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다! - 그리운 것은 오직 사람들뿐
2023년 7월 9일 (일) 오후 10시 35분. 나의 야간 교대 시간이다. 깨어나니 비는 그쳐 있었다. 저녁식사 후 미리 3시간 동안 꿀잠을 잤다. 그런데 엄청나게 춥다. 점퍼를 껴입고 우비까지 챙겨 입었는데 예상외로 춥다. 담요를 끌어당겨 무릎을 덮는다. 따듯한 커피를 한잔 끓여 손에 든다. 양손이 따스해 진다.
이번 항해 중 가장 만족도 높은 일 중 하나가, 대만 Hobihu에서 인젝터 청소와 및 수리를 한 것이다. 처음 Hobihu 마리나에서 Jose가 알려준 엔지니어 전화번호는 먹통이었다. 통화도 문자 메시지도 답이 없었다. 급해진 문선장님이 대만의 볼보-펜타 대리점들에 전화를 해보니 모두 예약이 꽉 차있어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답이었다. 절망이다. ‘안되면 뭐 불안하지만 이대로 한국 가서 인젝터 청소와 수리를 하지 뭐.’ 이랬으면 정말로 불안하게 항해 했을 거다.
하지만 문선장님은 뭐라도 끈을 잡자는 심정으로 수동 변기를 샀던 보트용품점 사장님께 전화를 해 문의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볼보펜타엔진 수리 엔지니어 Mr 왕을 소개 받아 적시에 인젝터 청소와 및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세상사 참 희한하다. 수동변기 => 인젝터 청소와 및 수리 가 된 거다. 그 결과 이번 항해에서 엔진만큼은 대만족의 상태로 강릉까지 오게 됐다. 알고 보니 문선장님도 나와 같은 가톨릭이고 세례명은 ‘첼소’ 시다.
제네시스 바로 앞, 북두칠성 국자가 세워져 있다. 너무 익숙한 별자리가 너무 익숙한 곳에 머물러 있다. 제네시스 우현 하늘 카시오페아도 변함없다. 나는 침로 333도로 느리게 전진중이다. 뒷바람 12노트, 선속 4.4노트. ETA는 조금 빨라졌다. 그러나 바다의 시간은 시계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람과 조류가 만든다. 내일 오전 10시까지는 강릉항에 잘 입항하게 되길 기도한다.
오후 11시. 집어등을 환하게 켠 어선 한척이 2시 방향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긴장한다. 제네시스를 향해 곧바로 달려오던 어선은 300미터 거리에서 침로를 바꾸어, 제네시스의 뒤쪽으로 지나간다. 오늘은 고기가 없나? 둘러보니 다른 배들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 해안가에는 불빛이 보이는데, 수평선은 먹물 같이 검어 바다와 하늘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제 강릉항은 11시간 남았다.
바람이 너무 차서 긴팔셔츠를 껴입고, 점퍼를 입는다. <35도를 육박하는 이른 더위>라는 뉴스 기사와 너무 판이하게 달라 당황스럽다. 역시 바다는 예보가 아닌 현실이다. 모든 예보는 그저 [참조용]일 뿐이다. 어떤 바다든 바다는 세일러와 직접 대화하기를 원한다. 나도 그렇다. 나도 바다의 외침과, 바다의 힘과, 바다의 관용에, 직접 눈물과 땀과 피로 답할 뿐이다. 바다도 내 피도 짜다. 바다와 나, 우리는 동일한 DNA를 가졌다.
2023년 7월 10일 오전 0시 18분. 우리는 삼척 앞바다를 지난다. 선속 3.6노트. 바람은 조용하고 10.5해리 떨어진 해안의 불빛들도 선명하다. 안개가 걷히고 비도 멈췄다. 제네시스는 조용히 롤링하며 강릉으로 다가간다. 출출하다. 미니 초컬릿 바 2개를 먹는다. 대만 호비후 마리나에서 출항 후 제주도 해역에서 여기까지 3번의 위기를 겪었다. 어느 바다나 한 번의 위기 정도는 있었지만, 풍랑으로 3번이나 고생하는 건 이번 코스가 유일하다. 동중국해와 대한 해협이 그 만큼 험난하단 의미다. 4시 방향에 칵테일용 레몬 조각 같은 반달이 떠있다. 위로가 된다.
내일 리나는 유아원에 등원한다. 아쉽게도 마리나에서 보지 못한다. 뭐가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건 가여운 일이다. 부모님을 뵙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실은 아버님의 건강이 아주 나빠서, 한동안 입원 하셨다. 혹여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생길까 노심초사했다. 7월 14일 시애틀에서 여동생도 온다. 부모님껜 슬하에 삼남매 모두 모이는 소중한 시간이 되실 거다. 아버님 건강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항해하는 6개월 동안 눈에 띄게 여위셨다. 당분간은 한 달 이상 장거리 항해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불효막심은 여기까지다.
아덴만에서, 인도양에서, 남중국해에서 가족들이 그리워 눈물 흘렸다. 고독한 항해는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해 주었다. 주변의 번다한 것들이 사라지면 인생의 요체가 남게 된다. 바다가 주는 깨달음이다. 부모님과 가족, 친구, 지인들.
장거리 항해 중, 항해가 괴로울 때. 과거에 보고 감탄했던 세상 아름다운 장소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운 것은 오직 사람들뿐.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미소였다. 귀항 후 내가 집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삶의 목적이 분명하게 도드라졌다. 통신 수단 없는 망망대해에서 나는 ‘무의미한 먼지’였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가 없다면, 세상에서의 나도 ‘바람에 날리는 먼지’일거다. 내 삶은 그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존재한다. ‘무소의 뿔’은 부처의 그저 화두일 뿐. 내가 쉴 곳은, 별이 빛나는 바다지만, 내 살 곳은, 저 해안 노란 전등불아래 작은 동네다. 그곳에 내 가족이 있고 내가 있다. ‘사서 고생’한 끝에 목숨 걸고 배운 것들이다. 나는 6개월 항해 끝에 가족에게 돌아간다.
오전 5시 20분. 일출이다. 그동안 수없이 보았던 일출이다. 그러나 어찌 이리 다른 일출일까? 멀리 해안선엔 익숙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옅은 해무 탓에 안목과 경포 해안의 큰 건물들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문어 통발들의 깃대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작은 낚시 보트들이 보인다. 나는 강릉 앞바다에 떠 있다. 눈이 짓무르게 보고팠던 풍경이 서서히 다가온다.
“커피 한 잔 하시지요?”
문선장님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온다. 바람은 산들바람, 파도는 잔잔하다. 카~ 좋구나. 모닝커피.
오전 6시 25분. 7.2 해리 앞이다. 선속은 2.7~3.0 노트.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살짝 흐리다. ETA 10시는 문제없다. 곧 강릉항에 닿으면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하게 될 거다. 행복한 순간이다.
첫댓글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쯤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고 있겠네요
안전 귀항 축하드리고 앞날에 축복과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수고가 많았네요
그 먼길을 AIS없이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선장님 지난 한국까지 여정 글 잘 보았습니다. 해당 글을 정리 해서 여러 선장님의 세일루트 기록을 남기고자 합니다. 하여 선장님 성함으로 글 내용을 최소로 다듬어서 언아더월드 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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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 항로에 기록 해도되는지 여쭙습니다.
안전 항해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