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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95:1-11) Made by God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오늘 함께 읽은 시편95편 말씀중심으로 <메이드 바이 갓>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메이드 바이 갓'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라는 제목으로 시편95편의 말씀을 함께 살펴봅니다.
요즘 들어서 신문이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 뉴스의 스포츠 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선수가 있습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입니다. 인디언스팀의 4번 타자를 맡고 있어요. 그런데 추신수 선수가 7월 4일의 오클랜드와의 시합에서 5타수 4안타를 쳤습니다. 굉장하지요. 다섯 번 나와서 네 번을 쳤는데 그 중에 2번이 홈런입니다. 그리고 추신수선수가 방망이로 공을 때린 덕분에 얻은 점수가 무려 7점이나 됩니다.
추신수 선수가 불을 뿜은 오클랜드와의 경기가 중계되는 가운데 한국 백성들의 마음을 아주 훈훈하게 해주는 장면이 한 장면 포착이 됐습니다. 겨드랑이에 방망이를 끼고 나오는 추신수 선수 야구방망이의 손잡이 동그란 부분에 태극기스티커를 붙였습니다. 그것이 네티즌들의 눈에 띄면서 추신수 선수의 애국심에 굉장한 호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추신수 선수 진짜 훈훈하다. 추신수 선수의 애국심 참으로 멋지다. 추신수 선수에게 병역의무를 면제하라’라는 호응을 일으키고 있어요.
저도 보니까 고맙던데요. 그리고 추신수 선수는 한국산,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야구방망이만 사용하면서 농담 삼아 하는 말이 한국에서 만든 야구방망이로 쳐야 홈런이 잘 나온다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한국산 방망이 여러 개 중에서 꼭 타석에 나갈 때나 시합에 나갈 때는 ‘오늘은 누가 나갈래?’라고 야구방망이들에게 질문을 한답니다. 만져봐서 감이 좋은 방망이를 들고 시합에 임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분 좋아요. 타율이 3할 대가 넘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그렇게 잘 쳐내는 인디언스 팀의 4번 타자 추신수 선수가 한국산 야구방망이 아니면 안 쓰고 야구방망이 손잡이 아래의 태극기스티커를 붙이고 고맙죠. 이러한 애국심,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데 인지상정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래요. 하여간 내가 사랑하는 것과의 관련성이 있으면 내 마음에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2000년이거든요? 2000년이면 지금이 2009년이니까 10년 세월이 지나갔는데 2000년도에만 해도 국산차가 외국에서 달리는 것을 보면 굉장히 반가웠어요. 그리고 여름에 창문이라도 열어 놓고 달리다가 신호등 앞에 서 있으면, 국산차를 타고 있는 외국인은 외국인 같지가 않고 형제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뉴욕 44번가에서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데, 나는 노란 택시를 타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한국산 소나타를 타고 창문을 내리고 백인 아저씨와 아줌마가 안에서 담소하고 있으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고 영어만 잘하면 한 마디 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나와 관련된 것들을 다른 사람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식을 예뻐하는 선생님에게 특별히 더 정이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만든 작품 ‘메이드 바이 태승철’을 남달리 좋아하거나 남달리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에게는 굉장히 훈훈하게 느껴지고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도 그대로 비유적으로 적용되어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 10절에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근심하여’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에는 ‘경멸한다’는 뜻입니다. ‘다투다’라는 뜻도 있고 낮추어보거나 업신여겨 싫어하거나 지긋지긋해 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그 세대들을 미워하시고 경멸하시고 아주 지긋지긋해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지 이 점을 오늘 이해하자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당신이 선택해서 애굽으로부터 출애굽을 시켜 가나안 복지로 이끌어가시던 그 선택한 백성들을 왜 지긋지긋하게 싫어하셨고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문제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출애굽 1세대들을 경멸하셨다는 거예요. 지긋지긋하고 혐오스럽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영적 연관 하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됐는가? 오늘 시는 신정시예요. 신(神)자에바를 정(正)자의 신정시는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도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오늘의 신정시의 정자는 정치 할 때의 정(政)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 사실 자체,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노래하는 것이에요. 그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의 태도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예를 출애굽 때에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아니 출애굽 당시부터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기적의 역사들을 다 보고나서, 지금 사막에서 당장에 물이 좀 없다는 그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 하나님이 물 안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 보신 것인데 거기서 그만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시험하고 하나님과 다툽니다. 모세와 다툰 것이 하나님과 다툰 것이 되잖아요. (맛사:시험한다, 므리바:다툰다.) 이런 뜻의 이름이 그 장소에 매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이에요. 이 때 하나님께서 ‘지긋지긋하다. 내가 너희를 경멸한다.’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왜 인간을 경멸하실까요? 더군다나 선택받은 백성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에 창세기 6장 3절에 “인간이 육체가 되었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지면 위에서 싹 쓸어버리시겠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그 인간의 상태는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지면 위에서 쓸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고깃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고깃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멸하지 않으실 수 있는 어떤 요소도 인간 안에는 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존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어떤 속성도 없는 것이에요. 오직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말하는 고깃덩어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이 대단한 줄 알아요. 또 직립보행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직립 보행하는 고깃덩어리고 경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정직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 볼 때에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그 어떤 요소도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경멸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 마음이 바뀌실 수 있습니까?
