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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음에 대한 치유
막 15:33-39, 2023.07.16.늘찬양교회
부산에서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정유정(23)이 경찰에 체포 직후 범행동기에 대해 “실제로 살인하고 싶어 범행을 저질렀다.”라고 자백을 하였습니다. 또한 정유정은 범행 직후 자신의 집에서 여행용 가방을 가져왔고 칼과 세제, 비닐봉지를 구입했으며 A씨 시신을 훼손해 가방에 담은 후 27일 새벽 경남 양산의 낙동강 변 풀숲에 시신을 유기하였습니다. 정유정은 기초생활수급자인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고교 졸업 후 5년간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포렌식을 통해 ‘살인’에 대한 집중 검색을 한 것을 근거로 계획적인 범행으로 검찰에 송치하였습니다.
지난 6월 17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정신건강의학, 범죄심리 전문가들은 정유정이 사이코패스나 은둔형 외톨이와는 다른 특성 보인다고 분석했으며, 또 정유정의 범행동기도 선천적 특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정유정의 사건을 ‘사회적 버림을 받은 한 인간의 반항’이라고 보면서 ‘버림받음에 대한 치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Ⅰ. 버림받음의 덫
먼저, 버림받음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버림받음이 일회성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버림받은 경험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정유정도 기초생활수급자인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고교 졸업 후 5년간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철저하게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로 인해 모든 만남의 관계에서 편안함과 사랑, 고마움 같은 긍정적인 형태가 아닌 언제든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두려움, 불안, 그리고 고립감과 같은 감정들이 매 순간 나타났다고 봅니다. 대인관계에서 이러한 감정들은 독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독이 지나쳐서 살인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버림받음의 더 큰 문제는 버림받음을 두려워하면 또다시 버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H 씨는 중년 여성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사람과 준비 없는 이별을 하는 심리적 상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어릴 때 버림을 경험하게 된 H 씨는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또다시 내 곁을 떠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결혼하였지만 현재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정적인 남편이지만 H 씨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집에 있을 때면 자신의 불안함을 더욱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지낸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남편이 자기 곁을 떠날 것 같은 불안함이 느껴질 때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심정을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할 정도입니다. 결국, 상대에 대한 과한 집착만 남발하다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 그리고 이런 행동이 자신이 겪는 모든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버림받음의 덫입니다.
J라는 청년은 언제나 마음이 공허합니다. 누군가와 같이 있지만, 혼자 있는 느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허한 마음을 수많은 여성과 함께하면서 채우려는 생활 방식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상대 여성이 자신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려고 하면, 두려움을 느끼고 멀어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모든 여성에게 그런 관계를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왜 그런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J청년의 어머니는 직장여성이었습니다. 아침에 육아시설에 맡겨진 채로 성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녁 늦게 찾아오셔서 집에서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온전히 J청년에게 집중해주지 못하는 어머니였습니다. J청년은 그런 어머니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어머니는 잠깐 있는 동안에도 자신에게 집중해주지 못하고 집중을 해 주더라도 그 시간이 길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감정 기복이 심하셔서 편안한 관계를 경험해주지 못했습니다. 즉 어머니로부터 일관성 있는 사랑 경험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J청년은 그런 어머니로부터 매번 정서적인 버림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어머니이지만,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날마다 해오면서 마음에서는 친근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경험만 계속되다 보니 어머니에게 채우지 못했던 공허한 마음을 많은 여성들로부터 채우고 싶었지만, 정작 여성이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면 친근한 관계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납니다. 마치 자신의 어머니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이 또다시 자신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가까이 가고 싶지만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가까워질 듯하면 또다시 심리적인 도망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만남을 통한 친근감과 정서적 나눔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그러나 친근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여 나 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대화가 없고 삭막해져 가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Ⅱ. 버림받은 예수님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세 번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는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을 때, 로마제국 즉 세상 권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유대 대제사장과 성전의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때, 기존 종교세력과 체제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는 놀랍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34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가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피의 보혈로 씻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버림받음에 대한 아픔과 고난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에 버림받음으로 고통하며 아파하는 심령들을 위로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사 생명의 주가 되심으로 죄인 된 모든 사람의 구원자가 되시고, 버림받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향한 부름의 초청장이 되게 하셨습니다.(고전 15:20∼23).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우리에게 은혜요, 감사요, 축복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로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53장 5절과 6절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죄의 포로가 되고, 질병의 포로가 되고, 절망의 포로가 되고, 죽음의 포로가 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Ⅲ. 빛으로 오신 예수님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로 부활의 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단은 과거의 쓴 뿌리를 통해서 우리를 두려움과 무서움에 버림받음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불의, 죄악, 무능력, 우울증, 열등감, 부정적신 사고방식 등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일생을 보냅니다.
사단은 지금의 생명, 지금의 행복, 지금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죄악의 율법으로 우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 달빛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얼마나 무서워했습니까? 내가 가는 길마다 따라오며 나를 무섭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림자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알고 난 이후에는 그림자를 더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는 빛이 오면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구원의 주, 생명의 주, 실패와 절망의 구렁텅이, 죄악의 사슬에서 허덕이는 나를 자유롭게 하려고 빛으로 부활의 주로 오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됩니다. 왜 그림자의 정체, 사단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에 더는 두렵지가 않습니다.
삶을 두려워하며 겁을 내는 것은 감정을 겁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정입니다.
실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직으로 인한 자기혐오 스스로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상실감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그림자입니다. 감정의 실체를 알면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그림자, 실패의 그림자, 버림받음에 대한 그림자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빛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빛과 하나가 되면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생명의 빛을 소유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생명의 빛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이 주님 주신 생명으로 밝게 빛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존재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생명이 있는 식물은 자라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믿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동물은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활발한 영적인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식물은 열매를 맺고 생명이 있는 동물은 새끼를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맺고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력을 밖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의 가정 안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의 학교로, 직장으로 흘러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이 사회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확산하며 이 사회를 움직일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버림받음의 덫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덫의 뿌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별 순간에 왜 항상 자신이 비참하게 매달리게 되는지, 왜 버림받는 것이 두려운지에 대한 과거의 잔재들을 돌아보도록 합시다. 덮어두고만 싶었던 성장 과정의 경험들, 타인과의 관계에서 받아왔던 느낌들을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받았던, 아직 남아 있는 상처들에 대한 위로와 통렬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현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변화할 수 있는 첫걸음이니까요.
실패의 경험들 두려움의 쓴 뿌리들은 나를 변화시킬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삶의 위기들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극과 극에 마주칩니다. 그곳에서 자신 스스로가 문제 해결을 해나갈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의 주님을 통해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릴 것이냐? 는 결정을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저는 이 기로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두 손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리라.”(시 73:28)는 결단을 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어 지금까지 그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서 많은 사람에게 생명과 기쁨을 나누어주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