을 바라고 불멸의 영혼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마 7:26). 슬픈 일이 그의 어리석음을 입증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7).
오, 그러므로 믿음으로,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여러분의 기초를 두십시오. 언제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그리스도 안에 안주하십시오.
둘째, 경건의 능력의 탁월함과 그리스도의 생애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십시오.
은혜의 수단이 사랑스럽다면 은혜가 더욱 넘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단의 미덕은 끝까지 그 적절성과 유용성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그 안에 아무런 미덕이 없습니다. 경건의 능력과 그 실행은 영혼에 유용합니다.
거룩한 삶은 유일하게 탁월한 삶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의 삶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삶입니다.
죄인들이 죄를 가리려고 하는 것이 죄의 비열함과 더러움을 입증하고 있는 것같이 많은 사람이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은 경건의 탁월함을 아주 잘 입증하고 있습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신앙의 이유를 매우 멋들어지게 진술합니다. 위선자는 실제로는 최악인데도 겉으로는 최상으로 보입니다.
셋째, 위대한 실제로서 장차 올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왜냐하면 믿지 않는 것은 더 이상 감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마음속에서 피조물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세상을 따라가기 위해 안달하는 주요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사물의 실제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이 가련한 육적인 사람의 선택은 자기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분명히 그의 관심은 파리에 있고 천국은 거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신으로 세상을 선택한다면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오, 깊이 생각하십시오. 영원은 꿈이 아닙니다. 지옥은 음습한 속임수가 아닙니다. 천국은 상상 속의 이상향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려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실제입니다. 비록 영적이어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실제적이며 믿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넷째, 당신의 영혼에 높은 기준을 설정하십시오.
가볍게 얻은 것은 쉽게 떠납니다. 많은 사람이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되이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습니다. 즉 성경적인 의미로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팔고 있습니다.
오, 깊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은 세상에서 가장 귀하며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석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 값을 주고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높은 가치를 두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세 가지 귀중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귀중하신 그리스도
2) 귀중한 약속
3) 귀중한 믿음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귀중한 것은 우리 영혼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귀중한 영혼의 구속주이시므로 귀중합니다. 약속은 귀중하신 그리스도를 귀중한 영혼에게로 안내하므로 귀중합니다. 믿음은 귀중한 약속에서 제시한 대로 귀중하신 그리스도께 응답하도록 하기 때문에 귀중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다른 것보다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육신, 즉 여러분의 육욕은 사랑받고 여러분의 영혼은 무시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체를 감싸며 욕망을 채워주면서 영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개는 먹이면서 자기 아이는 굶기는 것과 같습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
여러분의 영혼의 삶과 구원이 가치가 없다는 듯이 비틀거리며 멸망할 시체에 여러분의 모든 시간과 관심을 기울이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심판 날의 엄격함과 갑작스러움을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심판을 통하여 영원으로 들어갑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재능과 사명에 대하여 회계할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시간에 대하여 회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재산에 대해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우리의 힘에 대하여 어떻게 활용했는지, 정서와 자비심에 대하여 얼마나 향상이 있었는지, 기회와 은혜의 수단을 잘 활용하였는지를 회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뿌리고 장래에 거둘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이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라도 다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것이며, 가장 크게 외쳐 구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최대의 관심과 열정의 대상입니다.
무신론의 정신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고, 그들은 마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찾지 않아도, 정욕을 죽이지 않아도, 자아를 부인하지 않아도, 성경을 믿지 않아도,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천국을 소망하지 않아도, 영혼을 가치있게 여기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을 주시하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육욕보다 더 악한 것에 자신을 내어줍니다. 우리가 최소한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며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라고 하였던 다윗의 심정과 같다면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기에 충분하게 묵상을 한 것입니다.
영혼을 멸망케 하는 병적인 심리를 예방하고 교정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의 손에 들린 이 글의 최소한의 의도는 아닙니다. 이 글의 주요 장점은 부풀어오르는 위선자의 병을 경감시키고 치료하는 데 유용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적당한 순간에 진지하게 숙고하고 조심스럽게 꾸준히 기도하게 함으로써 불경스러움의 염증에 붙이는 고약으로서 섬기는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신기하고 기괴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글을 여러분의 상태를 시험하는 시금석으로 사용하신다면 유용할 것입니다. 당신이 신앙고백에 낯선 사람이든, 신앙고백을 하는 위선자이든 이 글을 읽고 두려워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영혼에 능력으로 임한다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여러분 속에 이루어진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바르고 신실하다면, 이 글을 읽고 기뻐하십시오.
저는 이 글이 편지의 한계를 넘어섰을까 염려합니다. 혀로든, 펜이든지, 말이든지, 가르침에 유용하게 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글을 축복하셔서 여러분에게는 메마른 대지에 비구름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풍성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이슬’을 흠뻑 머금은 양털이 되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벧후 3:18)에서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저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강론의 청중이었던 성 세플커에 있는 회중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할지어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올 여름 여러분 가운데서 나의 재능을 사용하도록 나를 부르신 섭리의 의미는 여러분의 영혼에 미친 설교의 영향력으로 가장 잘 알 수 있고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은혜와 거룩함이 증대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비 가운데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복입니다.
말씀의 결실이 없는 곳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삶과 죽음, 구원과 저주 사이를 오가며 말씀을 듣는 모든 영혼들에게 삶이든, 죽음이든, 구원이든 저주든 맺히게 합니다.
