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3. 서안.낙양 일대의 ‘海東유학승’
한국 고승 중국 유학길 5세기초 부터
인도에서 탄생된 불교는 기원 전후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 대월지 사신이 전한의 박사 제자 경로(景盧)에게 경문을 전수하는 등 개인적으로 수수(授受)되던 불교는 후한 명제 영평 10년(67) 공식적으로 중국에 전래됐다. 당시 천축 출신 섭마등.축법란 두 스님이 백마에 경문을 싣고 낙양에 도착, 백마사에 머무르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파했다. 두 스님을 이어 서역(西域) 출신 스님들이 끊임없이 동쪽으로 들어오자, 부처님 가르침도 서서히 중국사회에 확산됐다. 220년 한나라가 망하고 시작된 위.촉.오의 삼국시대 불교는 점차 민간에 퍼졌고, 서진(西晉)시대 불법(佛法)은 강.남북 땅에 두루 확산돼 있었다. 317년 서진이 멸망된 후 양자강 이남에서는 사마씨의 종실(사마예)이 다시 나라를 건국, 국호를 동진(東晉)이라했고, 송.제.양.진의 네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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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흥교사 전경> |
사진설명: 신라 원측스님의 탑이 있는 흥교사는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유학 가 공부했던 사찰이다. 사진 속에 보이는 탑은 현장스님의 탑이다. |
반면 한족(漢族) 이외 여러 민족들이 차지한 북방에선 16개 나라가 쟁투를 벌이는 오호십육국시대가 전개됐다. 이 시기 부견왕으로 대표되는 전진(前秦)이 일시적으로 북방을 통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진과의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하자 북방은 혼란에 휩싸였고, 탁발씨가 세운 북위에 의해 다시 ‘하나’가 됐다. 북방을 일통한 북위는 약 100년 뒤 동위.서위로 분열됐다, 북제.북주가 그들을 대체하는 등 진통을 거듭했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 속에 한나라 때 독존적 지위를 부여받았던 유가(儒家)학설은 한족 지배계급, 일부 소수민족 지배계급들에게 이용됐지만, ‘제세(濟世)작용’에서의 무능함이 갈수록 드러나 권위의 절대성을 점차 상실해 갔다. 반면 불교는 오히려 더욱 확산됐다. 당시 불교가 확산된 가장 큰 배경은 혼란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상적 귀의처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전쟁, 사회경제 기반의 파괴, 끊임없는 죽음 등은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에 커다란 손실을 입혔고, 사회 전반을 하나의 거대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사회 최하층에 살던 사람들은 전쟁의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았고, 마치 끊임없이 흔들리는 거미줄 같은 신세가 됐으며,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는 상태”(중국 황유복.진경부 교수)였다. 혼란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귀의처를 찾도록 끊임없이 강요했던 것이다.
5C초 백제 발정, 겸익, 담혜스님 등 장도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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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용문석굴에 있는 신라상감. |
이 때 중국인들에게 제시된 불교철학 특히 선악응보설, 모든 사람이 다 중요하다는 불성사상 등은 대해에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항구처럼 여겨졌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었다. 재난이 일상화 된 방대한 땅에서 불교는 서민층에 ‘하나의 비옥한 정신적 장원’을 제공했다. 물론 서민층에만 ‘장원’을 제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배자들에게도 혼란은 역시 혼란이었다. 하루 아침에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고, 뒤에서 일어난 내란에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불교는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였다. “백성들 속에서 깊은 발전의 토양을 발견한 불교는 지배층의 앙모와 수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불교를 믿는 것은 ‘유행’이 됐다. 전진의 부견왕, 후진의 요흥왕, 북위의 탁발씨, 북주의 우문씨 등은 모두 불법을 숭상하는 것을 행복한 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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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종남산에서 본 서안 전경. |
혼란한 이러한 때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펴고자 중국에 찾아오는 서역 스님들은 계속 늘어갔다. 〈중국불교〉(민족사)에 따르면 서진 이전까지 중국에 들어온 서역 출신 스님은 무려 23명이었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뒤 이어가며 중국에 찾아온 고승은 30명 이상이었다. 당시를 대표하는 서역 출신 스님이 불도징(쿠차 출신), 승가발징(간다라 출신), 담마난제(아프가니스탄 출신), 승가제바(간다라 출신), 구마라집(쿠차 출신), 불야다라(간다라 출신), 담체(사마르칸드 출신), 진제, 구나발타라(부남 출신), 월비수나(아프가니스탄 출신), 보리류지(북 인도 출신), 나련제려야사(파키스탄 스와트출신), 달마급다(남 인도 출신)스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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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종남산에서 감을 따고 있는 중국인 아이. |
중국 대륙을 사상적으로 일통(一統)한 불교는 점차 ‘법수(法水. 진리의 물)’를 고구려.백제.신라 등 해동 삼국으로 흘리기 시작했다. 중국 남조 양(梁)나라의 혜교스님이 지은 〈고승전〉 ‘축잠전’에 보이는 “지둔스님이 후에 고구려 도인에게 아래와 같은 글을 써주었다….”, ‘담시전’에 나오는 “석담시는 관중 사람이다. 경률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 선화에 가 삼승을 뛰어나게 전수하고….” 등은 모두 고구려에 불교가 소수림왕 이전에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가된다. 우여곡절 끝에 소수림왕 2년(372) 전진의 부견왕이 고구려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전파했고, 침류왕 원년(384)에 백제에서 불교가 공인(公認)됐다. 이차돈의 순교를 거치며 신라에도 불교가 전해졌다.
