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성숙 시인의 <백석 시> 발제, 잘 읽었습니다. 백석이 1958년 1월 초에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그곳의 축산반에서 활동한 내용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새로운 공동체와의 만남과 시적 부활>
전후의 해빙기속에서 자신의 문학관을 강하게 주장하던 백석은 1958년 10월 이후 몰아닥치기 시작한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심한 좌절을 겪는다. 전 농촌이 협동조합으로 묶어짐에 따라 사회주의적 개조의 완성을 공표하기에 이르렀고 이제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위해 돌진해야 한다는 공식적 입장이 내려지면서 문학 분야에서도 '부르주아적 잔재'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학의 도식주의화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요구하였던 일련의 문학가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비평가 안함광과 한효, 소설가 조중곤과 전재경, 시인 김순석 등은 이러한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비판의 직접적 표적은 되지 않았지만 도식주의 문학을 비판했던 그 동안의 행적으로 인하여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던 일부 작가들은 그 화살을 피해 아예 농촌이나 공장과 같은 현지로 지원해 나갔다. 백석은 이런 길을 걸은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표면적으로는 1958년 10월에 내려온 당의 '붉은 편지'를 받들고 내려간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전반적 경직화 속에서 숙청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지로 나감으로써 원천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재앙은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958년 1월 초에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그곳의 축산반에서 일하였다. 그가 내려간 후에 그 동안 편집위원으로 일하던 『문학신문』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곳은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등화를 쓰고 있을 정도로 산협의 벽지이다. 하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농산반으로 옮겨 일하게 된다. 삼수읍에서도 십 리나 된다는 이 산협의 협동조합에서 일을 하면서 시를 발표했다는 사실은 8 · 15 이후 번역과 아동문학만을 하고 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좋은 환경에서도 시를 쓰지 않던 그가 어떤 연유로 첩첩산중에 내려가 오히려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시들을 발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지체험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1959년 이후에 북한 문학계는 기수의 창조를 강조하였다. 사회주의적 개조가 끝난 이 시점에서 북한의 노동자 농민은 더 이상 과거의 모습이 아닌 변화된 생활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작가들이 현지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해 있을 무렵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로 들어간 작가에 대해 신임과 배려가 주어졌다. 이 점이 그 동안 자신의 본령인 시작보다는 번역과 아동문학에서 우회적으로 작업을 했다가 이제야 비로소 시작을 할 수 있었던 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자원이라는 형태로 나온 이 현지에서의 체험은 그를 다른 어떤 정치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까지나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백석과 같이 현지로 나간 작가들이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동안 해오던 작업마저도 그만두어 버리는 경우를 감안하여 보면 현지생활이란 것이 부차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협동화된 농촌의 생활을 하면서 그 동안 자신이 줄곧 가졌던 공동체에 대한 지향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시를 쓰고자 하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으리라는 점이다. 휴전 직후부터 시작된 북한의 농업협동화는 1958년에 이르러 완결되었다. 빈농민의 자발성과 국가적 주도의 상호작용으로 하여 급속하게 이루어진 이 협동화과정은 이전의 농촌사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삶의 양식을 가져다주었다. 일제하의 농촌과 협동화된 이후의 농촌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였다. 전근대 시기 농촌의 민중생활 속에서 간신이 유지되어 오던 공동체 삶의 양식은 근대에 이르러 급속하게 와해되었다. 백석이 일제하에 시작활동을 했던 무렵은 바로 이 과정이 이루어지던 때로 그는 민족적 상상력을 통하여 간신히 공동체의 삶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해방후 토지개혁을 거쳐 협동화가 이루어졌을 때 거기에는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삶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하 이후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간신히 유지해 왔던 공동체적인 삶의 지향이 이러한 협동화의 결과로 급속하게 부상하고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석은 평양이란 중앙에서 떠나 전기도 아직 들어오지 않은 이곳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면서 흥분에 휩싸였을 것이고 이를 시로 옮겨야 할 충동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무렵의 농촌이 그가 그리던 유토피아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평양을 떠나 이곳으로 올 때 당시의 북한이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줄곧 북한의 문학계가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에 대해 비판 하였다. 북한 문학의 도식주의화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그동안의 행적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 산업의 오지로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그가 당시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의 억압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협의 마을로 왔을 때 이곳에서 이런 흥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평양으로 대변되는 중앙도시와 민중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지방의 농촌마을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하 백석 시세계 특징중의 하나가 탈중앙집권화의 지향이라고 했던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제하에서 서울보다는 여러 지방을 돌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과 밀착된 민중적 삶의 방식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그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처럼, 근대를 넘어선 사회주의라고 표방하는 북한 사회에서도 중앙집권화된 평양을 비릇한 도소재지와는 달리 이러한 농촌 지역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공동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였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관료주의에 의해 부분적으로 물들어 있는 그러한 농업협동조합이기는 하였지만 그 속에 깃든 해방의 의미에 그는 큰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그의 시 「동식당」과「전별」에 잘 드러나고 있다.
아이들 명절날처럼 좋아한다.
뜨락이 들썩 술래잡기, 숨박꼭질.
퇴 위에 재깔대는 소리, 깨득거리는 소리.
어른들 잔칫날처럼 흥성거린다.
정주문, 큰방문 연송 여닫으며 들고 나고
정주에, 큰방에 웃음이 터진다.
먹고 사는 시름 없이 행복하며
그 마음들 이대도록 평안하구나.
새로운 둥지의 사랑에 취하였으매
그 마음들 이대도록 즐거웁구나.
아이들 바구니, 바구니 캐는 달래
다 같이 한부엌으로 들여오고,
아낙네들 아끼여 갓 헐은 김치
아쉬움 모르고 한식상에 올려놓는다.
왕가마들에 밥을 짓고 국은 끓여
하루 일 끝난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그 냄새 참으로 구수하고 은근하고 한없이 깊구나
성실한 근로자의 자랑 속에……
밭 갈던 아바이, 감자 심던 어머이
최뚝에 송아지와 놀던 어린것들,
그리고 탁아소에서 돌아온 갓난것들도
둘레둘레 두려놓인 공동 식탁 위에,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 노을이 비낀다.
ㅡ 「동식당」 부분
아이들이 명절날처럼 좋아하고 어른들이 잔칫날처럼 흥성거리는 풍경은 일제하 백석의 시를 자연스럽게 떠올려준다. 비록 대부분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명절날 가족과 일가들이 모여 조화롭게 웃고 떠드느 모습을 그린 것이 많다.
ㅡ 「근대인의 고향상실과 유토피아의 염원」/ 김재용 / 문학평론가 / 원광대 교수 ㅡ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