길거리에 지나가는 외국인이 우리 국산자동차를 타고 지나갑니다. 남다른 형제 의식을 갖게 돼요. 추신수 선수가 대한민국에서 만든 방망이만을 고집하며 사용합니다. 만약에 추신수 선수가 성조기를 붙이고 다니고 미국 사람인양 행동을 했다면 우리는 그럴 거예요. ‘뭐 야구? 방망이만 잘 휘둘렀지, 사람이 근본이 안 돼 있네.’라고 경멸하게 됩니다. 지금 훈훈한 마음을 갖는 이유는 태극기를 붙이고 한국산 야구방망이를 끔찍하게도 애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와 연관된 무엇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산차를 타고 있는 외국인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국산차가 나와 연관 되어진 희미한 끄나풀이지만 그것을 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에 경멸하지 않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말하는 고깃덩어리고, 생각하는 고깃덩어리고, 계획하는 고깃덩어리고, 직립보행하고, 수단과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지 다른 게 없어요. IT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고깃덩어리일 뿐입니다. 연봉 10억짜리 고깃덩어리일 뿐이지, 연봉 10억 받았다고 존귀하게 여겨질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훈훈한 마음을 갖고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연관되어진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적 연관성이 우리 인간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죄악으로 똘똘 뭉친 단지 육체가 된 고깃덩어리고 경멸의 대상 그 이상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 뭡니까? 므리바, 맛사, 르비딤에서 장막을 쳤을 때 물이 없었어요. 그 때에 왜 감사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감사하냐? 감사가 도대체 뭐냐?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르비딤에 장막을 칠 때까지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다 알아요. 모세가 앞장섰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다 압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르비딤의 상황이 만들어 졌어요. 메이드 바이 갓. 국산 차를 이용하는 외국인이 훈훈하게 느껴지고, 국산방망이를 이용하는 추신수 선수가 고맙게 느껴지듯이, 지금의 르비딤의 이 상황은 메이드 바이 갓,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황을 우리가 우리의 안으로 끌어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훈한 느낌을 가지시고 친밀감을 가지시고 우리가 귀하게 여겨지시는 겁니다. 그런데 르비딤에서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시험을 했어요.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2000년에 미국에서 국산차를 볼 때에는 외국사람이 국산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두 가지 마음이 있어요. ‘아! 좋다. 우리나라도 이제 외국인들이 차를 타고 다닐만한 그런 차를 만들어 내는 구나.’ 두 번째 걱정은 ‘아이고, 일본차에 비해서 고장이 많으면 어떻게 하나? 저 사람들 자동차 문화권 속에서 자라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낄 때, 이거 싼 게 비지떡이구만, 타보니까 안 되겠어’라고 반응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그런데 자동차에 타고 앉아서 같이 조수석에 타고 있는 사람과 즐겁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놓이는 거예요. ‘저 사람이 현대 소나타를 타고서 저렇고 기쁘게 웃고 있구나. 저 차가 괜찮은가보다.’라고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르비딤이라고 하는, 이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물이 없으므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마땅히 불평할 만 합니다. 그런데 르비딤의 상황이 비록 내가 목이 마르지만, 그 누구도 아닌 열 가지의 기적의 재앙을 보여주시고, 그 대제국 바로의 왕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메이드 바이 갓’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백성을 어떻게 생각하셨겠습니까? 국산차의 품질이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좋다고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에 너무 고마워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불평할 만합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품질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허락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그 상황을 메이드 바이 갓 되어진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셨겠습니까?
그런데 국산차 사보고 발로 뻥뻥 찹니다. 경멸합니다. 그 모습을 내가 보면 아무리 국산차가 품질이 안 좋을 때일지라도 화가 나는 거예요. ‘여보쇼! 당신들은 처음부터 차를 잘 만들었어? 이거 왜이래? 당신들 역사에 비하면 우리는 짧은 시간에도 이만큼 만들어냈어. 조금만 기다려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르비딤의 상황, 물이 좀 없어서 목이 말라요. 하나님이 목말라 죽이시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시험합니다. 그 상황을 국산 차 품질이 안 좋다고 발로 차듯이 경멸합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이 이게 지금 신정시입니다. 누가 주신 겁니까? 이 온 땅, 내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예요. 메이드 바이 갓.