(내게 선택할 능력이 있다면) 현재 평화스러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는 불멸의 영혼들을 또 다른 세계의 영광을 향해 분발시키려는 의도로 행해진 나의 수고가 예수 그리스도의 큰 날에 사망과 저주의 사역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시듯이 이것은 분명하고 강력한 복음 설교의 공통된 결과입니다.
‘성소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지나가는 곳을 모두 치료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금 땅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황무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옥토로 황무지가 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풍성하게 흘러도’ 심판이 진펄과 개펄 위에 선포될 것이며 황무지의 저주가 그들 위에 임할 것입니다.
분명히 복음에는 율법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부과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에 나오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복음 자체로는 가장 위대한 자비이지만 인간들의 정욕의 개입과 불신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마치 가장 맛이 부드럽고 풍성한 포도주가 가장 쏘는 맛을 가진 식초로 변하는 것같이 가장 큰 심판으로 변합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서 멸망하는 세상을 축복하시는 최상의 자비입니다. 그분의 오심과 복음 증거는 저주받고 상실된 아담의 후손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축복에 못지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그분은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진정 ‘함정과 올무’였습니다. 그 날에 신앙만 고백하던 이스라엘의 두 집에게 말입니다.
그분의 복음 사역은 바로 그 날에 많은 신앙 고백자들에게 그들을 깨어지고 넘어지게 하는 거친 돌이 아닙니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16). 그분은 그분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하여 대다수의 사람이 실족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다.
천국문 앞에서 지옥으로 떨어지지 마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이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 예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시고 복음을 전파하심으로써 값없이 주신 생명과 은혜를 거부하는 부패한 마음을 관통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삼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영접하였으면 영원한 구원이 보장될 것이었지만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 저주만 키웠습니다.
오, 우리가 복음 아래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의 성향과 정서로 은혜의 계절을 누려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것을 비중 있게 깊이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천국에 더 가깝든지, 지옥에 더 가깝든지, 구원에 더 가깝든지, 저주에 더 가깝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종교적 의무들을 무시함으로써 누리는 특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가버나움의 경우를 생각하고 두려워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지옥문에서 천국으로 간 것처럼 더 많은 사람들이 천국문에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의 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복음 설교로 인해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 중 아주 소수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까봐 두렵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결실할 것을 힘써 간청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소중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도 자신의 일에 스스로를 증인으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감정은 양심을 가리고 자기 사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큰 협잡꾼이요 사기꾼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여러분 중 얼마의 사기꾼은 이 강론으로 정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 강론은 여러분에게 은혜에도 모조품이 있으며, 참된 회심이 아닌데도 거창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 강론의 의도는 ‘상한 갈대를 꺾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신자들을 낙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고백자들을 깨우는 것입니다. 비록 위선자의 위험한 상태와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어렵고,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선자로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슬프게 하시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을 때에 성실하게 설교하였던 것처럼 여러분은 나의 설교를 적절하게 수용하였고, 나는 이 일에 빚진 자입니다.
이 책을 여러분에게 바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을 향한 사랑이 아니었으면 이 강론이 설교가 되지 않았고, 여러분의 간절한 열망이 아니었으면 출판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떤 환대를 받을지라도, 나는 특별히 이 강론이 여러분의 집에서 태어난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이 강론을 환영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눈에 어린 호의를 바라며 여러분의 마음에 이 강론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크고 비할 데 없는 존경심으로써 이 일에 참여하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는 이에 대해 다만 기도로밖에는 보답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만족하게 여기신다면 나는 은혜의 보좌 앞에서 여러분을 기억할 것을 약속합니다.
-매튜 미드(17세기 영국 청교도 설교자, 목사), ‘유사 그리스도인’(지평서원)에서
저자 소개 - 매튜 미드 (Matthew Mead, 1626-1699)
매튜 미드 목사는 영국 남부, 버킹엄셔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출생과 교육 등의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버킹엄셔의 부룩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것과 1658년 1월 22일에 쉐드웰의 뉴채플 교회의 목사직을 맡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1662년, 기도 방식 통일 법령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는 다른 성직자 2천여 명과 함께 성직에서 추방당하고 1년치 생활비를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1671년, 매튜 미드 목사는 헨리 버튼이 1644년 설립한 비국교도 교회인 스탭니의 우스터 하우스에서 죤 오웬, 카릴, 그리피스 등 청교도 거목들의 참석 하에 위임식을 갖게 됩니다. 스탭니에서 설교했던 매튜 미드에 대하여 역사가 캘러미(Calamy)는 많은 회중이 그의 설교를 듣기를 열망했고 캘러미 자신도 미드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증언합니다. 미드가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었고 탁월한 설교자였다고 말합니다.
매튜 미드는 1683년, 국왕을 암살하려는 사건, 즉 라이 하우스 공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오웬과 그리피스 목사와 함께 기소됩니다. 그러나 미드는 추밀원의 심문에 의연한 자세로 자신의 무관함을 증언했으며, 결국 석방되었습니다. 매튜 미드는 연륜이 더해 가면서 복음적 열정과 영혼에 대한 사랑도 더해 갔습니다. 그는 불필요하고 무익한 논쟁을 싫어했고, 복음의 본질적 교리를 깊이 연구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미드는 1699년 10월 16일에 향년 70세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친구가 심경을 묻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사명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라고 담담히 말한 후,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크게 외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사 그리스도인’ 책 소개 및 서평 보기
http://mall.godpeople.com/?G=9788986681185
첫댓글 자신이 그럴듯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뜨려보이십니다. 자신의 죄성에 절망하여 그 죄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를 갈망케 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미드의 마지막이 참으로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