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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1> 서장 (書狀)
유보학에 대한 답서
오늘 부산은 섭씨 31도가 넘었고, 지금 자정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더워서 소위 열대야(熱帶夜)를 맛보고 있다. 이러한 더위는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계절이 여름이어서 태양빛이 북반구에 수직으로 내리꽂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답한다면, 이것은 분별심의 소산으로 어리석은 이의 답일 뿐이다.
바로 지금 ‘찌ㆍ는ㆍ듯ㆍ무ㆍ덥ㆍ다’는 사실을 분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바로 여기에 더위가 있고 동시에 근원이 있다. 근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더위에 머물러 있는 한, 나는 더위와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위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더위가 곧 나요 내가 곧 더위로서 나는 더위와 더불어 편안하다.
그러므로 근원으로 돌아갈 줄만 알면,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늘 한가하고 자재하여, 더위라는 마귀나 추위라는 마귀에게 어지럽혀지지 않는다. 근원에서는 더위도 추위도 마귀도 나아가 근원이라는 생각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의 진실은 모양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너무나도 분명하고 뚜렷하며 편안하고 자유롭다. 삼라만상 전부가 이 하나에 근거하여 나타나지만, 이것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이렇게 글을 쓰고 읽는 것이다.
일상의 삶은 가고·머물고·앉고·눕고·말하고·침묵하고·움직이고·고요하고·잠자고·깨어 있고·이치를 생각하고·사실에 접하고·내면의 마음을 느끼고·밖으로 대상을 접하고 하는 등등으로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지만, 이 모든 모습을 드러내는 근원은 바로 모양 없는 이 하나의 진실이다.
이른바 ‘화두(話頭)’란 모양 있는 것을 통하여 모양 없는 이 하나의 진실을 지시하는 ‘말’이다. 그 화두가 1700 공안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모양 있는 언어로서 본다면 1700 가지가 모두 다르지만, 모양 없는 진실로 본다면 1700 가지 아니라 1700억 가지라고 하더라도 다를 수가 없다.
따라서 화두를 ‘무엇’ 혹은 ‘어떤’ 의미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늘 어긋날 뿐이다. 화두란 모든 의미 속에서 의미 없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화두는 어떤 ‘것’이 아니다.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진실을 모를 때에는 단 한 마디를 말하더라도 아니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더라도 미혹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이 진실을 알고 나면 아무리 많이 말하더라도 늘 밝고 뚜렷하여 미혹됨이 없다.
그러면 이 하나의 모양 없는 진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보고·듣고·냄새 맡고·맛 보고·감촉하고·의식하는 여섯 가지의 모든 경험을 통하여 이것은 드러나지만, 사람이 이들을 모양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알려질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아는 데에는 총명한 지능보다는 단단한 믿음과 가슴 깊이에서의 갈망이 더욱 필요하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망과 진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깨달음을 향함에 가장 중요한 힘이 되니, 바로 이것이 발심(發心)의 조건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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