내 의지와 상관없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 잘못을 고려해서 이런 잘못을 저지르므로 이런 상황이 벌어져야 다음에는 안 그러겠다 싶어서 허락하신 상황일 수도 있고 좌우지간 메이드 바이 갓이에요. 그런데 마음에 안 들어서 발로 뻥뻥 차는 거예요. 메이드 바이 갓 되어 진 지금의 상황을 우리가 경멸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경멸하십니다. 하나님적 연관성이 들어와야 경멸의 이유가 좀 없어지죠.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는 고깃덩어리예요. 말 잘하는 고깃덩어리.
예를 들어 8등신 여배우가 있어요. 너무 멋있게 빠졌어요. 몸도 얼굴도. 그런데 하나님 전혀 몰라요. 그러면 8등신 고깃덩어리예요. A+ 고깃덩어리. 별거 아니에요. 너무 못생긴 메주덩어리 같은 아가씨가 있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십니다. 그 아가씨가 자기가 메주덩어리 같은 상황을 거울 앞에 두고서 메이드 바이 갓, 하나님이 만드셨다. 누가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랴? 마치 똥차를 만들어 수출을 했는데 그 차를 40년 쓰는 캐나다 사람도 있어요. 프레스토 같은 것. 30년 된 차를 아직도 타고 다녀요. 고마워요.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품질을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데 메이드 바이 갓.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내 삶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가 뭐예요? 수용한다는 거예요.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내 안에 지금 주어져 있는 르비딤의 상황,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죽겠어요. 돈이 없어서 돈이 말라 죽겠고, 자식 성적이 너무 목마르게 그립고, 병이 나서 건강에 목마릅니다. 모든 목마른 상황이 있어요. 르비딤에서 이스라엘이 물이 없어 목이 말랐듯이 돈이 없어 목이마르고,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이 없어 목이마르고, 신랑감이 없어 목이마르고, 성적이 안 올라 목이마르고, 건강이 없어 목이마르고, 목회하는 목사님들은 교인이 늘지 않아 목이 마릅니다. 모든 목마름의 상황을 메이드 바이 갓으로 깨닫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상황이라면 감사하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거예요.
그런데 메이드 바이 갓 되어진 우리의 상황을 우리가 경멸합니다. 발로 찹니다. 이까짓 것으로 살라는 것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러면 하나님이 죽여주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뭐 어떻게 하고 사는 게 낫지. 당신 같은 사람하고 살 바에는 없는 게 낫지. 없애주실 것이에요. 너 같은 자식 놈을 낳고 내가 고생하느니 차라리 무자식 상팔자다. 자식 없애 줄테니 걱정하지마세요. 감사가 하나님적 연관성을 끌어들이게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나마 고깃덩어리들 안에 하나님이 메이드 바이 갓 되어 진 것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감사로 수용한 흔적이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 눈에는 귀하게 여겨지고 선택받은 백성이 되어서 오늘 본문 7절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라”고 하십니다. 목자에게 양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고깃덩어리들이 하나님에게 귀한자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메이드 바이 갓 되어 진 지금의 상황을 진심어린 감사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감사가 안 나오는 이유가 뭐예요? 내가 나를 파악을 못해서 그래요. ‘내가 아무리 못나도 르비딤에서 목말라 있을 처지는 아니다. 그보단 낫다. 내가 지금 이렇게 돈이 없이 살아야 될 사람은 아니다. 내가 당신 같은 여자하고 살아야 될 남자는 아니거든? 내가 당신 같은 남자에게는 안 맞는 여자거든? 내가 그래도 왕년에 날 따라다니던 남자 중에는 지금 장관하는 남자도 있거든? 어디서 이 따위가 와서 내가 눈이 삐었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사가 안 나오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모습이 뭔 줄 아십니까? 고깃덩어리에,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다 악할 뿐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셨어요. 그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잊어버리면 감사가 없어져요. 내 입에서 불평이 나오고 불만이 나온다면 반드시, 반드시 또 반드시 두 번, 세 번, 네 번, 반드시 내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주제파악하고, 메이드 바이 갓 되어진 모든 상황을 감사로 수용해서, 하나님적 연관성을 내 안에 갖게 될 때에, 추신수 선수를 볼 때의 훈훈함, 국산차를 타고 다니는 외국사람을 볼 때의 훈훈함, 그 훈훈한 마음으로 우리를 경멸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시고 우리를 양처럼 당신의 백성처럼 여기시며 이끌어가시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주님은 들판에 피는 풀 한 포기,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를 보시면서도, 또 당신을 십자가의 사형의 형벌로 재판하는 빌라도를 보시면서도, 은 30에 당신을 파는 제자 가룟 유다를 보시면서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고 메이드 바이 갓 되어 짐을 인정하시며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양으로서 오늘 하루 살아갈 때에 주님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인정하며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해 메이드 바이 갓 되어진 것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멸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고 기르시는 백성의 자리에 우뚝 설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