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62) 돼지 열일곱마리
소백산을 종횡무진 누비던 사냥꾼 고 생원은 어느 날 동네 어귀 주막집에서 술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벽에 기대 한평생 살아온 길을 더듬다가 걸어둔 활과 화살을 군불이 활활
타는 아궁이에 처넣었다.
나이를 먹으니 기력이 떨어져 산을 타는 게 젊은 시절 같지 않았다.
게다가 마누라가 부디 살생을 그만하라고 주문처럼 외는 말이 귓가에 맴돌아서다.
화살에 맞아 쓰러져 눈을 부릅뜨고 고 생원을 쳐다보던 수많은 짐승들이 눈에 밟히기도 했다.
고 생원은 산짐승들을 이렇게 죽였건만 산짐승들은 그의 목숨을 살려줬다.
고 생원은 자신이 쳐놓은 올무에 발이 묶인 산돼지를 잡았으나 사냥꾼의 도를 지켜 새끼 밴 그놈을 살려줬다.
어느 날 살쾡이를 겨냥해 활시위를 당기다가 뒤에서 호랑이가 덮치는 것도 몰랐는데 바로 그때
그 산돼지가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고생원은 목숨을 건졌었다.
막상 활을 던지고 나니 섭섭함도 몰려왔다.
산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팔아 소백산 남향 산자락 수철리에 집을 장만했고
화전 밭뙈기와 논을 일궈 장가를 들어 아들 셋을 뒀으니 구겨진 인생은 아니다.
스물두살 스무살 난 두 아들은 장가를 가서 새살림을 차렸지만 수철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 모두 사냥은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약초를 캤다.
고 생원은 늦게 본 막내아들 손을 잡고 풍기에 대목장을 보러갔다.
왁자지껄한 장터는 열두살 막내에게 온갖 호기심을 자아냈고 고 생원에게도 가슴을 뛰게 했다.
사준 깨엿을 조끼 주머니에 넣고 신이 나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막내에게 고 생원은 말했다.
설빔 한벌 골라라, 제일 비싼 거로,신발도 털모자도.
그러자 막내는 고개를 젓더니 "아부지 저 새끼돼지 한마리 사주세요"라고 했다.
고 생원은 껄껄 웃으며 설빔과 새끼돼지를 사줬다.
막내는 새끼돼지를 꼭 껴안고 집으로 오다가 수철리로 들어서자
냅다 첫째 형 집으로 달려가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다.
이어 둘째 형 집에도 들렀다.
집으로 돌아와 제 방에 포대기로 집을 만들고 새끼 돼지에게 여물을 먹이며 난리를 쳤다.
막내가 새끼돼지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한시도 품속에서 떠날 날이 없다.
새끼돼지는 조금 크자 막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막내는 밭뙈기 자락에 손수 콩과 고구마를 심어 새끼돼지 여물로 썼다.
새끼돼지는 쑥쑥 자랐다.
이듬해 봄 이놈의 덩치가 막내보다 더 커졌다.
형들이 통나무를 베어와 우리를 만들었다.
막내는 잠잘 때만 제 방에 있다가 눈만 뜨면 우리 속에서 돼지와 뒹굴었다.
막내가 집을 나서든가 산에 오를 때면 돼지는 항상 따라다녔다.
어느 달 밝은 밤 뒷간에 가던 막내가 깜짝 놀랐다.
우리에 돼지가 두마리.
눈을 비비고 봐도 두마리다.
막내가 다가가자 한마리가 우리를 박차고 나와 산속으로 도망쳤다.
산돼지였다.
막내가 키운 돼지는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새끼를 다섯마리나 낳았다.
다람쥐처럼 얼룩무늬 줄이 박힌 귀여운 새끼들은 영락없는 산돼지 모습이다.
밭둑에서 돼지감자를 캐고 개울에서 가재를 잡아 돼지우리에 넣어주는 게 막내의 일이 됐다.
밤마다 아빠 산돼지가 내려와 우리 속에 들어갔다.
돼지는 배가 불러오더니 또다시 새끼 일곱마리를 낳았다.
형들이 와서 돼지우리를 넓게 새로 지었다.
돼지는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고 생원 집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겨우내 심한 고뿔을 앓던 고 생원이 일어날 줄 몰랐다.
어느 날 고 생원은 삼형제와 마누라를 앉혀놓고 말했다.
"형제간 우애 있게 살고 너희들은 어미를 잘 모셔라.
산짐승을 잡지 말고. 콜록콜록"
이어 고 생원은 물 한모금 마시더니 "돼지들 반은 첫째가 갖고 삼분의 일은 둘째가 그리고
구분의 일은 막내가 가져라"고 했다.
그게 고 생원의 유언이 됐다.
세 아들은 고생원이 한평생 뿌리내리고 살았던 소백산 자락에 안장하고 희방사에서 사십구재를 마쳤다.
삼형제는 선친의 유언대로 돼지를 나누려는데 열일곱마리다.
첫째 몫이 반이니 17÷2=8.5. 여덟마리 하고 반마리?
둘째는 삼분의 일이니 17÷3=5.666. 다섯마리 하고 0.666마리?
막내는 17÷9=?
삼형제가 우리 옆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아비 산돼지가 쿠루루루 소리를 내며 산에서 내려와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막내가 말했다.
"큰형, 작은형, 저기 봐요. 열여덟마리가 됐잖아요!"
막내는 그러면서
"큰형이 아홉마리(18÷2=9)를 작은형은 여섯마리(18÷3=6)를 가져가면 세마리가 남아요.
제 몫으로 두마리(18÷9=2)를 차지해도 한마리가 남는데요" 라고 했다.
막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비 산돼지는 다시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를 본 삼형제의 어머니는 "저 산돼지는 너희 아버지를 살려준 산돼지의 아들이란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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