삼국에 불교가 전래된 뒤 해동의 출가자들은 점차 입중구법(入中求法)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중불교문화교류사〉(까치출판사)에 의하면 “6세기 초부터 6세기 말까지, 즉 중국의 남조 양나라로부터 남조의 진나라가 멸망되기 이전까지, 신라 눌지왕으로부터 진평왕에 이르고, 고구려의 영양왕에 이르며, 백제의 혜왕에 이르는 시기가 바로 구법활동의 흥기단계(502~589)”다. 이 시기에 중국에 들어가 구법활동을 한 대표적인 스님이 바로 백제의 발정.겸익.담혜.현광스님, 신라의 각덕.원광.명관.지명.담육스님, 고구려의 의연.지황.파야.실법사.인법사 등이다. 당시 구법승들이 공부한 주요 지역은 양나라 진나라 등 남조 지역이었다. 물론 개별적으로 장안에 간 사람, 멀리 인도로 넘어간 스님도 있었다. 흥기단계를 지나 구법활동이 ‘흥성되던 시기((590~907)’가 되면, 중국에 들어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한 스님의 수는 180여명으로 늘어난다. 흥성기 가운데 ‘589년부터 618년’ 사이 중국에 온 스님은 신라의 연광.안함.원안스님, 고구려의 혜관스님 등 4명. ‘당나라 고조 이연시기부터 측천무후 시대(618~704)’에 이르는 87년 동안엔 41명의 유학승(신라 38명.고구려 2명.백제 1명)이 당나라를 찾았다. 명랑.자장.의상.신방.원측.도륜.의적.도증.승장.혜각.법랑스님 등이 시기를 대표하는 구법승들이다.
물론 장안(서안) 흥교사에 탑이 남아있는 원측스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고 귀국해 오대산에 월정사를 개산하고,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도록 한 자장스님, 장안 종남산 지상사 지엄스님 문하에서 화엄을 배워 ‘해동화엄의 초조’가 된 의상스님 등은 특히 주목되는 스님들이다. 이들 스님과 함께 흥성기에 중국에 들어갔다 천축으로 간 스님도 있다. 혜업.현조.현각스님 등이 그들인데, 이 스님들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은 당나라 의정스님이 남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전한다.
당나라 중종부터 순종에 이르는 ‘입당구법 흥성기’ 제3기(705~805) 시기, 중국에 들어가 불법을 공부한 해동의 스님들은 모두 38명. 무착.혜초.현초.의림.오진(悟眞).지장스님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데, 이 가운데 천축을 돌고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긴 혜초스님은 유명하다. 혜초스님의 천축여행 과정은 다음 호에 자세하게 살펴볼 생각이다.
三國 유학승 한국문화 전반에 큰 영향
흥성기의 마지막 단계인 ‘당나라 현종부터 애제’(806~907)에 이르는 100년 동안 중국에 들어간 유학승은 모두 35명(〈한중불교문화교류사〉에 의거). 명신.혜각.수혜.김정.진공.선범.사미.도진.사교.신혜.융락.사준.소선.회량스님 등이 대표적. 이 시기 중국에 들어가 선법을 배우고 귀국한 도의.혜철.무염.현욱.도윤.체징.이엄스님 등은 각각 ‘선문(禪門)’을 열고, 화엄에서 선으로의 변화를 이끌게 된다. 6세기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던 ‘입중구법(入中求法)’ 활동은 9세기 말이나 10세기 초, 시대적으로 북송 중기이후 시들해지고 만다. 국내적으로 고려 중기 이후 불교는 점차 활력을 잃었고, 조선이 개국되면서 유교에 ‘사상적 왕좌(王座)’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해동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구법유학승의 계층과 출신 지역은 다양했다. 중국의 특정 지역에만 머무른 것도 아니었다. 중국 곳곳에 다니며 혁혁한 자취를 남겼고, 중국불교와 문화 발전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귀국한 그들은 ‘홍법(弘法)의 문’을 열어 삼론학, 열반종, 율종, 유식학, 법상종, 화엄학, 선종, 밀종 등 다양한 종파와 불교사상을 해동에 전파하고, 해동 사람들의 안목(眼目)을 높였다. 다시 말해, 구법승들의 입중(入中) 동기가 무엇이든, 그들이 가져온 불교(사상)가 한국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엄청나게 컸다. 보편적이고 평등한 종교인 불교는 삼국인들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했다. 업설과 윤회, 불성사상, 자비사상 등은 개개인의 가치관 정립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문화적.사상적 면에서 국가에도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해동에 전파된 불교는 한국문화의 수준을 여러 단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모든 발전은 5세기 초부터 시작된 ‘입중구법승’들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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